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자화상 혹은 예술가의 초상. 조각가 성동훈의 조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돈키호테다. 돈키호테는 작가가 처음으로 제도권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특히 90년대에 그 다양한 버전들이 집중적으로 제작된 바 있다. 그런데 설핏 제도권과 돈키호테가 그 성격상 서로 어울리거나 부합할 것 같지가 않다. 말하자면 돈키호테는 꿈과 몽상, 비현실과 초현실, 시대에 대한 비판과 풍자, 그리고 광기를 상징하는, 이른바 제도에 반하는 대표적인 캐릭터로 알려져 있다. 혹 그동안 제도권의 조각계가 이런 비현실과 광기를 포용할 만큼 유연해졌거나, 아니면 은연중에 이런 성향을 은근히 그리워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외관상으로 이렇듯 비상식적인 캐릭터, 저돌적인 캐릭터, 무식한 캐릭터(나는 무식한 것이 좋다는 작가의 공공연한 언술은 그 자체로서보다는 진정성에 대한 신뢰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를 매개로 고루한 제도권 미술을 돌파하려는 작가의 전략은 먹혀들었으며, 또한 그런 만큼 그 전략이 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현명했다기보다는 본능에 충실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이렇게 돈키호테는 시대를 돌파하는 작가의 자화상으로, 더 나아가 제도와 대면한 모든 예술가의 초상으로서 자리매김 된다. 게다가 그 초상에서 우리는 동질감과 공감을 느끼기까지 하는데, 그 캐릭터가 우리 모두의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비이성과 광기(제도의 정상성과 비교되는 비정상성으로서, 평소에는 억압돼 있는)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원전에서 돈키호테는 말을 타고 등장나지만, 작가의 돈키호테는 말뿐만 아니라 소를 타고 등장하기도 한다. 문명사적으로 말은 유목민족과 관련이 깊고, 소는 농경민족과 관련이 깊다. 정착민에게 소는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가축이며, 더욱이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종교적인 의미마저 부여받고 있다. 이를테면 인도의 힌두교에서 소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지며, 불교의 선종에서는 소가 십우도(十牛圖)의 메타포로 알려져 있다. 소는 말하자면 중생들 저마다의 가슴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본성(진아 眞我)을 상징한다.

십우도는 이처럼 인간의 본성을 소에 빗대어 인간이 자신의 본성(소)을 찾기까지의 과정을 열 단계로 표시한 것으로서, 그 이면에는 모든 신화적 서사가 함축돼 있을 뿐만 아니라(모든 신화는 길 위에서 맞닥트린 상황이나 사건의 우여곡절 끝에 목적을 성취하며, 그 과정을 통해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 서사의 기본 축을 이루고 있다), 요새말로는 로드무비에 해당하는 자기반성적 사유와 그 과정을 상징하고 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 작가의 작업에 등장하는 소 또한 길들여진 가축이 아니라 하나같이 저돌적이며 야생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본성이란 이미 길들여진 것(이미 소여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 길들여야 할 성분(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야생(야성)의 소를 탄 광대(예술가)의 캐릭터로써 비이성의 시대, 광기의 시대를 돌파하며, 나아가 자신의 본성(진아)마저 거머쥔다(혹은 최소한 겨냥한다).

근작에서의 소는 현저하게 유순해진 느낌이고, 더욱이 예뻐지기까지 했다. 자잘한 조화(造花)들로 온몸을 치장한 꽃 소로 변신한 것이다. 그동안 작가의 본성이 유순해진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작가와 소와 돈키호테는 하나다). 폐철이나 고철로 된 골격과 시멘트로 된 몸(살)으로 구조화된 소는, 과장하자면 산업 쓰레기 더미에서 태어난 예전의 소와는 거리가 멀다. 재료가 주는 인상에 의하면, 작가의 작업은 신사실주의와 정크아트에서 시작해서 팝아트와 키치를 덧입기 시작한 것 같다. 향후 어떤 식으로든 이렇듯 거친 재료와 예쁜 재료와의 조우가 작가의 작업이 변화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여기서 재료는 재료 자체이기보다는 방법과 형식과 의식, 이 모두를 아우른다). 그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두상, 의식의 만화경. 사람들의 머리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들을 할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앙드레 말로는 사람들이 저마다 미의식의 소재를 머리에 이고 산다면서, 이것을 상상의 미술관이라고 불렀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사람들의 의식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순차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인 개연성도 없다면서, 이를 의식의 흐름기법으로 풀어내 모더니즘 소설의 효시를 열었다. 온갖 잡다한 의식의 편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편재하는 정신분열증,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하나의 의식만이 곧추 선채 다른 의식들이 하얗게 지워지는 편집증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인간은 의식적인 동물인가 아니면 육체적인 동물인가. 인간의 의식은 정신의 소산인가 아니면 몸의 산물인가. 도대체 이 온갖 이질적이고 낯설고 생경하기조차 한 생각들은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일까. 그 생각들은 나에게 속한 것일까(내적 필연성?), 아니면 바깥에서 주입된 생각이 마침내는 내 머리 속에 내면화된 것일까. 생각은 생각에 대한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불러오며 끝도 없이 이어진다.

