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는 자신을 너무 많이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책이나 곰팡내 나는 고서로 가득한 서재에다가 비유한다. 자신이 읽은 책들을 자신과 동일시한 것이다. 여기서 책은 단순히 책을 의미하기보다는 주체, 자아, 에고, 나라고 부르는 것들을 형성시켜준 유형무형의 존재를 아우른다. 나아가 한 권의 책 속에는 순수하게 저자의 소산만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다른 저자들이 내포돼 있다. 즉, 이질적이고 이종(異種)적이고 이형(異形)적인 저자들이 때로는 문자의 표면 위로 드러나기도 하고, 때로는 행간 속에 숨어 있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권의 책 속에는 단수로서의 저자 대신 복수로서의 저자들이 내재돼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단수로서의 주체이기보다는 복수로서의 주체들로써 구조화돼 있다. 막연하게 나로 호명되는 나는 사실은 무수한 타자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말라르메가 자신을 읽은 책들과 동일시하는 이러한 태도의 이면에는 나를 타자와 동일시하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므로 나는 곧 타자다. 나는 타자들의 집적물, 타자들의 잉여물이다. 그 속에 나는 없다. 나는 그 타자들을 감싸고 있는 생물학적 피막, 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타자들로부터 영향 받고 인용해 온 것들로 이뤄진 집단이고 군대다. 나는 동일자가 아닌 비동일자다. 나는 일관된 전체로써 구조화된 존재라기보다는 온갖 이질적인 차이들로써 구조화돼 있다. 나는 이방인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정신분열과 이중인격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나는 무수한 상황들에 맞닥트리고, 그 상황들로부터 매순간 태어난다. 상황이 곧 나(주체)를 태어나게 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자신을 너무 많이 고쳐 쓴 나머지 너덜너덜해진 양피지에다가 비유한다. 현재 양피지 위의 텍스트는 그 이면에 지워진 텍스트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텍스트마저도 앞으로 쓰일 또 다른 텍스트에 의해 지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양피지 위에 쓰여 있는 텍스트는 잠정적으로만 현재를 보장해줄 수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모든 텍스트는 그 자체 결정적 사실이 아닌 잠정적 현재, 잠정적 사실을 말해줄 수 있을 뿐이다.

나아가 현재 양피지 위에 쓰여 있는 텍스트조차도 사실은 미처 텍스트가 되지 못한 채 흘려보낸 무수한 단상들, 사유의 조각들을 억압한 연후에 취사선택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현재의 텍스트조차 결코 나(주체)를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지워진 텍스트와 더불어 미처 의미화를 얻지 못한 채 억압된 텍스트 역시 의미화 된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왜 나는 어떤 텍스트는 의미화의 표면 위로 끌어올리고, 또 다른 텍스트는 의미화 이전의 잠정적인 상태로 흘려보내는가를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나는 이를 판단하는 결정적인 기준과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아마도 그 근거는 우연히 주어진 소산이거나, 아니면 외부로부터 주어진 상황논리의 소산일 것이다.

이처럼 지워진 텍스트, 쓰여 있는 텍스트, 다시 고쳐 쓴 텍스트, 이 모두가 나에게 속한다. 마찬가지로 의미화 된 텍스트와 미처 의미화를 얻지 못한 잠정적인 텍스트 역시 나에게 속한다. 그러니까 나는 결코 결정적인 현재나, 결정적인 사실의 형태로써 나를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다만 잠정적인 현재, 잠정적인 사실의 형태를 빌려 부분적으로만 나를 표현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 이질적인 지층들이 중첩돼 있는 단층과도 같다. 단층은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결을 숨기고 있으며, 나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그 단층의 바깥으로 드러나 보이는 표면일 뿐이다. 그리고 이때의 표면조차도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보다는, 즉 나에게 속한 것이기보다는 외부로부터 동기 유발된 타협의 소산인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당신이 나로부터 보고 싶어 하거나, 아니면 내가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일 경우가 많은 것이다. 해서, 오히려 진정한 나는 억압돼 있다. 나는 말하자면 억압된 욕망과 무의식이며, 비동일자와 타자들의 책이며, 양피지 위에 쓰여 있는 잠정적인 텍스트인 것이다.

