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인 것을 주관화한 그것은, 완전히 주관적인 것도 아니고 완전히 객관적인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난해하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이 화면에 던져놓은 파편적 기호들에 완전한 의미를 부여하여, 한 점의 의혹도 없이 관객들에게 전달되길 기대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난해함이란 이태량의 작품을 읽고 판단하는 올바른 기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오브제도 그렇고 문장을 포함한 기호들도 그렇고, 자체 완결성이 부족한 것은 마치 나머지 반쪽의 상징적 징표를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떤 상징이든 온전한 하나의 의미로 완성될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열어놓음이 극단화 될 때 의미는 무(無)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와 필연 사이에 놓인 인간의 영원한 과제일 것이다. 이태량은 이러한 역설을 피해 아예 ‘무의미한 것을 표현 한다’고 하며, 단지 자신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의 기회를 제공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의미의 무한한 확산은 무의미와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작가는 어느 정도 응집 될 수 있는 기호를 활용한다.
가령 이태량은 크로스 마크 같은 강력한 도상을 작품에 많이 사용한다. 여러 각도와 형태로 변주된 크로스 마크는 십자가, 사방위, 금지, 부정, 결합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는 무엇인가를 현실에서 낚아채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며, 관객 또한 그의 작품을 그렇게 해석해주기를 원한다. 극사실주의처럼 즉각적으로 망막에 수용되거나 개념미술처럼 설명적인 것--현대 미술의 논리와 역사에 의해 맥락이 결정되어졌다는 의미에서--피하려고 한다. 시각적인 볼거리, 깔끔한 완결미, 개념적 투명함 등은 이태량의 작품과 거리가 멀다. 작품을 더욱 비워놓고 싶은데, 자꾸 자신이 설명하려하는 듯해서 고민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통에의 욕구까지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자기 것을 유지하면서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그림’이다. 이러한 방식의 소통은 기호들의 정합적인 활용을 통한 설명이 아니라, 기호들의 파편적 사용을 통해 벌어진 간극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작가노트)이다. 말과 사물을 임의적으로 사용함으로서 생겨난 양자의 거리는 침묵으로 귀결되며, 이 미로와도 같은 침묵의 공간에 얼마만큼의 두께와 주름을 부여하느냐가 관건이다.

같은 대상이라 할지라도, 그려 넣은 것과 붙여놓은 것은 차이가 있다. 그려진 것, 곧 재현된 것은 말을 하는 것이지만, 오브제처럼 제시된 것은 침묵에 가까운 것이다. 전자가 재현의 체계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면, 후자는 우연히 난입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태량의 작품에서 난데없이 화면에 들어온 상자, 앞치마, 봉지 등의 오브제는 다소간 변형이 되어있다. 2003년에 열린 3회 개인전에서는 쓰레기 더미에서 주어온 오브제만으로 전시를 꾸리기도 했지만, 최근 작품들은 다른 기호들이나 회화적 처리에 의해 조율된 상태이다. 조형적 질서의 맥락에 끼워져 있기는 하지만, 사물로서의 이질적 속성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브제들은 처음부터 손상되어 있는 것이 대다수이다. 작가는 근사한 사물은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한다. 뭔가 부족하고 모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발털이개, 쥐틀, 가로등 갓 같은 것은 그 자체로만 보아서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모호하다. 어떤 시기에 보편적으로 소비되었던 상품도 급격히 짧아진 생산과 소비의 주기로 인해 수수께끼 같은 사물로 변모하는 일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손상되거나 불완전한 오브제를 붙이고 그 위에 낙서 같은 느슨한 행위를 첨가한다. 낙서는 손상된 기호라는 점에서 오브제와 같은 계열에 놓인다. 거리에서 주어왔든, 떠도는 상념으로부터 선택된 것이든, 이태량의 작품 속 오브제와 기호는 피차간에 불완전한 부분들로 만난다. 그러나 그것들이 대중 앞에 공개되는 작품 인한, 화해까지는 못 바란다 할지라도 완전히 와해될 수는 없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크로스 마크는 의미나 형태면에서 단절된 것을 이어주는 매개로 나타나는 듯하다. 가령 작품 [레이아웃]에서 화면 오른쪽의 선들 앞에 놓인 크로스 마크는 화면 왼쪽의 피사체를 향해 있는 카메라를 닮은 검은 상자와 눈의 위치를 연결시켜준다. 작품 [조작적 정의-1]에서 펼쳐진 빈 상자는 크로스 형태가 분리된 검정 면들을 연결해 준다. 어떤 작품에서는 부러진 다리 사이에 크로스가 배치되어 있기도 하다. 그는 기독교도이기는 하지만, 정통 종교의 상징으로 크로스 마크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작가의 무의식에 깊이 침전되어 있는 도상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래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강력한 검은 형상이 마치 무의식같이 보이는 작품 [동일한 기억]처럼 말이다. 향기는 무의식과 몸에 직접 호소한다. 침향이 들어있던 노랑 주머니가 붙은 작품 [향기로운 추억]은 잔향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듯하다. 이러한 사소한 단서를 통해서라도 관객의 작품 읽기와 또 다른 의미의 생산이 가능해진다. 크로스 형태는 그의 작품에서 다양한 의미를 낳는 다산적 기호가 된다. 작품 [합당한 구속]은 소의 꼬뚜레와 바코드를 결합시켜 놓고, 구멍 뚫린 십자 형태를 옆에 배치했다. 현대 도시인에게는 생경한 물건인 꼬뚜레, 익숙한 것이지만 사물의 가치를 서열화하는 냉랭한 바코드 등은 둘 다 부자유의 느낌을 주는 것으로, 양자의 결합은 제목에 내포된 대로 구속의 의미한다. 이러한 부정적 의미와 손상된 크로스 형태는 조응한다. 작품 [옷들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못났구나]에서 X 마크로 변형된 크로스는 날카롭게 베어진 형태와 더불어 부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작품 [검정과 오렌지로 메워진 면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검은 발목, 꼴라주 된 붕대, 붉은 점 등의 조합이 치명상을 예시하며, 더불어 그려진 십자가의 의미를 전통적 상징에 근접시킨다.

마치 수수께끼 풀이와도 같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 이태량의 작품은 역설적인 의미에서 부재와 간극으로 가득하다. 의미는 비워져 있음으로서 미지의 것이 되었고, 사물은 명확히 지시되지 않는다. 이러한 괴리감은 언어도 대상도 불투명한 것으로 만듦으로서 보편적 소통을 어렵게 하지만, 또 다른 소통을 위한 출발점을 마련한다. 그것은 사회의 지배적 가치로 통용되는 상식과 도그마를 피해서 다른 것을 찾아내고 싶은 예술가들의 오랜 전략이었다. 그것은 통용되는 의미의 연쇄 고리를 따라가면서 단순히 현실을 동어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잠재력 있고 가능한 의미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의미의 완전한 와해에 이르는 위험을 감내해야만 하는 것으로, 예술이 현실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죽음에 가까운 상실을 견뎌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차원을 가진다.
출전 | 미술과 비평 2008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