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2-5.15 |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전(前)세기 전환기의 문화적 변모를 극적으로 표출한 클림트의 작품은 금세기 전환기를 살고 있는 대중들에게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100여점이 넘게 나온 클림트 전은 유화작품과 드로잉은 물론이고, 분리파 활동기의 작품과 포스터 및 자료(모형, 설치물), 그리고 총체예술을 추구했던 장식 미술가이기도 한 작품 경향에 걸 맞는 다양한 응용 작품과 상품까지 두루 갖춘 대규모 전시이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화려하며 자극적이기까지 한 그의 작품을 눈으로 뿐 아니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부대 자료를 함께 제시함으로서 전시의 완성도를 높였다. 당시에 유럽의 변방이었으며, 격동기를 맞았던 오스트리아에서는 미술 외에도 심리학, 철학, 음악, 미술사 등의 분야에서 현대 문화사에 굵은 획을 그은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 클림트는 이 문화적 스펙트럼의 시각적 등가물을 제시한 화가였다. 그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세기말 오스트리아 제국의 문화적 풍광을 그렇게 생생하게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가들은 당시의 오스트리아 제국은 정치적, 민족적, 계급적 문제가 중층적으로 복합되어 있었고, 화해할 수 없는 모순들이 문화적 활기를 낳았다고 평가한다. 프랭크 휘트포드는 클림트에 대한 저작에서 유럽에서 국가와 국민이 새로이 동의어가 된 시기에 오스트리아는 다민족 제국이었다고 지적한다. 황제에 대한 제국 군대의 충성서약조차 11개 국어로 낭송될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강력한 통합의 문화정책이 취해졌고, 이례적으로 민족성보다는 보편성을 추구하는 현대미술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보편성이나 현대성에 대한 비전은 분열된 집단들만큼이나 제각각이었고, 이 비전이 문화적 생산물로 가시화될 때마다 많은 논란이 뒤따랐다. 일찌감치 촉망받기 시작한 클림트의 작품은 이러한 논란의 중심에 서곤 하였다. 칼 쇼르스케는 [세기말 비엔나]에서 오스트리아에서 자유주의적 중산계급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시기는 서구의 다른 곳보다 더 늦었지만, 심각한 위기에 빠져든 것은 더 빨랐다고 지적한다. 입헌 정부의 승리와 후퇴의 전 과정은 시간상으로 유럽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할 만큼 압축적으로 진행되었다.

문화 변방에서의 현대성의 문제는 클림트의 생애주기와 거의 일치하는 이 기간에 극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과학이나 실증성을 내세웠던 중산층의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완전한 것도 확고한 것도 아니었지만, 곧 젊은 반항아들의 반자유주의 전선이라 할 만 한 집단적 반발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1890년대에는 오이디푸스적 반란이 시작되어, ‘지식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식의 계몽주의에 대한 저항적 흐름이 감지되었다. 클림트가 초창기에 수행했던 대학 벽화 등 많은 공공 프로젝트들은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것을 추구하는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우아하긴 하지만 어둡고 몽롱하며 애매모호하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적대자들은 클림트의 공공벽화들은 진보가 아닌, 퇴행으로 간주했다. 클림트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이론화한 아버지 세대와의 갈등은 전면화 되었으며, 클림트가 주축이 되었던 ‘분리파’는 아버지들의 고전적인 사실주의 전통을 거부하고, 현대성을 추구했다. ‘현대적modern’이라는 단어의 본래적인 의미인 고전고대classical antiquity와의 대비를 시사했지만, 새로운 세대들 또한 고전적인 전통으로부터 시작했다.





