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주체와 대상, 현실과 환영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지각의 다양한 양상을 컴퓨터를 비롯한 뉴 미디어를 통해 탐구한다. 작품 [보이지 않는 갑옷]은 새로운 변화에 직면한 주체가 자기 보호 본능을 발동시키는 메카니즘을 영상과 오브제의 조합을 통해 보여준다. 그러나 이 갑옷은 매우 취약한 것이며, 반드시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심리적 갑옷에 해당되는 것이 다른 작품에서는 부적으로--작품 [보호를 받고 싶으면 부적을 가지고 오라]--나타나기도 한다. 비유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갑옷이나 부적이나 시대착오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작품 [수영장]에서 작가는 보다 적극적으로, 직면한 세계에 벌거벗고 뛰어든다. 모니터는 일렬로, 또는 정방형으로 배치되면서 새로운 세계를 헤쳐 나가는 주체의 환경이 되어준다.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단지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고영택은 최근 열린 개인전 작가노트에서 ‘나는 물살을 가르면서 수면의 이미지를 파괴하는 물결을 일으킴으로서, 본다는 것의 경계를 극복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한편 이러한 뛰어듦은 자아가 정보의 바다와 같은 류의 코드로 변화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과 같이 그 계를 헤엄치는 물고기와의 비교를 통해, 정보로 환원된 주체가 이 새로운 계에서 자연스러운 위치를 차지하지 못함을 예시한다.
고영택의 작품에서 새로운 계와의 만남은 가상과 실제가 조우하는 다양한 상황 연출로 더욱 정교해진다. 영상 퍼포먼스 작품인 [너와 나, 나와 너]는 현존하지만 현재하지는 않는 상대(너)와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하는 주체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에서, 거울이라는 고전적 매체를 전자매체로 번안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그의 작품에서 거울은 유리로 뒤덮인 고층 빌딩의 표면, 야간 여행 중에 본 차창, 그리고 전자식 장치에 의해 움직이는 실제의 거울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된다. 작품 [escape]는 사람들에게 보여 지기는 하지만, 정작 자신의 내부는 보여주지 않는 고층 빌딩의 유리 피막을, 여러 대의 LCD에 담긴 날아오르는 천사의 모습을 통해 꿰뚫어 보려한다. 대지와 하늘의 존재를 무색케 하는 거대한 인공 반사막은 사이버스페이스에 비교될 수 있다. 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계를 넘나드는 천사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작품 [야간여행]은 기차를 타고 가면서 찍은 영상으로, 풍경에 끼어드는 다양한 사물을 보여준다. 창과 미디어는 바깥 풍경을 비춤과 동시에 떠도는 상념과 상상을 투사한다. 작품 [반사]는 관객이 내는 소리에 따라, 프로그래밍 된 컴퓨터를 통해 연결된 모터가 수많은 거울을 움직인다. 말하는 관객의 모습은 이합집산 하는 파편이 되어 스크린에 비추어진다. 주체는 다름 아닌 말하는 주체, 한 문장의 주어를 차지하는 그 위치에 있는 존재이다. [반사]는 언어가 주체를 형성하며, 또 해체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일종의 전자 거울의 형태로 구현한다. 파편화되어 떠도는 거울 조각은 큐브 짜맞추기 게임과 달리, 한 번도 제대로 맞춰지지는 않는다. 이는 주체가 이미 정합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개입을 통해 구조화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가 고안한 장치에 내재한 미디어 언어는 애초에 분열의 증후를 내재한 (언어적)주체화의 과정을 가속 시킨다.
영상설치 작품 [빛과 눈]에서도 빛을 매개로 대상을 포착하는 시각상의 교란을 다룬다. 너무 빠르게, 많이 보여 지는 이미지는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을 낳는다. 이는 전자미디어라는 새로운 거울상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메카니즘에 대한 작가의 언급이다. 그것은 또한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시각이라는 감각에 편중되어 있는 기형적 문화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르네상스 이래의 문화적 관습, 또는 기술적 한계에 의해 시각상의 우위가 지속되고 있으며, 이는 지배 및 소유와 연관된 재현의 논리가 완전히 관철될 수 없는 현실을 식민화하는 방식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전면적인 심미화는 이러한 식민화의 또 다른 모습이다. 코드를 통해 이미지가 합성되고 소통되는 이 시대는 구술성(청각)이 지배하는 원시시대와 문자성(시각)이 지배하는 근대와도 다른 새로운 국면의 새로운 매체계를 가진다. 고영택의 작품은 구술적 대면성이나,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합리성이 아니라, 전자적으로 매개된 소통에서 야기되는 탈중심성을 다룬다. 그의 작품은 자아든 현실이든 고정된 입지를 가지지 못하는 현대 문화의 메카니즘을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드러낸다.
