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배경 전 | 1.6-1.24 | 가인 갤러리
이선영(미술평론가)
쌈지 스페이스의 연례 기획전 Emerging과 가인 갤러리의 이배경전에 나온 작품들의 보이지 않는 매개 고리는 몸이다. 한 전시에서도 상호 독립적인 작품들, 그리고 한 작가에게서 나온 작품들이지만 제각각인 형식들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는 예술작품의 원천이자 목적지로서 몸이 가지는 위상을 알려준다. 이들에게서 몸은 구조와 생성이라는 양 방향으로 접근된다. 이머징 전의 김과 현씨는 바나나 맛 우유 시리즈를 통해 일상적인 섭생의 양식과 권력 간의 유착을, 이철현은 거대한 로봇 형상을 통해 몸에 투사된 인간(통상 남성으로 간주된)의 환타지를 보여준다. 김과 현, 그리고 이철현은 사회의 상징적 구조가 재생산하는 몸을 다룬다. 한편 박은영은 영상 작품 [라 메르]에서 삶과 죽음, 시간들이 뒤섞인 모성적 공간을 예시한다. [라 메르]의 공간이 모호하고 원초적이라면, 이배경은 몸이 가지는 복합적인 감각을 기술의 분절된 단위를 절묘하게 조합하여 모사한다.
김과 현씨, 이철현의 설치 작품이 가지는 구조적 속성은 사회문화인 구조를 통해 재생산되는 몸의 현실과 이상을 표현한다면, 영상이 작품의 주요한 요소인 박은영과 이배경은 시간을 적극 끌어들이면서, 발생과 소멸, 변환의 와중에 있는 몸을 표현한다. 특히 이배경의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는 몸에 의해 시청각 이미지가 변화하는, 몸으로 보고 듣는 작품이다. 이들의 작품에서 몸은 예술적 언어의 표현 대상 중의 하나가 아니다. 작품과 몸은 보다 내재적이며 이점이 주목할 만하다. 몸은 언어가 재현해야할 타자였지만, 실상 몸은 언어의 물질적 기반을 이루며, 의미가 생성되는 장소이다. 언어는 ‘육체를 원초적 지시대상으로 하는 상징체계가 되려고, 즉 물질적 실체가 있는 언어로 거듭나려고’(피터 부룩스)한다.
김과 현씨는 ‘항아리, 또는 수류탄 모양 같기도 한’ 바나나 맛 우유 통을 소재로 하여, 얼마 전에 지나간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식민지풍의 문화를 팝 적인 언어로 표현한다. 그들은 한국인의 대다수가 우유를 소화시키기 힘든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식습관으로 길들여져야만 했던 상황을, 바나나 맛 우유의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정치경제학을 자세히 조사함으로서 재구성한다. 그들의 작품은 이러한 문화비평적 탐구의 결과물로, 그 진실과 허구가 드러나는 증거물들이다. 프라모델처럼 조형화한 거대한 헬리콥터의 몸체는 바나나 맛 우유 통처럼 생겼는데, 그것은 어디선가부터 실어 와서 대량으로 살포되는 공격적 시스템을 예시한다. 작가들이 발굴해낸 70-80년대의 디자인들은 지금 보면 너무 허술해서 금 새 그 실체가 드러난다.
바나나 맛 우유는 적의 공습에 대비해 아이들을 책상 밑으로 도피시키던 위협적인 냉전 문화와도 교차된다. 일련의 섭식 습관을 주입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패턴을 인위적으로 교정하려는 방식은 현재진행형의 웃지 못 할 비극이다. 시장에서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듯한 21세기의 한국 역시, 여전히 먹으면 죽을지 살지 모르는 미제 육가공품의 살포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품에서 몸은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에 의해 조절되고 있다. 그들은 ‘국민 음료수’로 자리 잡은 달콤한 바나나 맛 우유에 내포된 씁쓸한 진실을 캐낸다. 그것은 제국의 낙농업을 번성시키기 위한 예비 소비자, 즉 그들의 생산품을 받아들이는데 적절한 몸이 되기 위해 심신양면으로 훈육되어야 했던 몸을 드러낸다. 이들의 작품에서 몸은 일상화된 미시적 권력 기술이 작동되기 위한 장(場) 된다.
이철현이 만든 3미터 크기의 거대한 로봇 [수퍼스타 II]는 인간의 이상 및 환상이 투사되고 복제된 몸체를 구현한다. 마지막 조립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몸체는 두 토막이 나서 그리드로 촘촘히 구획된 공간에 놓여있다. 전시장의 조명이 점멸되면서 야광색소가 칠해진 철 선 구조물은 가상공간 속 로봇의 느낌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가상현실 버전의 로봇에서는 물성이 소거된다. 철선으로 조립된 기념비적 크기의 로봇은 차갑고 추상적인 공간의 산물이다. 여기에서 공간은 육체를 만들고, 육체는 공간화 된다. 재현적 체계의 구성요소인 그리드들은 재현 대상에 따라 더욱 촘촘해질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대상의 존재 양태를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빛이다. 피터 부룩스는 [육체와 예술]에서 시각적 이미지에 의해, 그리고 거기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빛, 숨겨진 것의 드러남, 시선에 의한 고정 등의 이미지에 의해 지식 및 합리성이 표현되어 왔다고 하면서, 정신분석학의 예를 따라 응시가 매우 남근 숭배적임을 강조한다.