이들에게 고대는 기성세대처럼 사실주의에 방점이 찍히기 보다는, 니이체의 (고대의)비극 사상에 나오는 바와 같은 디오니소스적인 활기에 근접하고자 했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고대에 심취했던 프로이트의 취향처럼, 잃어버린 무의식과 심층 심리, 본능의 원천으로 간주된 것이다. 이 전시의 포스터 룸에 전시된 제1회 분리파 포스터에는 아테네의 청년들을 구하기 위해 야수 미노타우루스를 죽인 테세우스의 신화가 등장한다. 무대의 장면을 관객에게 매개하는 캐릭터는 클림트의 작품에서 많이 나타나는 구성이다. 그림은 현실의 단편이기 보다는 무대 같은 것이고 상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평면적으로 묘사된 고대적인 연극 무대는 역사주의나 사실주의의 대상이 아닌, 마르지 않는 원천이 될 미지의 세계로 제시된다. 분리파의 기관지 [성스러운 봄]은 국가가 위험에 빠졌을 때 젊은이를 희생양으로 바치던 로마 제례에서 따온 것이다. 고대는 잔존하는 골동품적인 유산이 아니라, ‘이교도적’ 신화로 해석된 것이다.

‘분리파Secession’라는 이름은 정치적 이의를 표명하는 이례적 형식, 즉 ‘성스러운 산에서 평민의 분리’라는 라틴어 어구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클림트는 빈번히 고전적 주제를 택하였고, 황금시대와의 연관성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새로운 출발점으로서의 고대는, 재개발 되는 도심의 적지 않은 기념비적 건물들을 채우는데 적절한 예술적 이념이 될 수 있었다. 이 전시에서 모형으로 제작되어 있는 분리파 회관은 고대와의 관계를 잘 나타낸다. 분리파 회관을 지은 건축가 요제프 올브리히는 ‘예술 애호가에게 조용하고 우아한 피신 장소를 제공해줄 예술의 신전을 세우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과거는 호출되었지만, 귀족을 모방하는 부르주아의 절충주의이고 잡다한 스타일 대신에, ‘신성하고 정숙하고 희고 빛나는 벽’이 자리 잡았다. 회관 현관 위에는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분리파의 목표가 적혀있다. 여기에는 대대적인 문화적 쇄신, 그리고 삶으로부터 도피하여 휴식하고자 하는, 다소 상충되어 보이는 두 가지 목표가 내포되어 있다.

클림트 그룹의 이념은 ‘종합예술Gesamtkunstwerk’로 집약된다. 분리파는 현대적인 분리(분업)와 분리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의 작품 원천은 부르주아의 절충주의만큼이나 다양했지만, 전체적으로 조율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다양한 원천들의 조합은 악취미나 자기만족이 아닌, 실험의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종합예술의 비전이 집약된 것은 7개의 회화로 구성된 베토벤 프리즈로서, 이 전시에서는 벨베데레 미술관의 리플리카가 설치되어 있다. 대중적 물의를 일으켰던 대학 벽화 [법학]에서 죄인을 삼킬 듯한 거대한 연체동물이 흐물거리는 질처럼 표현된 바 있는데, 베토벤 프리즈 중의 한 작품인 [적대적 힘]에는 거대한 고릴라가 등장하여, 백년 넘은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생생한 공감을 자아낸다. 베토벤 프리즈는 건축, 조각, 음악, 장식미술 등이 총 망라된 종합예술이었지만, 동시에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협곡으로 우회하게 되는 물마루가 되었다. 종합예술의 이념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매우 이상주의적인 것이었고, 순수 예술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현대 사회에서 화가들은 자기 보호 장치를 필요로 했다. 초창기 공공미술을 포함한 대중을 위한 예술은 역사상에 잘 알려진 일련의 좌절을 겪으면서 예술가들을 위한 예술, 또는 귀족 및 상층 부르주아 고객을 위한 예술이 되었던 것이다.





분리파 전당에서 개최된 14회 분리파 전시회의 주제는 베토벤이었는데, 민주주의와 영웅적 울림을 가진 베토벤은 예술을 통한 구원이라는 메시지로 번안되었다. 이 작품은 음악이나 연극적 장르의 특징인 시간성을 활용한다. 작품은 관람객의 동선을 따라 전개된다. 프랭크 휘트포드는 이 작품이 베토벤을 일개 작곡가가 아니라, 신으로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예술가를 신으로, 또는 미와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성스러운 의식을 주관하는 일종의 세속적 사제로 보는 사고방식은 세기말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유럽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빈에서도 미의 숭배가 종교의 자리를 대신했다는 것이다. 도상들은 고난을 헤치고 사랑의 성취로 절정을 맞는데, 합일은 보편적 이념이 성취되는 넓은 세계라기보다, 생의 출발과 끝의 무대인 원초적인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듯하다. 예술의 유토피아는 현실에서의 어떤 상실의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논란에 휘말린 공공 벽화에 비해 예술가들에 의한 예술의 신전은 종교에 버금가는 도피와 위안을 준다. 클림트는 역경을 이겨내는 예술의 힘을 보여주는 마지막 프리즈에서 ‘행복의 염원은 시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구절을 담는다.