인류의 문화사는 현실, 육체, 자연을 자신들의 뜻대로 운용하기 위해 정보화시켜온 과정이다. 그러나 정보로 환원될 수 없는 나머지 덩어리들이 있다. 이것은 인간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운명적 질곡이기도 하지만, 끝없이 다른 희생자를 필요로 하는--이러한 경향은 모든 인간을 임금 노동자나 소비자로 환원하는 과정을 통해 강화 된다--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방적 가능성으로 비추어지기도 한다. 자연은 가혹하기는 하지만, 물적 축적에 의한 지배를 모른다는 점에서 기술 문명보다 평등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 또한 코드화 될 수 없는 잔여물들, 무정형의 덩어리들과 관련을 가진다. 그러나 보편적 소통을 위해서는 현대 미디어의 언어를 무시할 수 없다. 붓 대신 선택된 뉴 미디어의 주안점은 타자를 구경꾼으로 소외시키곤 하는 스펙타클의 생산 장치가 아니라, 상호 작용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효과적 도구로서의 측면이다. 주체나 객체가 아니라, 상호적 주체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주/객체 사이의 이분법은 더 이상 언어(말)과 현실(사물) 사이에 놓인 심연을 탐사하기 위한 섬세한 틀이 되지 못한다. 기표의 흐름으로서의 현실을 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체 또한 부유하고 기표라는 사실이 인정되어야 한다. 가상현실이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몸은 부재 기표로 등장하는데, 부재 기표가 되어 떠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은 리얼리티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고영택의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분열된 육체의 조건은 아직까지는 기술에 의해 완전히 식민화되지 않은 어떤 영역을 지시한다. 추상적 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몸을 매개로 한 상호작용성은 일방적 힘의 관철을 노리는 식민화에 저항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거대 자본과 유착된 기술이 인간의 육체와 경험을 완전히 재현(복제, 환원)하려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것은 주체와 대상을 조립과 분해의 패턴들로 가시화하는 새로운 거울들이다. 사이버 거울은 실제의 거울이 그러하듯이 주체를 소외시키고 분열시키며, 환영의 무대를 제공해 준다.
캐더린 헤일즈는 [사이버 공간의 유혹]에서 사이버 거울에 비추어진 주체의 위상을 언급한다. 여기에서 정체성에 대한 불안은 주체의 연속성을 확증하는 정보패턴의 일관성이 흔들리면서 야기된다. 정신분석학에서 부재나 거세에 상응하는 재앙은 정보회로의 고장, 즉 자아를 표상하는 패턴의 분산이다. 헤일즈는 거울단계를 이론화한 라캉의 심리학을 사이버 거울에 적용시킨다. 사이버 거울에서도 기의와 기표의 자의적 관계가 성립되며, 주체의 위치는 불안정해진다. 주체의 경계는 개방되어 있으며, 정체성에는 타자의 흔적이 남아있다. 주체화 과정에 억압이 게재되므로, 타자에 오염되거나 침입되는 것은 재앙이라 할 수 없다. 헤일즈는 통제되거나 예견될 수 없는 어떤 것을 대변하기 때문에 타자를 존중하고, 자아와 다르면서도 자아를 풍부하게 하는 것으로 타자를 수용해야 한다고 본다. 타자성이 실현이 구현된 물질세계는 가상세계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우 섬세한 구조, 감각적 풍부함, 물적인 안정성, 자발적인 진화 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욱 가치 있다는 것이다. 기술 유토피아의 환상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정보는 결코 일치 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기표들의 유희가 벌어지는 새로운 매체의 장에서 기술적 매개변수는 언어와 같은 역할을 한다. 라캉의 이론에 나타나듯이, 사회의 지배적인 언어인 상징적 질서로 편입되는 과정은 현실계로부터의 유리 등 많은 희생이 뒤따른다. 지배 및 소유에 유리한, 이러한 일방적 환원을 거부하는 방식은 말과 사물 사이에 놓인 간극에 주목하는 일이다. 고영택이 고안한 정교한 장치들은 매끄럽게 전개 되어야 하는 스펙타클에 이물질처럼 끼어드는 작가 자신, 그리고 관객들을 두드러지게 한다. 그들은 체계를 교란하는 요소들이다. 그것은 디지털 방식으로 일괄 정비되어 표준화(재현) 되는 현실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나는 지점들, 육체가 기계로 환원되지 않은 지점들, 그리고 될 수도 없는 지점들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를 통해 체계의 논리를 배반하는 배리(paralogy)와 차이의 감각을 고양시킨다.
출전 |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워크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