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청년작가’ 전으로부터 시작되어 올해 15회 째를 맞는 젊은 모색 전의 부제는 ‘I AM AN ARTIST’이다. 의기양양한 전시 부제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각 전시실마다 대단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들이 삶이나 예술에 대해 아이러니한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참여 작가들이 한국사회에서 자신이 예술가로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기획의도가 아닌, 작품으로 본 이 전시의 젊은 작가들은 예술이나 예술가라는 명칭에 딸린 본질적인 의미, 그리고 그것에 뿌리를 둔 순수한 신념을 고수하는 지고한 창조자이기 보다는, 기존의 것을 조금씩 비틀고 재맥락화 하면서 끝없이 다시 쓰기를 시도하는 아이러니스트에 가깝기 때문이다. 17명의 참여 작가들의 작품은 자신의 주변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 자연, 역사, 종교에 이르는 폭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다. 먼저 오석근과 이재훈은 지배적 가치가 재생산 되는 공장이라 할 수 있는 학교생활에서의 억압적인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는 젊은이의 자의식을 드러낸다.
오석근은 초등학교 교과서를 패로디 한다. ‘바른생활’ 등의 과목에 등장하는 캐릭터 철수와 영희는 순수의 결정체들로 간주되어 왔으나, 작가는 그들을 지배적 가치를 연기하는 꼭두각시로 재해석한다. 그의 작품에서 철수와 영희의 탈을 쓴 연기자들은 일탈적 행동을 한다. 연출된 다수의 에피소드들은 아마도 방과 후에 일어났던 기묘한 사건들로, 실제든 가상이든 개인의 무의식에 침전되어 있는 것들이다. 오석근의 작품 속 어린이는 실상이 그러하듯, 교과서적인 계몽이 가정하는 순진무구한 아기 천사로서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이재훈의 대형 프레스코 화들은 기념비적 스케일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만, 작품 제목 그대로 반(反)기념비적이다. 그것을 가득 채우는 것은 칼과 책으로 무장한 학생들인데, 그들은 영웅이 아니라 반(反) 영웅이다. 빛바랜 낡은 비문처럼 고풍스러운 양식을 가지는 이재훈의 작품은 타자들을 죽임으로서 결국은 자기도 죽는 현대 경쟁 사회의 논리를 알레고리를 통해 이야기한다. 대양을 누비던 등푸른 물고기가 소비자 앞에서는 소금에 쩔은 생선으로 나타나곤 한다. 공지영의 소설을 연상케 하는 닉네임을 가진 작가 고등어는 어른도 아이도 아닌 소녀의 눈을 통해 여성적 자의식을 표현한다. 억압된 타자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연출된 전시공간은 심리적이고 환상적인 면모를 가진다.

강석호, 위영일, 김시원의 작품은 현실의 변형이나 환상이 아니라, 직접 현실을 언급하는 문화 비평에 가깝다. 강석호는 잡지와 텔레비전 등 대중 미디어를 통해 볼 수 있는 유명 인사들의 특정 부위만을 무채색으로 베껴낸다. 작가를 불현듯 찔러 왔던 그 부분적 이미지들은 대중을 설득하기 위한 제스추어를 취하고 있는 명사들의 손이다. 손의 자세는 또 다른 언어라고 볼 때, 명사들은 비슷한 메시지를 판토마임을 하듯이 반복하는 셈이다. 위영일은 끊임없이 물신화된 체계를 만들어 경쟁을 확대 재생산하는 현대 사회를 패로디 형식으로 표현한다. 작가는 ‘그들만의 리그’를 바라보는 아웃사이더의 입장을 가진다. 그들만의 리그는 얼마나 복잡하고 가혹한지, 승리자가 되기 위해 모든 종류의 영웅들--배트맨, 헐크, 스파이더맨, 원더우먼, 수퍼맨 등--을 합쳐놓은 괴물 ‘짬뽕 맨’이 되어도 부족할 형편이다. 김시원은 5만원짜리 작품을 청탁받은 사건을 계기로, 예술가의 노동과 그 가치란 어떻게 계측되는 것일까를 탐구한다. 한 사회 속에서 유통(소통)되는 대상은 인풋/아웃풋의 논리를 넘어, 물신화의 체계 속에 포함되어야만 잉여가치를 창출할 수 있으며, 예술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것은 예술 작품의 생산이나 소통의 방식 자체를 작품의 내용으로 삼는다.
