이윤호의 [마을] 시리즈는 논, 집, 나무, 구름, 물, 길 등 이상적인 농촌 마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여러 높이와 각도로 포착된 마을의 면면은 반복의 단조로움을 피해간다. 이 시리즈 중 가로 길이 3미터가 넘는 대작은 작은 마을 풍경을 기념비적인 것으로 고양시킨다. 수평면 위에서 안정감 있게 솟아 있으며,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풍경은 산 아래 밭과 집, 앞에 물이 차 있는 논으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이 살아가는 터전에 대해 작가가 부여한 숭고함이 배어난다. 그의 풍경화는 대부분 멀찍이서 잡혀진 탓인지 인물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봄날]은 예외적인 작품으로, 농부가 곡괭이 매고 일하러 가는 모습이 작게나마 보인다. 작가는 그 인물이 자신일수도 있다고 말한다. 봄날을 알리는 꽃무리 등 일부만 색이 실해져 있고, 먹 선으로 시원시원하게 그은 숲이 일하러 가는 농부의 가벼운 발걸음과 봄날이 자아내는 경쾌한 느낌을 전달한다.
작품 제목부터 계절의 여운이 강하게 드러나는 [오월] 시리즈는 논에서 먹이를 찾는 백로와 그 뒤편으로 펼쳐진 마을, 그리고 녹음을 반영하는 논의 물이 이상향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적인 요소들을 전통이나 관념으로부터 추출하여 조합한 장면이 아니라, 사실 풍경이다. 작가는 상상보다 자연이 더 다양하다고 보며, 철저히 보여진 장면을 그린다고 말한다. 이윤호는 먹을 능숙하게 다루는 화가이지만, 동양화에 관련된 인습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담론의 무게를 떨쳐 내려고 노력한다. 자연의 본질에서 기운생동이 나온다고 보는 그는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요시한다. 필력은 그 이후의 문제이다. 가령 그의 작품 [산정]에는 눈 덮인 산 위에 그어진 선들이 보이는데, 그것은 작가가 임의적으로, 또는 장식적으로 그려 넣은 선이 아니라, 산을 벌목하고 남은 자리에 눈이 녹아 생긴 선들이다. 그는 앞산에서 거의 대지 미술 같은 조형적 ‘작품’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지시대상에 완전히 묶여있는 경직된 사실주의에 경도되지도 않는다. 주로 수묵으로 그려진 그의 풍경에 간간히 찍힌 다양한 색 점들은 그때그때의 느낌을 강조한 것이다.

가령 자연에서 발견될 수 없는 추상적인 색 점들은 새 지저귀는 아침의 발랄함이나 음악에 맞춰 집단적으로 춤을 추는 듯한 소나무 따위를 표현한다. 이윤호는 평화스러운 농촌풍경을 그리지만, 가벼운 터치로 일관하지는 않는다. 작품 [새벽]은 먹의 강가에서 새벽부터 일하는 어부를 그린 것으로, 서정성과 삶의 리얼리즘을 동시에 담아낸다. 그러나 다양한 먹의 농담으로 운치 있게 채워진 화면에서 새벽 노동의 힘겨움은 대체로 덮여져 있다. 멀찍이서 바라본 풍경에서 인간의 대소사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사는 무시 되었다기 보다는, 자연사에 편입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시간 주기 속에서, 인간의 희로애락은 그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작은 색 점들 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윤호의 작품이 지상적 삶의 유한성과 초월적 무한성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새벽]은 밤에서 새벽으로 변모하는 하늘의 기운을 대지에 붙어있는 나지막한 삶의 터전과 대조한다. 뾰족한 교회 십자가가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처럼 대지와 하늘을 연결해주는데, 작가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지상의 삶이 스스로의 비루함에 갇혀있지 않기 위해 잊어서는 안 되는 무한한 타자를 가리키고 있다. 작품 [아침]은 경작 때문에 대지 위에 그어진 일정한 선들과 화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하늘이 맞붙어 있다. 아무런 인위적 경계선이 없는 하늘이 인간에 의해 점유된 자연과 대조된다. 작품 [산정]은 벌목 때문에 생긴 산의 거대한 주름들과 산에서 뻗어 나오는 기운들이 빈 하늘을 채우는 모습이 대조된다. 이러한 대조적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이윤호의 작품 속 초월성은 현실도피가 아니라, 보다 깊은 리얼리티를 위한 것이다. 그의 그림에서 인간사에 무심할 것 같지 않은 다양한 표정을 가진 하늘은 그 아래의 모든 지상적 존재들의 평등함을 예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훈 미술관 3개 층을 모두 채운 첫 개인전(1990년)이래, 쉼 없이 쌓아온 작품 이력에는 많은 변화가 있어왔다. 스스로 밝히듯이, 이윤호는 과거에도 풍경화를 그렸지만, 거기에는 달동네나 비참한 농촌 현실 같은 것이 스며있는 사회적인 풍경화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자연의 본질적인 것에서 찾을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초월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현재의 양평 풍경에서 보여 지듯 완전한 초월이랄 수도 없다. 삶의 터전이 담겨있는 그의 그림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고자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에게 초월은 동양화를 형식화하는 화단 일각의 흐름으로부터의 거리에서 생겨난다. 그의 그림은 동양화의 문인화나 사군자 따위로 대변되는 전형적인 관념 산수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그림에는 수묵의 힘이 느껴진다. 작품 [길]은 밭과 산 사이에 놓인 눈 쌓인 겨울 길을 보여주는데, 빠르고 힘차게 그어진 다양한 농담과 두께의 먹 선으로 밝음과 어둠으로 환원된 겨울의 사실적 풍경을 포착하고 있다.
출전 | 경기문화재단 시각예술 부문 지원사업 모니터링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