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층이 통으로 뚫려있고, 검은 장막이 처진 어둑한 공간은 연극 무대 같은 느낌을 준다. 평소에는 카페이지만, 공연이 열리는 소극장 무대로 활용되기도 하는 UV 하우스는 공간예술인 회화에 시간을 부여함으로서 연극적 성격을 띄게 된 황선숙의 작품과 잘 어울리는 듯하다. 작가는 지하의 갤러리가 아닌, 무대이자 카페인 공간을 선택했다. 꼭 작품을 감상하려고 모이는 장소만은 아닌 이런 공간은 화이트 큐브에서와 같은 집중성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타고 펼쳐지는 이미지에 반응할 것을 요구한다. 작품은 한 장의 그림을 볼 때와 같은 주목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통해 향유하도록 연출된다. 현수막 천에 출력된 수묵 이미지가 탁자마다 깔려 있고, 프로젝터 5대를 사용하여 여기저기에서 동시에 상영되어 영상과 설치적 요소가 결합된다. 이 전시의 메인 작품은 수묵 애니메이션이다. 수묵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들은 학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그 이후에 영상미디어를 전공한 작가의 이력이 반영된 것이다.
현대미술 및 화단의 흐름에 약간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던 황선숙은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만 하다가, 자신의 원래 전공인 먹을 재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움직임에 대한 동경과 먹에 대한 동경을 결합시켰다’고 말한다. 전시된 작품은 수묵 애니메이션 뿐 아니라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 있고, 그림도 있다. 작품 [아버지의 아버지의]의 경우가 사진으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다. 오른쪽 화면의 돌담은 스틸 사진에 움직임을 주었고, 화면 왼쪽은 조선시대의 초상화 스틸 사진이 움직인다. 시간의 켜를 쓰고 오랫동안 존재해 왔던 역사적 유물과 그 주인공이라 할 만 한 인물초상이 병치된 채 빠르게 흘러가는데, 그것은 마치 시간을 압축 재생하는 듯이 보인다. 이 작품은 영상이 결국 사진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수묵 애니메이션의 경우 그 소스는 작가가 그린 원화이기는 하지만, 스캐닝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황선숙의 작품은 전형적인 애니메이션에서와 같은 고정된 캐릭터나 기승전결을 가지는 내러티브가 없다. 대사도 자막도 없으며, 배경 음악도 종종 끊기는 때가 있다. 2층의 영상은 구상적 이미지의 파편조차도 완전히 사라진 추상적인 애니메이션이다. 작품 [수묵산조]는 집, 창문, 사슴, 얼굴, 나뭇잎, 물결 등의 이미지가 빠르게 변화하는 영상의 흐름을 타고 간간히 보여 진다. [숨 꿈]은 ‘숨 쉬는 꿈’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시작점과 종결점이 모호한 자유 연상, 즉 꿈처럼 끝없이 흐르는 이미지이다. 먹으로 그려진 추상적 패턴은 이미지가 시작되거나 변화할 때 매개 고리가 되면서, 도약하는 이미지들 간의 간격을 부드럽게 연결시켜준다. 베토벤의 음악에 맞춰 집, 아이, 사람들, 새, 사슴, 산, 바람, 물결 등의 이미지가 흘러간다. 현대적 시각 습관은 정지된 무엇인가에 오랫동안 주목하기 힘들다. 이에 비해, 움직이는 화면은 영상에 익숙해진 관습에 힘입어 쉽게 몰입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제작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애니메이션 역시 그림 못지않은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황선숙의 경우, 4분짜리 수묵 애니메이션을 한 편 완성하기 위해 수천 장의 원화가 필요하다. 게다가 컴퓨터를 비롯한 기술적 도구에 대한 능숙함도 요구된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영상은 그림의 자동적인 실행이 아니다. 또한 오늘날 영상은 그림과 겹치면서도 다른 소통 통로--실험 영화제, 온 라인, 영상 자료원의 소스 등--를 가지고 있다. 황선숙은 화가보다는 독립 애니메이션 제작자로서의 이력이 더 많다. 그러나 상업적인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언제나 ‘독립’ 일 수 밖에 없는 화가 출신의 작품은 그림과도 다르고, 전형적인 영상과도 다른 어떤 영역에 존재한다. 전체적인 느낌은 있지만, 명확한 서사적 연결점이 부재한 있는 황선숙의 작품은 제작 과정에서도 계획된 것과 결과물이 많이 틀리다고 말한다. 