[베토벤] 프리즈는 현대적 삶에서의 피난처라는 예술의 이상을 최대한 선언한다. 칼 쇼르스케는 베토벤 프리즈에 나오는 몽상가의 유토피아, 그 삶의 역사적 구체성이 완전히 배제된 유토피아는 그것 자체가 자궁의 포로, 후퇴를 통한 성취라고 보면서, 여기에서 프로메테우스적 전통에 대한 오르페우스적 전복은 완성되었다고 평한다. 예술은 점차 위협적이 되어가는 현실로부터의 도피처가 되는 것이다. 전시의 회화부문의 카탈로그에 실린 모토는 ‘시대에 그 시대의 예술을’과는 아주 다른 유미주의자의 글에서 따온 것--‘예술은 그 자체 외에 다른 것을 절대로 표현하지 않는다’(오스카 와일드)--이다. 전시회가 표방하는 것은 ‘예술가공동체’, 창작하고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이상적인 공동체라고 클림트는 말했다. 이것은 전체 ‘예술 민중kunstvolk’을 창출하여 오스트리아를 쇄신하겠다고 출발한 초기 분리파와 대비되는 것으로, 객관적으로도 한 번도 넓은 적이 없었던 그들의 사회적 소통 범위가 예술가-장식가와 고객들이라는 그룹으로 더 좁혀진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환에서, 리글 같은 동시대 예술사가들에 의해 재평가된 추상과 장식은 보다 중심적인 것이 된다. 이 전시의 다양한 공예 작품과 부대적으로 제시된 보석과 패션 등 많은 응용 및 파생 상품에서 드러나듯이, 클림트의 작품은 장식에 의해 훼손되지 않는다. 클림트의 잠재적 가능성을 발견한 이들은 화가보다는 디자이너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저변은 넓어 보인다. 장식은 이제 종합적 성격을 띠는 그룹의 전시회나 공공미술이 아니라, 초상화나 풍경화에서 길을 찾게 된다. 비잔틴 미술이나 일본 미술에 나타나는 패턴이 절충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이국적인 무늬가 아니라, 성이나 생의 상징을 담고 있다. 인간의 삶은 자연과 같이 순환적 주기에 실려 있으며, 이는 때로는 운명론적 굴레로 보이지만, 동양의 윤회사상처럼 긍정적인 비전을 내포한다. 클림트의 초상화의 주요 주인공들인 여성은 신화적 장치를 빌은 영원한 여성으로 제시된다. 이 전시의 대표적인 작품 [유디트 I]은 특정한 모델을 연상시키는 자연주의적 묘사와 장식성이 어우러진다. 화면에서 액자로 까지 뻗어나가는 황금빛 장식은 자연인을 수수께끼에 휩싸인 영원한 여성으로 고양, 또는 고착된다.

장식과 초상은 서로를 강화시키면서 관능성과 탐미주의의 결정체를 이룬다. 남성을 파멸시키는 운명의 여인의 대표적 도상이 된 유디트는 짧은 붓질로 칠해진 반투명한 피부는 금속성 결정체를 결합되어 있다. 따뜻한 살의 느낌과 무기질적인 냉정함은 그의 초상화에서 많이 나타나는 조합이다. 유디트에 전형화 된 요부femme fatale 이미지는 바야흐로 발흥하는 여성운동에 대응하는 남성의 심리적 불안을 예시한다. 이러한 그림들은 전통의 굴레에서 벗어난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지는지 보여준다. 요부상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이중적 감정을 투사한다. 자유로운 그녀는 매혹적이지만, 자신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프랭크 휘트포드는 유디트에 마력을 부여한 것은 그 주제의 현대성이라고 지적한다. 그녀는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빈에서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 부류였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남성이 죄를 전가하고 책임을 저버리는 과정에서 순응적이고 단순한 여성이 탐욕스러운 약탈자가 되는 악몽이 생겨났다. 19세기 말 유럽의 예술과 문학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면서도 무자비한 여성과 신화적 괴물의 현대판으로 들끓었다.

