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응은 자신의 주제를 <사운드몽타주, 음예공간풍경>으로 명명한다. 이 주제를 해석하는 것으로써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요소나 성질을 이해할 수 있을 듯싶다.

주지하다시피 스틸 이미지를 짜깁기하는 방법을 콜라주로, 그리고 동영상 이미지를 짜깁기(합성?)하는 방법을 몽타주로 구별한다. 그리고 몽타주는 러시아 출신의 전위적인 영화감독 에이젠슈타인에 의해 전형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테면 영화에는 일관된 서사가 있기 마련이며, 그 서사는 대개 상식의 궤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친근한 서사의 허리를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잘라 그 서사와는 다른 전혀 엉뚱한 서사를 중간에 집어넣어 편집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상적인 내러티브에다 전쟁과 같은 돌발적인 상황을 짜깁기하는 식이다. 이로 인해 관객은 예상 가능한 방식이나 편안하거나 나아가 안일하기 조차한 영화읽기를 방해 받는다. 그 이면에는 아방가르드의 소외효과 내지는 소격효과의 논리가 작동한다. 이를테면 상식과 합리, 관습과 통념의 더께에 가려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는 것으로 진단하는 한편, 친숙한 것을 낯설게 함으로써 그 상식의 더께를 깨는 것이다. 이렇게 통념이 깨어진 지점으로부터 사태의 본질이, 핵심이 드러나 보인다. 일상의 더께가 아닌 일상의 속살과 대면케 함으로써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동요하게 하고, 잠든 의식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예술을 통해서 사람들을 계몽할 수 있다는 소위 계몽주의의 엘리티시즘이 독단주의로 의심받게 되면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찾아낸 새로운 방법이다. 사태의 본질을 일방적으로 주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몫으로 돌려놓고 있다는 점에서 낯설게 하기는 독단주의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어떻게 몽타주하는가. 사운드몽타주라는 말에 예시되고 있듯 작가는 소리를 몽타주한다. 여기에 동원되는 음원으로는 여러 종류의 라디오 채널(2개, 5개, 12개의 채널 등등)과 작가가 일상 속에서 직접 채집한 소리들이다. 라디오 채널은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것인 만큼 동시대 보통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풍경을 엿볼 수(엿들을 수) 있게 하며, 무엇보다도 향수를 자극하는(사람냄새 나는) 올드 미디어란 점이 매력이다. 이와 함께 시각정보(이를테면 TV와 같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암시적이란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시각정보가 직접적이고 전면적이라면 소리정보는 간접적이고 부분적이다. 해서, 그 빈 부분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은 상상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예술은 암시력과 관련이 깊고, 덜 재현적일 수록 그 만큼 암시를 위한 공간은 더 많이 확보된다. 소통미학의 관건이 바로 이런 암시력의 조율(관객의 상상력을 어떻게 자극하는지, 해서 사실상 관객을 해석의 주체로써 어떻게 얼마만큼 끌어들이는지 여부)과 연동돼 있으며, 적어도 외관상 가장 덜 재현적인(그 만큼 추상적인) 음악이 예로부터 진정한 예술로 받아들여졌던 저간의 사정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매력에도 불구하고 라디오는 여전히 일방통행식의 매체이며 비민주적 매체의 한계에 묶여있다. 참여와 간섭과 개입의 여지가 별로 없는, 여론을 호도하는 사회적 기계이며 제도적 장치인 것이다(때론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내보낸다고 해서 이러한 성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작가는 이 사회적 기계며 제도적 장치를 사적인 차원으로 전유하고, 나아가 관객으로 하여금 전유하게 해준다. 그 속에 스피커가 내장된 사운드박스를 설치하고, 그 각각의 박스에 전선으로 연결된 일종의 소리제어장치를 통해 관객이 직접 라디오의 음원을 조작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각각 5개(때로 그 수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2개가 되기도 하고 12개로 늘어나기도 한다)에 해당하는 라디오 채널을 동시다발적으로 조작해 소리를 합성하게 했는데, 이 상황은 그대로 오케스트라에 비유된다. 말하자면 각 라디오 채널은 개별 악기 연주자에, 그리고 관객은 이 개별 연주를 합주로 이끌어내는 지휘자에 비유된다. 이로써 관객은 일방통행식의 라디오 채널을 쌍방통행식의 합주로 전이시키며, 사회적 매체를 악기로 변질시켜 일종의 낯설게 하기를 실천(혹은 추체험)하는 한편, 소리를 매질(질료)로 한 놀이 즉 일종의 소리놀이를 놀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실시간 음에다 일상 속에서 작가가 직접 채집한 음원을 더해 관객이 이를 임의로 혼성할 수 있게 한, 그 자체를 일종의 즉흥 연주의 형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이처럼 관객이 직접 조작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흡사 악기를 직접 연주해야 만이 소리가 나는 것처럼) 것에 더해 관객이 사운드박스에 접근하면 그 박스에 장착된 센서에 의해 음원이 작동하게 하는 식으로 관객참여 형 작업을 유도해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 라디오 음에 더해 일상 속에서 채집한 음원을 동원한다. 총 3개의 음원 중 2개는 각각 1호선 전철과 중앙선 전철에서,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서울 역 대합실 광장에서 채집한 것이다. 그 소리의 내용을 보면 전철 안에서 걸인이 구걸하면서 들고 다니는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하모니카 연주소리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취객의 통화소리가 전철 문이 여닫히는 소리 속에 파묻힌다. 그리고 대합실 광장에서는 대꾸를 해보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없어 혼잣말이 되고 마는 술 취한 노숙자의 독백이 대합실의 안내방송과 뒤섞인다. (일상의) 소리들은 하나같이 슬프고 아프다. 