좀 무식한 말 같지만, 그것이 궁금하다면 실제로 사람의 머리를 열어 그 속을 들여다보면 된다. 너무 간단한가? 그러나 성동훈은 이 단순무식한(직접적인) 방법을 말 그대로 실행해 보인다. 열고 닫을 수 있는 개폐식 얼굴을 통해 그 머리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보여준다. 압력에 의해 열리고 닫히는 그 얼굴은 관객이 다가서면 이를 감지한 센서가 작동돼 서서히 열린다. 그리고 그 머리 속에는 전쟁(이를테면 팬텀기 모형)과 역사, 폭력과 린치, 그리고 종교 등 동시대의 온갖 사건과 사고들을 가로지르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이고 미학적인 생각의 편린들이 오브제로 만들어져 매달려 있다. 그 두상은 관객의 참여로 인해 비로소 작동한다는 점에서 상호작용성을 실현한 것이며, 또한 머리 속에 매달린 오브제들이 움직인다는 점에서 키네틱아트를 실현한 것이다.

성동훈의 작업 중에는 이처럼 움직이는 조각이 많다. 이때 그 동력원으로는 압력을 조절하기도 하고(유압식), 전기에 의한 모터로 작동하기도 한다(전자식). 기본적으론 작가의 생각을 옮겨놓은 자기반성적 사유(이를테면 자신의 존재를 되묻는 식의 문제의식과 연동된)의 소산이지만, 그 생각들이 대동소이하다는 점에서 이 거대한 두상은 그대로 작가의 자화상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며, 현대인의 자화상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이 두상을 만개한 연꽃이 떠받치고 있다. 작가는 그가 누구든 간에 자신의 생각을 투명하게 관조하는 사람 또는 자신의 생각의 흐름을 느끼는 사람은 모두 부처로 여긴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우리 모두는 말하자면 잠재적으로 현대판 부처이며, 세속의 부처인 것이다.


에로티시즘, 본성의 한 유형으로서의 욕망. 작가의 작업은 본성에 충실한 만큼 직접적이고 솔직한 편이다. 억압된 욕망, 특히 성적 욕망 역시 예외는 아닌데, 이를테면 에로스를 드러내기에 거침이 없다(미하일 바흐친은 카니발을 통한 억압된 욕망의 무분별한 분출에서 건강한 민중성을 발견하는데, 여기서 카니발을 지지하는 동기가 바로 에로스다. 이외에도 에로스를 내적 생명력과 연결시키는 문헌들은 많다). 근작에서는 역삼각형 형상이 회전하는 거대한 조형물로써 에로스를 테마로 다루고 있다. 전작에서 이미 한차례 유사한 작품이 선보인바 있는 이 조형물은 말하자면 일종의 소파를 재현한 것이다. 금속성의 몸체에 가죽으로 된 쿠션으로 안감을 댄 이 조형물은 실제로 그 안에 앉을 수도 있다. 속이 오목하게 파인 그 형태는 흡사 여성의 팬티 같기도 하고, 개화한 꽃봉오리 같기도 하다. 혹자는 그 형태를 보고 수소의 머리를 떠올리기도 한다.

아마도 역삼각형의 구조로부터 자연스레 연상되는 것은 남자와 여자와의 성적 관계(이를테면 수소로 변신한 제우스와 에우로페와의 관계와 같은), 특히 여성의 성적 메타포를 떠올리게 한다. 팬티는 말할 것도 없고, 만개한 꽃잎 형상이 성적 메타포를 암시되는 예는 많다. 조지아 오키페의 꽃 그림과 알란 파커 감독의 영화 <벽>에서의 애니메이션 등에서 보듯이. 여하튼 역삼각형의 구조나 그 속이 파인 오목한 형태, 그리고 특히 부드럽고 우호적인 촉감이 그대로 여성의 자궁을 암시한다.

그 속에 앉는 순간, 그 속에 안기는 순간 내가 유래했던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아니, 되돌아가고 싶다. 모든 성행위는 이런 근원에로의 회귀 욕망과 관련이 깊다. 이렇게 나는 내가 유래했던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되돌려지고, 그곳에서 생명의 근원과 그리고 죽음 자체와 대면한다. 빛보다 먼저 어둠이 존재했듯 죽음은 생명의 근원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 해서, 조르주 바타이유는 에로티시즘을 작은 죽음이라고 일컬었다. 그것이 팬티든 꽃봉오리든 아니면 수소 머리든 여하튼 그 조형물은 이렇듯 존재에 내장된 원초적 생명력과 대면케 한다.

