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작품은 아니지만, 한 점에 몇 십억 하는 단가의 미술품이 거래된다는 것은 우리 경제의 또 다른 바로미터이다. 몇 년 전 부터 광풍이 분 미술시장의 열기는 경제 한파로 주춤해지긴 했지만, 대학을 중심으로 공전해왔던 소아병적 미술계에 상당한 활기를 부여했다. 우리는 손쉽게 상업주의를 비판하지만, 시장은 다수의 익명적 생산자와 소비자가 참여하는 자발적인 교환의 연결망으로, 적절히 가동만 된다면 상당히 효율적이고 진보적인 체계이다. 타일러 코웬은 [상업문화 예찬]에서 시장과 예술을 반대의 극에 놓는 비관주의자에 맞서서, 시장의 기업과 생산적인 부가 문화 생산의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좋은 의미든 아니든, 독창성이나 실험성 같은 현대 예술의 주요한 범주는 자본주의에서 번성했다. 현대사회는 시장이라는 교환의 연결망을 통해 예술 작품의 수요와 공급을 결정한다. 그러나 잘 발달한 시장이 문화의 다양성을 뒷받침한다는 낙관주의자의 예견과 달리, 한국에서의 미술 붐은 예술 소비자들에게 다양하고 폭넓은 선택권을 주었는지 의문이다.

미술시장의 활황이 가속도가 붙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옥션에서 상한가를 친 상당수의 작품들이 회화였고, 더불어 젊은 화가들이 주목받았다. 특히 극사실주의 계열의 시장 우위는 모든 것을 계측하고, 그것을 액자라는 시각적 금고에 안치시키려는 중산층의 취미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다. 평소에는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어떤 대상이 단지 잘 복제되었기에 열광한다는 이유로, 예술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옛 철학자의 염려가 떠오르지 않는 바도 아니다. 어쨌든 시장과 화실은 어느 때 보다도 가까워졌으며, 미학이나 비평 같은 거추장스러운 장치를 거치지 않고도 잘 돌아갔다. 작품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는 신천지에 곧 다다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상업주의는 어떤 희생을 먹고 자라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쏠림 현상이 미술시장의 붐에도 작동했던 것이다. 물론 각광받았던 소수의 젊은 작가들이 미술계의 상업화를 불러들인 것은 아니다. 어떤 특정 스타일의 작품이 잘 팔린다고 작가로서의 자기 변혁은 뒤로한 채, 브랜드화 된 물건 생산에 매몰되는 것이 시장이 띄워준 몇몇 젊은 화가들만의 문제겠는가.

잠재된 투기자본이 미술 시장으로 유입되면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유통 시스템에 미술도 걸려 든 것뿐이다. 누구나 시장과는 어떤 형태로든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뾰족한 대안도 없이 시장적 현상에 대해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도 쓸데없는 일이다. 시장은 미술의 후원체계를 분산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유명 미술대학과 소수화랑, 컬렉터에 의해 전적으로 굴러왔던 것과는 다른 차원을 연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하다. 미술이 제대로 된 일정 규모의 시장을 형성한다는 것은 다수의 게이머가 동참하는 보편적인 장으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미술계 다수 구성원들의 어떤 식으로든 연결 되는 흥미진진한 게임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얼굴 없는 시장만 독주해왔고, 어려운 시기가 되자 썰물처럼 빠지는 형국이 되었다. ‘국민화가’의 대열에 끼는 몇몇 강력한 우량 상품의 존재가 미술의 경제적 기반이 탄탄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더 악화된 면도 있다. 흐름을 잘 탄 소수만이 혜택을 입은 미술시장의 열기는 사회적인 호혜성과 공공적인 가치를 담보하고 있는 각급 문예기금의 삭감이라는 역풍마저 야기한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미술가들에게 장기적으로 필요한 것은 위정자들의 변덕이나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고무줄처럼 변하는 공공기금의 수혜 보다는, 견실한 민간 시장의 토대이다. 미술시장 역시 이윤이라는 시장의 보편적 원리를 따르지만, 다른 시장과의 차이는 이윤 뿐 아니라, 구성원들 다수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플라톤적인 이상적 언어 공동체까지는 아니더라도, 비판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담론의 장을 비대해진 국내의 미술 시장이 껴안고 갔는가 하는 문제는 남아있다. 