삶의 경계 바깥으로 이미 내몰렸거나 머잖아 내몰릴 사람들이 내지르는 이 소리들은 돌아오는 메아리 없이 저 홀로 내는 소리여서 그 만큼 더 아프고 더 슬프다. 이제는 전설이 돼버린 DJ의 소개와 함께 올드 미디어인 라디오에서 송출되는 흘러간 팝송(한물간 사람들의 동류의식을 자극하고 위무하는 음악?), 교도소 출소 경력 운운하며 험상궂은 분위기로 몰고 가기 일쑤였던 경우에 비해 보면 오히려 지나칠 만큼의 저자세와 무기력이 어떤 알 수 없는 분노(동정심 없는 사회를 향한 것이기보다는 곧잘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지곤 하는)마저 불러일으키는 구슬프기만 한(그 이면에 희극적 신파가 묻어나는) 하모니카 소리, 반응이 없으리란 걸 뻔히 알면서도 부재하는 누군가를 향해 끊임없이 주절거리는(존재확인에 대한 강박증?) 노숙자의 소리는 한 시대를 흘러가는 너와 나의 소리이며 우리 모두의 소리이다. 작가의 채집음은 이처럼 동시대를 관통하는 일상의 단면(혹은 이면)을 발라내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일상 속에서 채집한 음들, 이를테면 일상음, 채집음, 우연음, 자연음의 존재는 존 케이지에 의해서 그 전형화된 형식이 알려진 바 있으며, 그 이면에는 선 사상이 놓여져 있다. 케이지가 이해하는 선 사상은 일체의 인위적인 과정과 그 산물을 배제하는 것과 함께 자연스런 존재의 양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로써 고도의 인위의 산물인 전통적인 음악의 격식을 깨트려 현대음악의 새 장을 여는 것이었다(주지하다시피 전통적인 음악은 화성학으로써 그 이면에는 수학이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계기로써 일상음과 함께 여러 유형의 소리를 질료로 한 보이스 퍼포먼스(특히 플룩서스 그룹에 의해 그 다양한 형식실험이 꾀해진)를 예시해주고 있는데, 그 이면에 깔린 정신세계가 그대로 작가의 작업과도 통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를테면 가공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소리, 거의 소리의 원형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지점을 겨냥하고 있는데, 이는 또한 가공되지 않은 일상 자체(일상의 속살)를 겨냥한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와도 통하는 것이다. 낯설게 하기가 일상을 더 잘 보게 하기 위한 것인 것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소리 작업 역시 일상의 질감(그 자체 삶의 질감이며 존재의 질감이기도 한)을 더 잘 감촉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날 것의 인상은 작가가 채집해 들려주는 소리는 물론이거니와 이를 디스플레이해 보여주는 시지각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작가가 소리를 실어보내기 위해 도입하고 있는 오브제들, 이를테면 스피커를 내장한 박스나, 이를 떠받치고 있는 무슨 폐기된 고철 같은 지지대하며, 더욱이 공공연하게 노출된 전선다발 등에서 느껴지는 인상은 요샛말로 샤프하거나 쿨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모든 날 것들, 다듬어지지 않은 것들, 길들여지지 않은 것들이 그런 것처럼 이 오브제들은 지나치게 일상적인 소리와 함께 일상 자체로써 어필된다. 폐기된 것들, 상실된 것들, 한물간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과 강하게 연동된 향수를 자극하고 불러일으킨다. 이와 함께 작가의 작업은 그 설치된 정경을 보면 무슨 거대한 회로도를 연상시키는데, 이는 물론 조형물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고, 어떤 식으로든 소리의 음질에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부수장치로 기능하지만, 그 상징적 의미를 소리와 소리, 사람과 사람 간의 소통을 위한 망이나 회로로 확대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 속에 존재하는 유형무형의 망들, 소통을 위한 망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음예공간풍경은 창호 문을 통해 한차례 걸러진 은근한 빛에서 동양의 감성을 본 다니자끼 준이치로의 책 <음예 공간 예찬>에서 차용해온 것으로써, 작가의 작업에서는 이것이 사각의 사운드박스에 감도는 은근한 푸른 색조로서 나타난다. 여기서 푸른 색조는 어스름한 새벽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것으로서, 그 자체가 명상의 분위기로 유도하는 한편, 존재가 채 가공되기 이전의 날 것 그대로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시간, 존재가 어떤 미몽의 상태에 잠겨져 있는 시간대를 향한다. 언어나 말로 치자면 말이 말로써 막 형상화되기 직전에 여전히 침묵에 잠겨 있는 어떤 상태를 암시한다고나 할까. 이로써 작가는 일상적 리얼리티와 함께 명상의 계기를 하나의 결로써 조율해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 오브제들 자체는 일종의 악기들이랄 수 있다. 작가는 말하자면 일종의 자기 식의 악기를 만드는 것인데, 이때 그 음원으로는 여러 유형의 라디오 채널과 작가가 직접 채집한 일상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음원들을 연주하는 일종의 라디오 피아노나, 라디오 기타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때로 이 어설픈 악기는 다른 악기(예컨대 바이올린 같은)와의 합주형식을 통해 선보이기도 하는데, 이때 두 음원은 서로 부딪쳐 충돌하면서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의외로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예기치 못한 (소리) 경험에로 유도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일종의 라디오사운드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머리에 무슨 헬멧 같은 것을 쓰고 자신이 직접 제작한 라디오 기타를 연주하기도 한다. 그 형색이 디지털 노매드(질 들뢰즈가 고도로 디지털화의 과정이 진척된 사회 속의 유목전사로 정의한)와 비교되는 일명 라디오 노매드를 보는 것 같고, 그 자체가 오래된 것들, 사람의 향기가 묻어나는 것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에 대한 낭만주의적 예찬을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