표백된 책- 순수에 대한 강박. 모더니즘 서사.
소위 순수미술은 모더니즘 서사의 발명품이다. 모더니즘은 회화를 회화이게끔 하는 조건 즉 회화의 장르적 특수성이 점, 선, 면, 색채, 안료의 질료적인 성질과 질감, 그리고 평면과 구조와 같은 형식적인 요소라고 본다. 그리고 그 형식주의와 환원주의, 절대주의와 순수주의의 지평으로부터 실제를 연상시키는 재현적인 요소를 배제하는데, 이는 재현적인 요소가 미술의 순수성을 훼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재현이나 서사 같은 의미론적인 요소는 미술보다는 오히려 문학의 본질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회화의 장으로부터 재현적인 성질을 배제하고자 한 모더니즘의 기획은 단지 전통적인 형상미술과 다르달 뿐, 재차 재현적인 회화로 되돌려진다. 재현의 방법이 달라졌다고나 할까. 주지하다시피 세잔은 모든 형상이 최소한의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될 수 있다고 했으며, 수직선과 수평선의 교직에 바탕을 둔 몬드리안의 회화 역시 실제를 추상화한 것이다. 절대주의를 주장한 말레비치의 화면 또한 순수한 형식논리의 산물이기보다는 감각적 실제를 넘어서 있는 절대적이고 관념적인 실재, 실재 자체(추상미술의 이론적 전범으로 간주되는 칸트라면 물 자체라고 했을 것이다)를 겨냥한 것이다. 더불어 칸딘스키의 공감각 이후 이제 우리는 질감이나 색채 같은 형식적인 요소들마저 서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상징이나 은유 같은 비유법 탓에 특정의 색채나 형태를 통해서도 재현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모더니즘의 형식논리는 결국 실제(감각적 실제나 관념적 실제)를 추상화한 것으로서, 상징이나 은유 같은 암시적인 형태를 빌려 실제를 재현하는 태도나 방법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이면에선 형식논리와 재현의 논리, 즉 회화의 자율성을 지향하는 운동성과 어떤 실제를 암시하는 경향성이 길항하고 부침하는 것이다. 이처럼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당위성을 형식적인 요소에서 찾으려 했던 모더니즘의 이상(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이라는 프랭크 스텔라의 말은 이런 모더니즘적 환원주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은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나 실제로는 불가능한 기획이었다. 인간의 의식은 한갓 무의미해 보이는 얼룩에서조차 기어코 의미의 구실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의식의 동물인 관계로 완전한 무의미는 있을 수 없다.


불에 탄 책- 분서갱유, 인문학의 위기.
문명과 문화는 다르다. 그 차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인식한 사람이 뒤르켐(Emile Durkheim)이며, 이를 이론적으로 풀어낸 것이 아노미 현상이다. 일종의 정신적인 공황상태로 부를만한 아노미 현상은 첨단을 내달리는 물질문명에 비해, 이를 따라잡지 못한 채 뒤쳐지는 문화 즉 정신적인 문화 지체 현상을 말한다. <자살론>(1897)으로도 유명한 그는 물질적인 풍요가 낳은 권태와 공허가 자살을 불러온다고 봤는데, 아노미형 자살이 그것이다. 이처럼 기계문명과 전자문명의 시대를 넘어 디지털 문명시대를 구가하는 동시대의 다른 한 축에서는 불가능성, 불확실성, 혼돈, 그리고 불일치 등의 패러다임들이 제시되고 있다. 예컨대 시간과 공간이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라 가변적이며 상대적인 것임을 밝힌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상대성 이론, 지식과 함께 불확실성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고 있음을 밝힌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의 불확정성의 원리, 모든 공리적 방법 속에 그 자체로는 증명 불가능한 고유의 한계가 있음을 밝힌 괴텔(Kurt Godel)의 불완전성 정리, 그리고 카오스(Caos 혼돈), 퍼지(fuss 법석),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 파국) 이론들이 그러하다. 동시대의 인문학에서 이러한 패러다임들은 이미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인문학의 위기 곧 문화의 위기는 문명을 통해서는 돌파할 수가 없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진화를 멈춘 정신이나 퇴보한 감각을 되살리는 일, 몸의 건전한 노동력(몸의 사유, 감각적 사유)을 회복하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가능성과 불확실성, 혼돈과 불일치의 패러다임 자체를 인식론적 한계로서보다는 존재론적 조건으로 보고, 이를 사유를 위한 도구로써 사용하는 일이 과제로 주어진다.