인공정원, 자연과 생태에 대한 관심. 작가는 전시공간에 일종의 인공정원을 조성한다. 그 정원에는 나무를 비롯해 개미와 딱정벌레 그리고 장수하늘소 등 곤충류와 뱀 등의 파충류가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이 조형물들의 중심은 나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거대한 스케일이나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상징적 의미로 인해 작가의 작업을 지지하는 주요 소재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나무는 자연의 대표적인 상징이며, 과실을 맺는 것으로 인해 생산과 생명을 상징한다(당집 나무는 이런 생산과 관련이 깊다). 세계수가 존재의 유래와 근원을 상징하며, 프로이드에게 나무는 남근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들로 인해 작가의 작업에서 나무는 그동안 여러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며 제시된 바 있는데, 근작에서와 같은 철 나무를 비롯해, 일종의 유사 발굴 프로젝트의 형식을 빌린 나무 형태의 구조물 작업, 그리고 2007년 세계도자비엔날레에 출품한 소리나무가 주목된다.

이 가운데 발굴 프로젝트의 나무를 살펴보면, 작가는 땅 속 깊이 나무 형태의 구덩이를 파내고 그 속을 시멘트로 채워 묻는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경과한 연후에 묻힌 조형물을 재차 파내는데, 이는 마치 고대 유물이나 거대 화석을 발굴하는 것 같은 유사고고학의 학적 개념을 적용한 것이다. 이와 함께 나무 조형물로써 대중성을 획득한 경우로는 소리나무를 들 수 있다. 스테인리스스틸 소재로 나무 형태의 조형물을 만든 연후에 그 잔가지마다 2000여개의 도자기 풍경을 만들어 매달아 놓은 것이다. 이때 그 풍경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내는데, 바람과 풍경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낸 소리의 하모니가 가히 환상적이다.

이처럼 성동훈의 작업은 고정된 형태의 조형물을 비롯해서 동력(키네틱아트), 소리(사운드아트), 그리고 빛(라이트아트) 등을 아우른다. 특히 작업 속에 빛을 끌어들인 경우로는 사슴과 산양을 재현한 조형물 작업을 들 수 있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자잘한 유리구슬을 일일이 연결시켜 만든 조형물 속에 조명을 장착한 것인데, 빛을 투과하는 유리구슬 고유의 성질로 인해 은근하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치 사슴 그 자체보다는 사슴의 정령, 혼, 꿈을 보는 것 같은 감동이 그대로 보는 이를 유사 이전의 세계로 데려가고, 태곳적 풍경 속으로 밀어 넣는다. 특히 이 조형물은 꽃 소의 몸체를 장식하고 있는 조화와 함께 작가의 작업이 일정하게 변화(진화?)하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말하자면 하나의 단위구조가 반복 열거되면서 마침내는 단일의 조형물을 일궈내는 식의, 전체와 부분과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과 함께 집합과 해체를 넘나드는 조형 가능성의 또 다른 지점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는 사슴과 산양 외에도 거북이와 코끼리 등 많은 동물들이 등장하는데, 이 동물들이 그때그때 주어진 서사구조에 따라서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우화적이고 풍자적인, 종교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미기능을 수행한다. 이 일련의 작업들, 이를테면 나무와 곤충과 동물들로 나타난 자연소재에 대한 발상이나 그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인공정원에 대한 발상은 이를 지지해주는 실질적인 계기가 있어 보이는데, 그 계기는 아마도 사막 프로젝트를 전후한 시기와 일치하지 않을까 싶다. 최소한 소재가 확장되고 의식이 변화하는 과정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2006년 처음으로 시작된 국제사막프로젝트는 미국의 라스베이거스를 거점으로 주요 사막 몇 군데를 돌며 작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향후 인도사막과 중국 고비사막으로도 진행될 예정에 있다.

자연 소재들에 대한 관심이나 생태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과정으로서의 사막프로젝트에서 일종의 유목주의에 대한 공감이 느껴진다. 작가에게서 유목은 각종 국제 프로젝트를 쫒아 세계 각처를 떠도는 실질적인 이동을 의미하는가 하면, 자연친화적이고 생태적인 삶의 실천논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유의 유목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형식으로든 의식으로든 고정된 틀에 안주하지 않고 온갖 형식과 의식의 층위들을 종횡하는 것이다.

그 일면을 호박 조형물 작업에서 엿볼 수 있다. 호박이 약간 뜬금없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호박은 작가의 작업실 겸 집에서 경작한 것인 만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논리와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돈키호테라는 약간은 황당한 캐릭터가 황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시대를 돌파케 하는 강력한 기제(무기?)가 되었듯이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여하튼 호박과 그 호박을 떠받치고 있는 제기처럼 생긴 발 같은 받침대, 그리고 호박 넝쿨 끝자락에 주렁주렁 열린 사람의 두상, 이들 결합이 얼마간 기이해 보인다. 게다가 이 이상한 혼합체가 기우뚱거리며 회전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작업에서는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이나 예기치 못한 것들의 만남이 예시되고 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것이 작가의 작업에서 결코 낯선 것만은 아니다. 부조화 없이 조화가 있을 수 없고, 낯설음 없이 친근함이 있을 수 없다. 부조화는 조화의 선행원리이며, 친근한 것은 낯선 것으로부터 유래한다. 이렇듯 형식의 유목, 의식의 유목이 성동훈의 작업을 지지하는 실천논리가 되고 있는 만큼 향후 작가의 작업은 또 다른 전망을 향해 열려 있는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