최원준은 창녀촌이나 콜라텍 등 싸구려 여흥문화를 사진에 담는다. 분홍빛 방석집이나 유치찬란한 장식으로 가득한 댄스 플로어에는 아무도 없는데, 그것은 그곳들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장소이긴 하지만, 불법적이거나 주변화 된 시설이라는 것을 예시한다. 그러나 가장 취약해 보이는 이 단면들은 결국 정도의 차이일 뿐인 대중적 오락 문화의 실상인 것이다. 이혜인의 작품도 우리를 둘러싼 불안정한 공간들을 탐구한다. 그곳은 여흥이 이루어지는 잉여적 공간이 아닌 필수 공간, 바로 집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개인과 집단의 기억이 쌓여있는 집은 개발에 의해 쓸려나가고 뭉개지는 파괴적인 장면으로 나타난다. 이 전시를 위해 벽에 직접 작품을 그린 작가는 그 벽화 역시 재개발 지구의 집들처럼 해체의 운명을 같이할 것임을 예시한다. 임승천의 조각은 언뜻 집이 다닥다닥 붙은 산동네 풍경을 연상시킨다. 밀집된 주거지는 머리가 셋 달린 배로 한 묶음 되어 있다. 이 [드림 쉽 3호]는 질곡의 땅을 떠나 유토피아로 향하는데, 이상향을 향해 멀리 떠나기에는 그 위에 실린 것들이 너무 많다. 인간의 욕망이 쌓은 바벨탑 같은 배는 방향성을 잃고 자체의 무게에 의해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아우성치는 속세로부터 단절된 높은 곳의 그들은 엄청난 하수를 바닥으로 쏟아낸다. 이 또 하나의 기념비적 구조에는 인간 사회의 계급적 면모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개인에게 가해지는 가공할 만한 폭력은 대개 시스템의 결과이다. 이완은 마트에서 사온 닭을 갈아 야구공을 만들어 깔아 놓았다. 소비 대상인 생산품에서 어떤 생명의 자취도 찾아볼 수 없다. 반면 음식이 썩어가는 과정에서 또 다른 생명의 과정이 시작되는 장면을 포착한 영상작품은 배경음악처럼 장중하기까지 하다. 김윤호는 1000컷의 관광버스 사진을 통해 매우 다채로운 듯하나 그게 그것인 이미지를 통해 균질화 된 현대 자본주의 문화의 단면을 포착한다. 17대의 PDP를 이용한 플래시 영상작업은 관객의 눈앞에서 계속 번쩍거리기는 하나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을 만큼의 속도로 명멸한다. 놀라움을 주지만 놀라움의 내용이 없는 상황이다. 그의 또 하나의 영상작업은 천둥번개가 치는지, 폭죽놀이를 하는지, 야간공습을 받는지 모호한 장면이다. 그것은 자연 재해와 축제, 전쟁의 공통 요소라 할 수 있는 가공할만한 힘(숭고함)을 전달한다. 안두진과 권경환은 숭고함을 이루는, 또는 숭고함의 이면을 보여준다. 안두진의 작품에 내재된 파토스는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고양되지만, 그것들을 이루는 것은 성냥개비나 면봉, 야광 빛이 감도는 플라스틱 조각 따위의 조야한 요소들이며, 권경환의 작품 속 웅장한 전쟁 장면은 오락과 구별되지 않는다.
안두진의 작품에서 점차 상승하면서 이상한 열기로 타오를듯한 성소(聖所)의 이미지나 권경환의 작품에서 무언가를 판단하는 천사의 이미지는 가공할만한 묵시록적 상황을 예시하지만, 그것은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무심할 정도의 해법이다. 신의 법칙 없이 인간의 규칙만으로 작동되는 세상의 재앙을 막을 도리는 없는 것이다. 릴릴은 남극이나 사막같이 인간 역사의 흔적이 지워져있는 숭고한 대자연의 풍경 속에서 우주와의 접촉 지점을 발견 한다. 이은실의 작품에서 유구한 세월동안 쌓였을 잔잔한 전통의 아우라는 불쑥 튀어나온 못 같은 에로틱한 장면과 만난다. 은근히 자극적인 그림이지만, 자연화 된 문명으로서의 전통과 자연적 날 것이 어울리지 말란 법도 없다. 나현은 인간이 주인공이지 않는 특이한 역사를 기술하려 한다. 그것은 전통적인 역사 서술이기 보다는 일종의 계보학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어떤 사건의 기원과 목적이라는 인간주의적 기획이 아니라, 시공간적 구조의 중층결정이라는 또 다른 힘이 작동하는 장(場)이 된다. 다소 작위적으로 연출된 이진준의 작품은 개별적 인간의 의지에 무관하게 가혹하게 재단되는 시간을 언급한다. 편집되지 않은 채 동일하게 흘러가는 참여 작가 17인의 인터뷰에서 관객은 자신이 듣고 싶고, 들을 수 있는 것만을 파악할 수 있다.
출전 | 미술세계 2009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