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화는 한때 마사회에 근무한 적이 있다. 해서, 자연스레 경마장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대개는 돈을 잃고 허탈해 하는 사람들, 망연자실해 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을 그려낸다. 그들의 머리는 하나같이 흰 여백으로 남겨져 있는데, 밤새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를, 철저한 무의미로 텅 비어버린 머리를 암시하는 것이리라. 도박으로 가족도 잃고 직장도 잃고 마침내는 존재의미마저 상실해 버린 사람들의 뻥 뚫린 가슴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의 공허한 마음은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의 마음과도 닮아있다. 작가는 말하자면 도박에 중독 된 사람들의 초상을 통해서 현대인의 공허한 초상을 읽어낸 것이다. 도박의 이면에는 무의미한 삶에의 인식이 그림자처럼 포개져 있다.

섬 시리즈(2006). 조르주 바타이유는 인간을 불연속적 존재로 정의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단절되고, 삶과 죽음이 절단돼 있는 것에서 인간존재의 비극을 읽어낸다. 그리고 그 단절은 나와 너의 단절로 확대 재생산된다. 나와 너는 서로 맞잡을 수도 화해할 수도 없다. 나는 너의 존재를 뚫고 네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너는 나에게로 건너올 수 없다. 처음부터 가능한 소통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저마다의 고립감을 속으로 부풀릴 수 있을 뿐. 이 지독한 고독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단절된 끈을 이어 붙여 처음의 연속성을 회복해야 한다. 금기의 벽을 허물어 죽음과 화해해야 하고, 삶만큼이나 죽음과도 친해져야 한다. 삶 속에서 죽음을 실현해야 하고, 절제 속에 낭비를 꽃피워야 한다. 존재를 차고 넘치는 잉여와 과도한 여분 속에, 퇴폐와 소진과 무의미 속에, 순간적인 발작과 찰나적인 광기 속에 내던져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부재하는 구원을 꿈꿀 수 있고, 그 불가능한 기획을 실현할 수 있다.
문정화는 몸 전체가 물 속에 반쯤 잠긴 채 부유하는 것 같은 일련의 나체를 보여준다. 화면은 검은 물과 살색의 나체가 대비되는 형식을 띠고 있는데, 여기서 나체가 잠겨 있는 검은 물은 무의식을, 심연을, 그리고 우주를 상징하고 암시한다. 마치 칠흑같이 캄캄한 우주 속을 저 홀로 떠도는 미아처럼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하다. 대개 나체는 태아처럼 몸 안쪽으로 잔뜩 웅크리고 있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세상과 맞서 대면하는 것과 비교되는 자기 방어적인 자세를 암시한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유래한 자궁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고, 존재를 기쁨도 슬픔도 없는 처음의 암흑(처음의 순수, 처음의 무)으로 되돌리고 싶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상(빛)에 내던져진 존재를 다시 대지(어둠)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상대적으로 더 개인적이고 내밀한 그림들로써, 마치 심연과도 같은 우주나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을 부유하는 자화상 형식의 그림들로써 서로 소통할 수도 화합할 수도 없는 현대인의 고독한 초상을 그려낸 것이다.

What your plan B? 문정화는 근작에서 당신의 제 2안은 무엇이냐고 물어온다. 여기서 안은 다른 말로 계획이나 욕망으로 고쳐 읽을 수 있다. 즉 당신은 무엇을 계획하고 욕망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욕망하는 인간이란 정의는 프로이드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인간이 여전히 이성적인 동물(데카르트의 근대적 인간)인 것은 맞지만, 그 존재조건으로서 이보다 먼저 욕망이 전제되어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을 욕망하는 동물로 정의한 것은 실상 결여와 결핍을 인간의 존재조건으로 본 것이다. 우리는 없는 것을 욕망하지, 있는 것을 욕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있는 것을 욕망한다는 것 자체는 모순이다. 해서, 무엇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인간존재가 부재하는 것, 불가능한 것, 비가시적인 것, 인식할 수 없는 것과 강하게 연동돼 있음을 말해주며, 이는 예술의 존재이유와도 관련이 깊다. 한편으로 이처럼 부재하는 것을 욕망한다는 것은 욕망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기획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고 욕망하기를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다. 해서, 모든 욕망은 기본적으로 허구적 욕망이다. 작은 욕망은 더 큰 욕망을 불러들이기 위한 구실이나 계기로서 작용할 뿐, 욕망 자체는 끝내 채워지지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자크 라캉은 오브제 a라고 부른다. 여기서 오브제란 우리가 객관화하고 사물화하는 유형무형의 대상 일체를 일컬으며, a는 그 대상에 붙어있는 개념으로 환원할 수도 인식할 수도 없는 부분을 말한다. 모든 사물에는 이처럼 그 자체로는 결코 알 수 없는(쥘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욕망이다. 이로써 욕망은 인간의 부조리한 존재조건을 드러낸다. 문정화는 이처럼 욕망을 매개로 하여 인간의 부조리한 존재조건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가하면 제도는 욕망의 부재하는(알맹이 없는) 기표와 관련이 깊다. 허구적 이데올로기(신이나 이상국가처럼 순수한 관념의 형태로나 존재하는 것들)를 내세워 사람들을 현혹하고 강제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특히 바로 이 지점(그 자체 사회학적인 맥락과 강하게 연동된)을 향한다. 이를테면 그림에서의 흑인소년이나 어린아이들의 책망하거나 최소한 무표정한 듯한 눈빛은 이처럼 제도가 제안한 욕망의 프로젝트를 의심하는 것 같다. 그 이면에서 문명화의 기획이나 범 세계주의의 기획을 의심하는 후기식민주의에 대한 자의식이 묻어난다.
이와 함께 아마도 각종 대중매체들로부터 차용하고 각색했었을 그림 속 인물들은 친근하기보다는 낯설고 이질적이고 생경한 느낌을 준다. 무슨 외국인 같고 외계인 같고 이방인 같고 타자(타자는 단순히 어떤 사람임을 넘어 일종의 무의식적 자아를, 낯설고 이질적이고 생경한 존재론적 조건을, 그리고 금기시된 관습이 투사된 표상 일체를 아우른다) 같다. 나아가 생명을 결여한 기계 생명체나 마네킹 같기도 하다. 이질감은 특히 인공눈과 같은 눈의 표정에 의해 더 강조되는데, 심지어 작가는 유사 큐빅이나 비즈와 같은 오브제를 차용해 인공적인 느낌을 강화하기조차 한다.
이로써 문정화는 도박중독에 빠진 사람들을 통해 현대인의 공허한 일상을 그려내고, 칠흑 같은 물속을 부유하는 나체를 통해 고립된 섬처럼 서로 소통할 수 없는 현대인의 고독을 드러내며, 마침내 근작에서는 흡사 마네킹을 연상시키리만치 낯설고 이질적이고 생경한 타자와 대면케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