기념비적 크기의 로봇은 비유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드러나는 형식에서도 남근 숭배적이다. 불이 켜지면 로봇은 마치 설계도가 3차원으로 구현된 것 같은 양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가상과 현실 사이에 놓인 가장 큰 장애물인 몸을 극복하려는 과학기술의 시도가 연상된다. 인공적으로 새롭게 구축된 몸은 작가의 고된 노동은 물론, 쇠로 이루어진 물질적 질료의 느낌을 삭제하는 것이다. 가상공간이 결국은 재현의 한 방식이듯이, 이철현의 로봇은 재현의 체계로부터 만들어진 산물이다. 이 체계는 누가 재현의 주체이며 객체인가 하는 권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의 작품에서 재현된 몸은 지하 전시실에 로봇과 같은 방식으로 제작된 탱크가 예시하듯, 생존 경쟁을 위한 무기로 생산된다.
바르트는 ‘상징적 장(場)은 오직 하나의 물체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이 물체가 상징적 장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이 물체는 다름 아닌 인간의 육체’라고 말한 바 있다. 박은영의 [라 메르]는 상징적 장과 육체의 궁극적인 일치를 지향한다. 여기에서 상징적 장이란 상징적 약호가 지시하는 장소를 뜻하는데, 그녀의 영상 작품은 바다-어머니-생과 소멸이라는 비유법이 교차하는 다차원적인 표면이 된다. 숲 속을 걸어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작하여 무덤에 도달하는 일련의 장면들은 바다 이미지와 중첩되면서 출렁거린다. 현대 음악에 맞춰 백일몽처럼 흘러가는 화면들은 붉게 물들여지기도 하는데, 이는 생과 사의 연속적이고 가역적인 흐름을 주관하는 피를 연상시키면서 바다, 숲과 더불어 여성적 몸을 연상시킨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이미지 없이 여러 화면이 중첩되어 흘러가는 양상은 원초적 카오스를 내포하며, 이는 모성적 시공간과 연관되는 것이다.
다른 전시실에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은 달나라의 토끼를 연상시키는 화면이 심리 테스트 얼룩처럼 이리저리 변하다가 결국은 그것이 손을 씻는 개수구 장면이라는 것이 드러나는데, 달이라든가 모든 것이 빠져 나가는 구멍 같은 이미지 역시 여성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박은영의 작품에서의 여성성은 이원 대립 항으로 나뉜 명료한 상징주의를 구사한다기보다는, 이질적 타자들을 자기 안에 품으면서 구별 자체를 무화시키는 끝없는 변모의 과정에 있다. 그녀의 작품에서 잔잔하면서도 극적으로 부침하는 것들은 단단한 존재, 또는 색깔이나 사물이기 보다는, ‘이 세계의 어떤 차이화와 일시적인 변조들’(메를로 퐁티)이다.

이배경은 관객의 움직임을 쫒는 기계가 작품의 시청각적 이미지를 결정하는 인터랙티브 미디어를 구사한다. 그의 작품에서 비디오는 관객의 움직임을 감지하여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시시각각 제시한다. 2미터가 넘는 거대한 모뉴먼트 [repeated freedom #2]는 설수도 누울 수도 없는 애매한 공간에서 반복적인 동작을 취하는 무용수들을 담은 3개의 모니터가 박혀 있다. 관객이 작품을 둘러보는 동안, 모니터 사이에 박힌 16개의 스피커에서는 변형된 소리가 흘러나온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공간 속에서 새어나오는 바람 소리 같은 것과 무용수들의 움직이는 소리가 뒤섞인다. 폐소공포증적인 공간에서의 반복과 단절감은 분절화 된 시공간 속에서 프로그래밍 화 된 삶을 사는 현대적 삶을 반영한다. 다소 밋밋하고 전형적인 상황을 실감 있게 전달하는 것은 관객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시청각 이미지이다.
다른 작품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도시풍경이나 심산유곡의 자연 역시,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다른 강도로 전달된다. 관객의 움직임은 한 위치를 점하는 주체에 의해 포착한 상이라는 이미지의 고정성을 벗어나기 위해 작품의 내적 요소로 적극 도입된다.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것은 보는 자와 보여 지는 대상이다. 메를로 퐁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시각은 보는 것에의 참여이고 결속이라고 말한 바 있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에는 이상한 유착이, 양자 간에는 상호간의 삽입과 얽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와의 야생적이고 공감각적인 만남은 매체화 된 환경에 의해 약화되어 간다. 육안은 점차 평면화(코드화) 되어 가기 때문이다. 이배경의 작품은 세계와 만나는 몸의 원초적 감각을, 인간과 더불어 진화하는 기계가 시뮬레이션 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출전 | 아트 인 컬쳐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