최초에 생각한 내러티브는 만들면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 모르는 즉흥성이 있으며 그 과정이 재미있다고 한다. 애니메이션의 입장에서 본다면 내러티브가 없지만, 미술의 입장에서 본다면 내러티브가 있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은 분업과 노동 집약적으로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애니메이션과는 차이가 있다. 하기야 요 몇 년간 미술시장에서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던 재현주의 풍의 회화 역시 분업과 노동집약이라는, 이미지 생산의 산업적 측면이 농후했던 상황에서 영상이냐 그림이냐 하는 형식적 차이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2층의 복도식으로 된 공간에는 화선지에 먹으로 그린 그림도 전시되어 있다. 아크릴 박스에 같은 크기로 배열된 작품들은 연작의 형식을 가진다. 라이트 박스에 담겨진 그림 역시 연작인데, 연작이라는 형식과 빛의 활용 등은 그녀의 그림에 내재된 영상적 운동감을 예시한다. 그러나 그림 한 장 씩 떼어 놓고 보아도 잠재적인 움직임이 존재한다. 화선지에 세필로 그려진 드로잉 연작에서, 여러 방향으로 틀고 있는 사슴의 이미지가 화면 곳곳에 듬성듬성 나타난달지, 아래의 손으로부터 시작하여 이미지의 파편들이 연결되며 자라나는 듯한 작품이 그러하다. 그렇지만 그림과 영상 간의 본질적인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림이 그 안에서 자족적인 완성도를 이루고 있다면, 애니메이션은 움직이기 위한 이미지가 필요하다. 스틸 컷 하나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장르 사이에 존재하는 황선숙의 작품에 내재된 연극성의 문제와도 결부된다. 연극성은 회화를 회화이게 하는 매체 제한적인 강령이 아니라, 예술들 사이의 공간에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회화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레싱은 [라오콘 또는 회화와 시 사이의 경계에 대하여](1766)라는 고전적 텍스트에서 회화가 다른 장르, 특히 시간의 속성을 가지는 장르와 어떤 변별점을 가지는지 논의 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자연으로부터 화가는 단지 한 순간만을 채택할 수 있을 뿐이다......우리가 더 많이 볼수록 우리는 마음속으로 더 많은 것을 덧붙일 수 있어야만 한다. 공존하는 구성 속에서 회화는 행위의 오직 한순간만을 채택할 수 있고 그러므로 반드시 가장 의미 있는 순간, 즉 선행했던 것과 뒤따라 일어날 것을 가장 분명하게 만드는 순간을 선택해야 한다’ 영상은 회화의 단일한 순간을 또 다른 문맥을 만들어 확장하는 것, 즉 단일한 순간의 전과 후를 부여하는 것이다. 영상에 배경으로 깔리곤 하는 음악은 문학에 상응하는 시간성의 장르로, 판토마임을 실행하는 시각 예술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현대 조각의 흐름]을 레싱의 논의로부터 시작하면서 공간에서 시간 쪽으로 옮겨가는 현대의 연극화된 미술의 향방을 언급한다. 크라우스에 의하면 시각 예술의 특징은 정적이다. 이 같은 조건 때문에 시각 예술 작품에서는 각 부분들의 관계가 보는 이에게 동시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동시성은 항상 연속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시각 예술은 정지와 움직임, 즉 포착된 시간과 흐르는 시간 사이의 결합 점 위에 있는 매체이며, 현대 미술가들은 이 점을 더욱 의식해 간다. 그리고 미니멀리즘 이후 연극화된 미술에서는 시간성이 극대화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시간성은 전체와 부분이 유기체적으로 조응되는 고전적 의미의 내러티브와 거리가 있는 자유연상이나, 무의식, 꿈, 최면 같은 흐름으로서의 시간성을 말한다. 움직이는 그림을 보여주는 황선숙의 작품이 가지는 내러티브는, 이와 같은 현대미술의 흐름과 연관 지어 설명될 수 있다. 한국화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인 ‘전통과 현대의 문제’는 그녀의 작품에서 한 가지 해결책을 찾은 듯하다. 물론 그것은 단지 수묵을 영상으로 표현함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통 회화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적 운동성--필선의 흐름, 다시점 등--을 현대적 테크놀로지를 통해 작품의 전면으로 이끌어 냄으로서 가능했다.
출전 | 경기문화재단 시각예술 부문 지원 사업 모니터링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