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들어가는 작품은 89년 초에 작업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돌을 얇게 만들어 인체나 풍경을 비추는 기법은 그가 처음이었다. 중간에 브론즈로 구상 조각을 해오는 와중에도 그 가능성은 남아있고, 그 매력은 여전히 변치 않고 있다. 깨지지 않을 정도의 두께의 감을 잡으면서, 작가가 구상한 이미지를 캔버스에 그림 그리듯이 자유롭게 새기는 것은 돌을 다루는 고도의 기술과 감각을 전제로 한다. 반짝 아이디어(?)가 스치는 순간의 영감으로 끝나지 않고, 강한 리얼리티를 가지고 현실에 구현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예술가의 쉬지 않는 손이다. 아이디어 자체가 작업과정에서 나오고, 끝없이 작업 중인 자에게만 아이디어가 생산물로 구현될 수 있다. 예술가는 몽상가와 노동자로서의 면모를 가지는 것이다. 박헌열은 작업량도 많고 그 산물 또한 정교하지만, 최초의 아이디어와 계획을 그대로 베껴내는 스타일은 아니다. 특히 석조같이 물질 덩어리와 싸워야 하는 작업에서도 시작과 끝이 달라지는 일이 빈번하다는 것은 다소 의외이다.
그래서 돌 작품의 경우 모형도 거의 없는 편이다. 그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작품이 바뀌는 것을 즐긴다고 한다. 작가는 앞으로 전개되는 시간에 대한 호기심에 빠져 들어가며, 돌이나 흙 한 덩어리를 만지면서 ‘이놈이 뭐가 될 까’를 스스로 궁금해 한다고 말한다. 고된 노동의 과정으로 보일법도 한 석조 작업에서조차 재료와 대화 하면서, 즉흥적인 발상까지 아우른다. 손이 빠르기 때문에 아이디어를 빠르게 옮길 수 있다. 특히 구상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조각은 정확성이 필수이다. 인체란 민감한 표준이어서, 추상에 비해 직감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의 작업들은 풍경 및 인체와 빛의 만남을 보여준다. 2008년 작 [축복받은 땅] 시리즈는 마치 세상을 비추는 등잔대 같은 형태 안에 나무, 제단 또는 신전 같은 건축이 있는 것으로, 고전주의 풍경화처럼 작품의 구성요소들이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자연스러운 원근감을 창출한다. 관객의 시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의 돌 두께는 가장 얇아지면서 배후의 빛을 투영한다.

[풍경] 시리즈에서는 부조를 이루는 판 옆에 누드가 배치되어 있고, 빛이 배어나는 공간에서는 천사들이 날아다닌다. 누드, 나무, 아치형 구조, 산, 해, 천사 같은 요소들이 응집된 공간 안에서 오밀조밀하게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다. 작품 [여인과 나무]에서는 유선형 프레임 안에 촛불 같이 놓여 진 전경의 나무와 빛에 투영된 풍경이 중첩된다. 그것은 마치 씨앗 속에 자리 잡은 떡잎 같은 강밀 한 소우주를 구성한다. 대리석 조각이지만, 두상이나 인체가 작품의 전면에 나오는 [여인] 시리즈나 [색시공시색](2008)은 2007년까지 집중했던 브론즈 작업의 흔적이 남아있는 과도적 스타일이다. [여인] 시리즈는 짐승 머리 쓴 다양한 표정의 여자들을 보여주는데, 작은 눈과 납작한 코가 영락없는 동양 여자로, 목 뒤에서 빛이 은은하게 발산된다. 대리석 작품인 [색시공시색]은 빛나는 배경을 뒤로하고 토끼 머리를 머리에 인 소녀가 틀 밖으로 걸어 나오는 듯하다.
빡빡 민머리 위에 무엇인가 굴레처럼 얹고 있는 작품의 형태는 작품 제목과 더불어 불교적인 메시지를 던져준다. 2007년에 발표한 [색시공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시리즈는 명상적인 제목과는 달리, 합체되거나 분열하는 괴기스러운 인체들이다. 앞뒤로 얼굴과 가슴이 있는 여자, 앞은 서고 뒤는 앉아 있으며 목과 다리만 따로 있는 여자들, 몸 3개가 합체된 여자 등의 형태가 그것이다. 대지 위에 굳건히 서있는 나무 같은 기념비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기보다는, 예측할 수 없는 변이의 와중에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것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다는 메시지,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영원한 실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다는 것을 예시한다. 머리에 돌을 이고 있는 소녀나 배가 축 처진 달마 대사를 머리에 얹은 소녀의 모습은 희극적인 방식으로 화두를 던진다. 그러나 가시가 훑어버린 너덜너덜한 팔을 가진 가시관을 쓴 소녀나, 외투에 파묻듯 목을 가슴에 깊숙이 파묻는 남자는 상처받고 소외된 현대인의 비극적 면모이다.
2007년까지의 브론즈 작업과 2008년의 대리석 작업은 인체나 풍경을 통하여 관객과 이야기 하고자 한다. 인간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구체적인 서사와 관련이 있다. 2007년의 [색시공시색] 시리즈는 불교적 메시지를, 천사 등이 등장하는 2008년의 대리석 작품들은 기독교적 모티브가 남아있다. 박헌열은 인간의 경험이나 지식보다 더 큰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작품에 영적인 것을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그는 ‘인간은 지구 속에 처박혀서 우주의 넓이를 모른다. 그러나 설사 지구가 먼지 같은 존재일지라도 인간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은 대단하다. 인간이 주체가 된 것이 내 작품이다’고 말한다. 그는 작가 노트에서도 ‘인간은 우주의 순리에 따른 법칙과 별개로 이성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 한다’고 쓴다. 그것은 박헌열이 동서양의 종교를 아우르는 초월적인 입장을 가지면서도, 휴머니즘과 물질적 구체성을 중시하는 이유이다. 90년대 초와 요즘의 대리석 작업에서 빛이 투영은 명상적이면서도 종교적인 분위기를 고양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인물 상 위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종교적 도상에 있어 후광의 위상을 가지고 있으며, 풍경 배후의 그것은 따스한 빛만이 가득한 낙원을 떠오르게 한다. 단단한 외곽으로 둘러쳐진 보호받는 소우주를 가득 채우는 빛은 진리와 사랑의 상징으로 보여 지기에 충분하다. 빛은 보편성과 초월성의 상징이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서 빛의 은유와 빛의 형이상학이 기독교적으로 수용되는 첫 출발점으로 창세기를 지목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신은 빛이고, 인간은 그 빛에 의해 불붙은 등불이다. 빛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은 진리를 드러내는 최상위의 단계이다. 빛이 가지는 우주적 보편성은 근대에도 이어진다. 계몽(enlightenment)과 함께 빛은 행해져야할 대상의 영역 쪽으로 비춰진다. 진리는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근대과학의 혁명에 의해 진리의 자연적인 발산이라는 근거는 와해되었지만, 이성의 빛이라는 은유는 지속되었다. 만물을 지배하는 매체로서의 빛은 근대를 거치면서 목표가 정해져서 주사되는 조명의 광선으로 변화한다. 박헌열의 대리석 조각 또한 빛의 연출에 의한 산물이다. 그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예술작품처럼 국부적인 조명(illuination) 효과에 의해 시각적 액센트가 부여된다. 그러나 조각에 관철된 그의 조명의 효과는 명암의 극적인 대조가 아니라 은은한 간접성을 띄며, 시각성 뿐 아니라 촉각적인 면도 강조한다.
출전 | 미술과 비평 2008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