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가 1850년에 출간한 <환영에 대한 소고>에 의하면 꿈의 재현능력은 상상력의 재현능력을 넘어선다. 꿈에 등장하는 사물들 하나하나는 어떤 진리 혹은 본질 혹은 예견을 암시하며, 나아가 논리적인 보편성에 이르기까지 현실을 넘어 현실 그 자체를 드러낸다. 꿈의 재현은 자연의 질서나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 사물 그 자체의 본질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꿈 혹은 악몽을 기록하고 재현하기. 박진호의 작업은 꿈 혹은 악몽을 기록하고 재현한 작업, 일련의 장소특정성 작업, 그리고 근작의 다이달로스 3부작으로 대략 구별해 볼 수 있다. 이 일련의 작업들이 외관상으론 서로 구별돼 보이지만 내부적으론 서로 통하고 있다. 그 분절된 계기들을 이어주는 개념이 꿈, 악몽, 기억, 신화이다. 작가는 특히 꿈 가운데서도 반쯤은 의식적인 꿈이랄 수 있는 백일몽에 주목한다. 이러한 꿈의 축적으로부터 일관된 서사를 재구성해내고, 이렇게 재구성된 서사를 신화라고 본다. 따라서 현대인의 꿈을 추적함으로써 현대적 신화라고 부를만한 현상을 재구성할 수 있게 된다.

작가는 1997년을 기점으로 해서 <붉은 아파트>로 명명된 24개의 단편 비디오 프로젝트를 제작한다. 여기서 악몽이 열어 보이는 비전, 이를테면 악몽을 꿀 때 머릿속에 부유하는 이야기 이미지(서사적 이미지)를 잡아채, 이를 글로써 기록하고, 퍼포먼스(마임)로 재현하고, 영상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다른 작업에서는 입체와 평면에까지 이 형식을 확장시켜 다변화한다. 이 일련의 단편들에서 작가는 자신의 얼터에고(분신)와 대면하는데, 자신의 머리 속을 공간(붉은 아파트)으로 설정하고, 그리고 그 공간 속을 채우는 기억을 서사로 본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 그 자체를 일종의 기억의 저장고로서 서사적 공간인 양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기억은 악몽의 즉물적(직접적) 기록물이면서, 동시에 악몽에 대한 사후적 해석의 소산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악몽은 어느 정도 각색되고 변형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현실인식이 가세함으로써 기억은 악몽을 온전히 복원해내지는 못한다. 작가는 이 기억의 중층구조(혹은 중층현상)를 기억의 흐름이라고 부르는데, 마르셀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기법)을 떠올리게 한다.

일련의 장소특정성 작업들. 작가는 <아비뇽, 시간의 구조>(2001년 비디오 녹화 원본을 제작한 연후에, 2007년 전시를 위해 최종적으로 재편집하고 재구성한), <보안여관 프로젝트>(2006년에서 2007년에 걸쳐 진행한, 철거 예정인 한옥구조의 여관을 대상으로 한), <안테카메라>(2007년 제작한, 철거 예정인 전남도청사를 대상으로 한), 그리고 <아비뇽 더 맨션>(2007년 제작한, 아비뇽의 한 고택을 소재로 한) 등의 일련의 작업들에서 장소특정성 경향을 예시해준다. 특정의 장소가 갖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사적이고 공적인 의미맥락 속에 개입하고 간섭해 그 의미를 강조하거나 변형시키는 것이다.

<아비뇽, 시간의 구조>에서 작가는 철거 직전의 오래된 아파트를 비디오로 기록한다. 이때 모든 문이 제거된 아파트 내부는 거대한 미로처럼 다가온다. 똑같은 구조, 똑같은 통로, 똑같은 방, 똑같은 계단과 더불어 그 공간 속에 살았었을 사람들의 흔적이 중층화되면서 작가는 길을 잃고 만다. 그리고 작가는 이처럼 중첩된 공간의 층위와 포개진 시간의 결을 상하로만 움직이는 화면, 전후로만 움직이는 화면, 그리고 좌우로만 움직이는 화면의 비디오를 병치시켜 보여준다.

