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근의 계획도시로 재탄생한 일산은 도심 속에 자연을 다시 이식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얼추 자리를 잡은 곳이다. 인간을 위협할 수 있는 거칠고 야생적 자연도 완전한 인공 체계로 환원된 곳도 아닌, 적절한 균형이 잡힌 그런 곳을 사람들은 살기 좋은 곳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균형을 보여주는 이상적인 장소 중의 하나가 바로 정원이다. 강재희가 그린 ‘아버지의 정원’(부제)은 인공과 자연이 공존하며, 닫혀있으면서도 열려있는 ‘살아있는 구조’(롬바흐)로 정원을 주목한다. 정원에 대한 이러한 의미는 그림이라는 살아있는 구조에도 적용될 수 있다. 화가는 정원을 그리지만 그것은 소재의 차원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림은 정원과 동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린 정원은 일산 지역의 아파트 1층으로 그 앞뒤의 자투리 공간이 옵션으로 딸려 있는 곳이다. 아파트의 편리함과 자연을 동시에 향유할 수 있는 그 곳에 작가의 아버지는 하나의 이상적인 소우주를 건설해 놓았다.

정식 정원이라고 하기에는 넓지 않은 장소이기에, 한 뼘의 땅도 허트루 낭비하지 않고 오밀조밀하게 가꾸어놓은 식물과 정원용 장식물이 그림이라는 또 하나의 소우주에 오롯이 옮겨져 있다. 지난 일 년 간 그린 30여점이 작품은 정원의 구석구석을 현장에서 사생한 작품들과 설악산 풍경으로 이루어진다. 여러 각도와 스케일로 잡혀진 정원 풍경에 생기와 운치를 부여해 주는 것이 바닥에 깔린 붉은 색 벽돌들이다. 작가에 의하면 그 벽돌은 이화여고에 있다가 예원학교로, 다시 집으로 옮겨진 것으로 100년 가까이 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인공물이면서도 오랜 시간의 흐름에 의해 자연에 가까워진 사물이다. 그 뒤로 정원의 배경을 이루는 것이 하얀색 아파트 건물이다. 붉은 벽돌 바닥과 건물 사이에 펼쳐진 샌드위치 같은 공간에 크고 작은 식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작품 [아버지의 정원] 시리즈에 활기를 부여해주는 또 하나의 요소는 화분들인데, 다양한 색과 형태를 가진 화분들이 작품마다 다채로운 공간감과 리듬을 만들어낸다.

조형적인 차원에서의 리듬감은 오일스틱으로 빠르고 정확하게 그려진 방식에서 두드러진다. 그것은 식물의 줄기와 잎새들을 재현하는 선이기도 하지만, 그림의 표면을 뒤덮는 밀도 있는 추상적 언어로 간주될 수 있다. 강재희는 동양화의 전형적인 재료라고 할 수 없는 오일스틱을 활용한다. 여기에 수묵이 가세한다. 작가는 장지 위에서 기름과 물이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 오일스틱은 자연과 사물에 외곽선을 부여해줌과 동시에, 그리기라는 행위에 방점을 찍어준다. 오일스틱이 만들어 내는 선은 자연의 일부인 듯한 수묵의 선과 달리, 지글거리는 조형적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다. 이러한 경향은 그가 정원에서 선택하기를 즐겨했던, 추상 조각 작품 같이 생긴 선인장 화분에서도 나타난다. 선인장 화분은 [아버지의 정원]에서 원근에 의해 뒤쪽의 큰 나무와 같은 크기의 기념비적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선인장] 시리즈처럼 그 자체로만 부각되는 경우도 있다.




작품 [아버지의 정원-선인장]은 지지대가 있는 선인장 여섯 개를 각 패널에 하나씩 담은 것인데, 모두 다른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녹색을 빼면 회색, 붉은 색 등 나머지 색들은 재현에 충실하기 보다는 조형적인 선택의 결과물임을 알려준다. 구성적인 측면에서 선인장 그림들은 평면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입체감이 없는 화분 안에 일률적인 크기로 서있는 선인장들은 지지대의 도움을 받아 기기묘묘한 형태를 뽑아낸다. 상당부분은 작가의 첨삭에 의한 결과물이라 생각된다. 그것들은 마치 분재가 그러하듯이, 자연과 인공의 합작품처럼 보인다. 때로 선인장은 현실적 맥락을 지워버리고 우주적 심연 위에 떠오른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강재희의 그림에서 화면 가까이 당겨진 정물은 사물의 구체성이 강화되기 보다는 추상성을 강화한다. 작품 [파란 화분]은 잎사귀 끝이 잘릴 정도로 화면 가득히 잡은 정물화이다. 푸른 색 기운도 도는 잎은 대상에 얽매인 자연적 색채로부터 자유로와지려는 색으로 덮여있다.

작품 [휴일]은 벽 위에 올려진 청색, 백색 화분의 교차와 자연적 색을 벗어난 식물들이 열 지어 있다. 이 전시에서는 아버지의 정원 외에 또 다른 풍경들이 포함되어 있다. 설악산 풍경이라고 하는데, 그의 그림에서는 대자연 역시 이상적인 정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작품 [오색-숲]에서 뒤의 빽빽한 숲과 그 앞의 하얀 바위들은, 정원의 나무와 돌바닥처럼 자연의 야생성과 정돈된 모습이 공존하는 것이다. 같은 시리즈에서 풍경이 보다 뒤로 물러앉을 때에도 하늘이나 물 같은 요소--정원처럼 담장 안에 담아 놓을 수 없는 자연의 무한한 차원--는 화면의 위아래를 조금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자연은 조율되고 있으며 그것은 정원술이나 회화술에서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크 브로스는 [식물의 역사와 신화]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적절한 무질서 속에서 자라나는 정원을 언급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가장 오래된 정원은 생명의 근원이 되는 정원, 황금기의 정원, 다시 말해 낙원이다.




그것은 다듬어지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식물이 자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제한되어 있고 폐쇄되어 있는 공간을 말한다. 이러한 제한은 삶의 지속성과 안정감을 부여해 준다. 그것은 마치 그림의 필요조건처럼, 조형적인 요소가 거침없이 펼쳐지기 위해 정련된 평면이 마련되어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림 자체는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정원술처럼 자연의 과정에 개입함으로서 모종의 결과물을 생산한다. 철학자 롬바흐는 [정원의 철학]에서 정원은 자연의 야생에 맞서는 인간의 성과여도 안 되고, 인간의 정리하는 손 없이 이루어지는 자연의 성과여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 안에서 자연은 강요됨 없이 스스로를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연과 필연 사이에 존재하는 예술 또한 그러하다. 강재희의 그림은 자연에 의해 입력된 정보가 발현되는 생장과 더불어 끝없는 돌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정원과 예술이 수렴되는 지점을 향한다. 또한 그의 작품은 정원술이든 회화술이든 자연과의 교감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출전 | 경기문화재단 시각예술 부문 지원사업 모니터링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