전시에 나온 [아담과 이브]도 전도된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나타낸다. 남성을 유혹하여 파멸시키는 여성인 팜므파탈은 이브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화면 한가운데서 빛을 발하는 유백색 몸을 전면에 드러내고 있는 이브는 아담을 그림자 같은 존재로 제쳐버리며, 도발적으로 관객을 응시한다. 욕망이 넘치는 고삐 풀린 여성 앞에서 남성은 한없이 약해진다. 그러나 또 다른 방에 모여 있는 클림트의 은밀한 드로잉들은 위협적인 여성을 극복하는 또 다른 방식으로 주목된다. 칼 쇼르스케는 클림트의 후기 드로잉들이 아테나, 니케, 히게이아 혹은 복수의 여신들, 자웅동체적인 남근 같은 여성들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강조한다. 클림트는 여성공포증을 극복한 것 같다. 여성은 이제 더 이상 욕구 불만 때문에 위협적으로 도사리고 있지 않다. 이 드로잉들에서 여성의 관능성은 상징주의의 우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성적대상으로서의 여성은 클림트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였다.

전시장의 방 하나에는 반쯤 옷을 벗은 여성이 긴 의자나 침대에 누워 유혹하듯 관람자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주는 드로잉들로 가득하다. 프랭크 휘트포트에 의하면 이러한 드로잉에서 얼굴을 대략 스케치되고 용모는 일반화된 반면, 국부는 강조되고 관람자의 시선을 끌기위해 음부와 치모가 과장된다. 단축법, 절단, 배경생략, 이 모두는 성기에 주의를 끌기 위해서이다. 드로잉 속의 여성은 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익명이며 대부분 수동적이다. 그는 1910년대의 뛰어난 여성 누드들은 관객에게 엿보기에 참여하도록 권함으로서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워진다고 결론 내린다. 또 하나의 방을 차지하는 풍경화 코너는 은밀하고 끈적거리는 에로티즘을 벗어나, 클림트가 매해 여름휴가를 떠났던 풍광 좋은 호수 지역들이다. [카머 성 공원의 길]을 비롯한 클림트의 풍경화는 인상파의 야외 사생, 즉 밝은 색채와 경쾌한 붓 터치 등이 살아있지만, 개방적이기 보다는 상징적 우주의 자족성을 지향한다. 그 점에서 클림트의 풍경화는 초상화의 연장일 수 있다.

밖으로 뚫린 창의 역할을 하는 풍경화의 전형적인 구도를 벗어나는 정사각형 모양의 화면 구도는 인공적인 느낌을 강조한다. 지평선이 높은 화면은 거의 평면적으로 보일만큼 앞으로 당겨있다. 그의 풍경화는 광학적인 효과보다는 색채나 형태 같은 조형적 장치를 이용하여, 끝없이 변화하고 덧없는 풍경을 낙원으로 영속화시킨다. 클림트는 만년까지 별다른 외부의 영향 없이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변화는 감지된다. 고풍스러운 상징주의는 모더니즘과 겹쳐진다. 죽기 1년 전에 그린 작품 [아기]는 순환하는 생애 주기를 그린 알레고리 회화와 관련되어 등장하곤 하던 아기가 단독의 주제로 나타난다. 정사학형의 틀과 내부의 이등변 삼각형의 구도가 가지는 인공적인 틀, 그리고 인물과 무관하게 화면 밖으로 쏟아져 내리는 색채의 패턴들이 보여주는 자율성은 이미 추상회화로 접어든 주류 모더니즘의 경향에 조응한다. 클림트 만년의 그림은 새로운 시대의 산파 역할을 맡았던 비엔나 거장의 마지막 단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자의 암살사건으로 시작된 세계 대전은 20세기의 불안과 공포의 극적인 표현을 요구하였는데, 이 역할은 분리파의 후배 세대인 코코슈카나 쉴레에게 넘겨진다.

출전 | 미술평단 2009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