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이부인’전은 역사의 책갈피에 묻혀있던 여성들을 불러낸다. 갖가지 무늬와 색상의 천과 한지에 덧입혀진 여성상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희미한 그림자로 존재했던 그녀들을 새롭게 실체화한다. 종종 화면 밖으로까지 튀어나오는 여인들의 자태는 당장이라도 바스락거리는 치맛자락 소리를 낼 듯 생생하다. 작가는 종이라는 매체에서 외유내강의 성질을 읽어내며, 이것을 이 땅에서 살아왔던 여성들의 근성과 연관 시킨다. 시대적으로는 고대 벽화 속의 여성부터 짧은 머리의 자유분방한 소녀, 기하학적 무늬의 패션을 걸친 현대적 여인에까지 이르며, [보자기 부인], [종이부인] 등으로 명명된 보통 여성들부터 기생에서 황후에 이르는 다양한 신분의 여성들이 망라된다. 기생-예술가부터 나혜석 같은 근대 미술가, 그리고 미인도에 나오는 여성처럼 예술과 관련된 이들도 빠지지 않는다. 어느 시대, 어느 신분의 여인이든 간에 쌍꺼풀 없고 복스러운 코에 후덕한 얼굴 라인을 가지는 한국의 원형적 여성상에 가깝다.

여성들은 섬세함과 자유로움, 단아함과 화려함이 공존하며, 넘칠듯하면서도 절제된 모습이다. 배경색과 소품들은 역사 속의 여성들이 맡았던 역할에 따라 조율된다. 적장을 품에 안고 강물로 뛰어든 논개의 바탕화면은 푸른빛이 돌며, 비극적 최후를 맞은 명성황후의 바탕화면은 붉은빛이 돈다. 어떤 생을 살고 어떻게 운명을 마감했든 간에 모두들 시원하고 널찍한 화면에 배치된다. 해방구처럼 보이는 이 고른 판은 자신들을 옭죄었을 가부장적 지배의 일방적인 희생자로서의 여성상에서 비껴나게 한다. 여인들은 모두 자기 앞에 나름대로의 너른 앞마당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억압받아왔기 때문에 해방되어야 하는 세상의 반쪽이 아니라, 이원적 대립체계 자체를 초월한다. 천으로 도포된 너른 공간은 특정한 역사적 구체성을 삭제하거나 보편성으로 승화시키는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여성의 자율적인 공간을 확보하면서 세계를 향해 열린다. 그것은 고립과 유폐가 아니라, 세계로 당당하게 입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전면화하는 것이다.
정종미의 작품은 현대회화에서 금기시되는 장식을 적극 끌어들인다. 한국인에게도 희귀한 것, 이국적인 소재가 된 비단이나 모시는 의상이나 배경화면이 되어 자리 잡는다. 전시부제 속에도 강조된 종이라는 매체는 주름진 천을 화면 위에 재현하는 절묘한 방식이다. 실재와 재현된 것과의 거리를 없애는 이러한 꼴라주 형식은 입체파의 발명품처럼 되어 있지만, 그것은 입체파로부터 출발하는 순수미술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인류의 장식문화의 일부였다. 정종미의 작품에는 의상 뿐 아니라, 추상화된 배경에도 꿰매고 붙이는 등의 노동이 패턴화 된 문양으로 새겨져 있다. 근대에 확립되기 시작한 미술의 자율성은 무엇보다도 장식으로부터의 자율이기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삶 속에 자연스럽게 실행되던 것들에 여성성이 부여되었다. 이항대립의 한 항목으로서의 여성의 입지가 그렇듯이, 그것은 일종의 낙인이었다. 모더니즘의 역사에서 드러나듯, 자율성은 자신들이 내세우듯 중성적인 것이 아니라, 남성적인 것이었다. 자율적 주체, 언어의 확립 등은 모두 원초적 모성으로부터의 분리를 내포한다. 그러나 장식으로부터 출발한 미술의 근본조차도 무시할 수 없었던 터라, 모더니즘 회화의 임무는 ‘장식을 장식에 대항해 사용하는 법을 발견하는 것’(그린버그)이라는 절충안을 유지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장식의 회귀는 단지 다원주의의 한 항목이라기보다는, 모더니즘에 의해 입지가 좁아진 미술을 다시금 삶이라는 맥락에 접속하기 위한 방식이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장식은 자유로운 창작이 아니라, 관례에 따른다. 장식은 관례적이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다. 그는 기호의 현혹적인 매력과 지배로 이루어진 의례적 장식이 현대적인 노동과 이윤의 법칙을 초월한다고 보며, 의례성은 살아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그리고 자연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사회성보다 더 거대한 체계라고 지적한다. 정종미는 작가 노트에서 ‘종이부인을 제단에 모시고 어둠과 그늘 속에서 슬픔과 좌절을 이겨온 모든 여성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경배를 올린다’고 말한다. 종이부인에는 무속 및 관혼상제 같은 의례에 밀접했던 종이꽃(紙花)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역사 속의 종이부인들은 의례 후에 소각된 종이꽃들처럼, 가상의 유희 속에서 실재의 체계를 초월한다.
출전 | 월간미술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