그리고 <보안여관 프로젝트>에서 작가는 여관의 허름한 방방을 수색하면서 그 방에 기숙했었을 사람들의 냄새를 맡고 그 정황을 복원하는데, 이때 부재하는 것들의 흔적이 일말의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안테카메라>와 <아비뇽 더 맨션>에서는 건물에다가 일종의 카메라옵스큐라의 환경을 조성한다. 방을 어둡게 한 연후에 작은 틈새를 만들면 그 사이로 빛이 새들어와 외부의 상이 내부 공간에 거꾸로 맺히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이는 마치 과거의 혼령을 되불러온 것 같은 생경하고 낯선 느낌을(안테카메라) 자아내며, 수백 년의 세월이 중첩된 시간의 질감을(아비뇽 더 맨션) 느끼게 한다.

다이달로스 3부작. 근작에서의 다이달로스 연작은 각각 제1부 <달 아래 이카루스>(2008년 전시), 제2부 <투우장의 미노타우루스>(2009년 전시 예정), 그리고 제3부 <다이달로스와 목각 암소>(현재 구상 중) 등 총 3부로 구성돼 있다.

<달 아래 이카루스>에 등장하는 이카루스는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다가 날개가 녹아내려 추락해버린 신화적 캐릭터이다. 이 신화는 인간이 태양으로 상징되는 절대존재를 직면할 수 없음을 암시하며, 눈이 멀거나 훼손된 신화 속 캐릭터는 이러한 절대존재를 대면함으로써 죽음이나 거세를 당한 것을 상징한다. 작가는 이카루스의 비상으로부터 인간에게 내재된 욕망을, 그리고 추락으로부터 그 욕망의 좌절을 본다. 따라서 만약에 이카루스가 지향했던 욕망의 대상이 태양이 아니라 달이었다면 어떠했을까를 가정해본 것이다. 그랬다면 물론 추락하지 않았을 터이고, 이카루스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가정을 통해서나마 비상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불가능한) 욕망을 실현시켜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투우장의 미노타우루스>는 작가가 투우장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작가는 투우장의 황소를 스스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틀(선험적으로 한계 지워진 조건, 혹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소여된 한계상황)에 갇힌 존재, 미궁 속의 반인반수 미노타우루스, 이카루스, 희생양,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현 불가능한 기획(욕망)을 내재화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과 동일시하게 된다. 그리고 투우장을 일종의 미궁으로 보는데, 여기서 미궁은 미로와는 다르다. 즉 미로 속의 길은 그 안에서 길을 잃게 만들지만, 미궁은 궁극적으론 길을 찾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인간이 비록 스스로는 결코 이해할 수도 치유할 수도 없는 선험적 틀(삶이라는 이름의 덫)에 갇혀 있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그 틀을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내기 마련인 것이며, 또한 바로 그 가능성으로부터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를 찾는다.

이 3부작을 관통하는 대전제가 다이달로스다. 다이달로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명장으로서, 그 자신이 만든 라비란트 미궁에 갇히게 되는 인물이다. 미궁에 갇힌 미노타우루스를 죽이려는 테세우스를 도운 죄로 그 자신 또한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미궁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궁으로부터 탈출하는 이야기가 이카루스 신화이다. 여기서 다이달로스가 만든 미궁은 신이 만든 세상을 의미하며, 그 속에 갇힌 미노타우루스는 인간에 비유된다. 이렇듯 다이달로스 신화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와 함께 절대존재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서로 부닥치고 충돌하는 삶의 알레고리인 양 읽힌다. 박진호는 이러한 신화적 사실을 현재의 자장 속으로 불러들여 재구성하는 한편, 이를 통해 그 신화적 사실, 사건, 서사가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임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