명품을 생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닌 현대미술에서, 담론의 장이 부재할 때, 보다 우월한 가치 선점을 위한 무한 경쟁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가치의 경쟁은 의미의 문제이기 보다는 돈 놓고 돈 먹는 식이 되어버린다. 막말로, 오늘 45억에 팔린 작품은 그만큼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공공적 소통의 차원이 없어도 내일 50억에 되팔 수 있는 기대심리를 낳으며, 이런 투기 심리가 시장의 열기를 추동해 온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이해하는데 높은 에너지가 투여되곤 하는 미학적 혁신 보다는, 한 눈에 화가의 기술과 노고를 알아볼 수 있는 극사실풍 회화들의 시장 우위, 그리고 ‘얼마짜리다’라는 단 한마디 말로 결론이 나는 시장 지향적 담론은 상당히 현실 타협적이며 폭력적이다.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사회에서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거나 시장으로부터의 퇴출은 사회와의 격리에 해당하는 대재앙일 수 있다. 예술가들에게만 세속을 초탈한 그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은 잔인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물적 가치는 물론, 이전에는 비물질적인 것이라고 간주되어 왔던 모호한 것들도 정교하게 계측하고 분류하여 가격을 매기고 유통시키려 한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사물의 체계]에서 사물들을 조직하고 계열화하며 그것들에 의미를 주는 구조를 탐구한 바 있다. 이를 통해 예술작품을 포함한 모든 현실세계의 사물들은 의미작용 체계를 구성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기호의 문화적 체계가 갖는 논리와 일관성이다. 이러한 기호의 그물망에 걸려들어야만 가치의 위계가 코드화 될 수 있다. 기호가 지배하는 시장 역시 거대한 동질적인 공간을 가정함으로서 그 위에 차이를 설정한다. 기호가 질서화, 체계화 된 것이 바로 사회이고 시장이다. 체계화의 극점에 ‘명품’이 존재하며, 그래야 갈망의 대상이 된다. 미술작품 역시 상품으로 소비되기 위해서는 모호한 실체를 벗어버리고, 기호로 변모해야 한다. 상품으로서의 미술은 기호의 체계적인 지위를 향한 전환을 말한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작품의 실재성은 사라지고, 대신 체계화된 기호의 끝없는 과정이 부재하는 자리를 메워 나간다. 이미 우리 주변의 모든 상품들이 기호형태를 취하고 있다. 기호란 실체가 아니라 체계를 이루는 일련의 것들 속에 존재한다. 현대사회는 과도하게 동질적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끝없이 차이를 추구한다. 촘촘한 체계화의 그물망을 통해 가치의 위계질서를 정하려는 노력이 미술시장에서도 작동된다. 해당 전문가들은 광고 마케팅 기법을 도입한 작품 띄우기부터, 보다 근본적으로는 미술작품 자체에 대한 욕망을 유발하고 퍼뜨리는 신화의 창조에 몰두한다. 그러나 예술에서 가치의 위계질서를 누가 선포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남아있다. 자본주의적 체계화는 사회적 생산력을 점차로 늘리는 와중에 극소수에게 승리의 산물을 몰아주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수의 미술작품은 미술문화 전체의 위상 정립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것은 다른 소비대상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거리를 복원하는 역할을 한다. 미술시장은 보다 많은 ‘개미’ 컬렉터들이 참여하는 투명한 거래 체계와 더불어 소수 재력가들에 의한 ‘어둠의 경로’가 존재한다. 전자가 강해지면 자생력 있는 건강한 미술문화를 낳지만, 후자가 강해지면 미술은 돈세탁, 탈세, 부정 축재, 과시적 소비의 수단이 되며, 미술시장은 ‘그들만의 리그’를 위한 우아한 알리바이에 불과하게 된다. 시장으로 상징되는 체계화가 필요악이라면, 유일한 시장이 아닌 다양한 시장이 필요하다. 미술시장이 거간꾼과 ‘큰 손’들만의 무대일 때, ‘해외 시장에서 얼마에 팔렸으니 얼마짜리 작가이다’라는 식의 주최 측의 자작극이 펼쳐지고, 국내외의 어떤 미학적 비평적 검증도 없이 ‘조용하게 작품 가격만 센 작가’가 생겨나는 것이다. 미학적, 비평적 검증을 동반하는 소통(유통)만이, 언제고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미술 시장의 붐을 온전하게 전체 미술계의 몫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출전 | 미술 세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