고고학적 발굴과 오래된 미래.
자본주의의 신은 물신(物神)이며, 그 물신을 조망한 것이 상품미학이다. 전통적으로 신과 미학의 고유영역에 속해져 있던 것들, 이를테면 신성한 것들, 비현실적인 것들, 비물질적인 것들, 비가시적인 것들, 정신적인 것들, 존재론적인 것들, 심지어는 내세를 환기시켜주는 것들 일체가 고스란히 상품에 투사되고 물신에 투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갓 상품이 어떻게 이렇듯 정신적인 아우라를 부여받게 되었으며, 또한 이때의 아우라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물질적 광휘로 빛을 발하는 물질이란 어떻게 가능해진 것일까.

자본주의는 상품에 대한 즉각적인 어필과 함께, 일단 어필된 연후에는 상품에 대해 재빠른 노화를 요구한다. 상품에 대한 욕망(미학)이 상품의 효용성(상품 고유의 목적성과 기능성)을 앞질러야 한다. 그래서 멀쩡한 사물들이 고유의 목적성과 기능성을 채 발휘해보지도 못한 채 버려진다. 이렇게 버려진 사물들은 또 다른 욕망, 이를테면 향수를 자극하는 욕망을 덧입고서야 진정한 물신으로 거듭난다. 해서, 골동품 상가와 벼룩시장은 사물들의 무덤이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사물들이 진정한 물신으로 거듭나는 인큐베이터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모던 스타일(기능주의와 미니멀리즘)과 클래식(고전주의 양식)이 결합된 아케이드와 백화점은 이처럼 상품이 물신으로 거듭나기 위한 최적의 환경을 갖춘 현대판 인큐베이터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상품은 이렇듯 기능과 목적성보다는 심미적 대상성을 내재화함으로써 그 진정한 존재의 빛을 발한다. 그런데 이때의 심미적 대상성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과거에 속한 것(향수를 자극하는 것)인 만큼 새로운 것들을 서둘러 과거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것은 제안되는 순간 곧 바로 익숙한 것이 되고, 놀라운 것은 친근한 것이 되고, 충격적인 것은 우호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실험적인 것은 크리쉐로 변질되고, 혁명은 한갓 이데올로기 내지는 프로퍼갠더로 전락하고 만다.

이로부터 소위 오래된 미래라는 역설이 도출된다. 그런데 이 역설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핵심적 사유와 관련이 깊다. 즉 벤야민은 현대인의 의식 속에서 새로운 물건이 재빠르게 낡은 것으로 편입되고 변질된다고 봤는데, 그것은 그의 의식이 물건의 재빠른 노화와 대체를 요구하는 자본주의의 욕망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의식 속에서 미처 도래하지도 않은 미래가 서둘러 과거 속으로 밀어 넣어지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새로운 것들은 향수를 자극하는 심미적 대상으로 변환돼야 하며, 이로써 세계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자극하고 충족시켜주는 물신으로 거듭나야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세계를 거대한 골동품 상가와 벼룩시장으로 재편하고, 아케이드와 백화점으로 뒤덮는다. 미술관 역시 작품(상품)을 물신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백화점의 또 다른 한 유형이라는 사실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이로써 온갖 유혹하는 오브제들로 넘쳐나는 매혹적이고 매력적인,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의 사회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는 것이다.


수중 심리학, 욕망과 무의식.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인간을 욕망의 동물로 정의한다. 인간은 사유하거나 도구를 사용하는, 그리고 유희하는 동물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욕망하는 동물이다. 인간의 욕망은 그 욕망을 제어하려는 제도의 관성에 부닥쳐 실현되지 못한 채 억압되는데, 이렇게 축적된 것이 무의식이다. 해서, 무의식은 그 본성적으로 제도의 기획에 반(反)하며, 제도의 관점에서 볼 때 대개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이며 무의미하다.

이처럼 무의식으로 쟁여진 욕망은 그 실현이 잠정적으로 보류될 뿐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호시탐탐 실현할 기회를 노리는데, 이때 그 출구 역할을 해주는 것이 꿈(초현실주의)이고 환상(보르헤스)이며, 상상력(보들레르)이고 몽상(가스통 바슐라르)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일종의 대리만족 내지는 보상심리에 해당하는 이것들은 동시에 예술의 계기와도 관련이 깊다.

그런가하면 욕망은 욕망이 아닌 양 위장하거나 최소한 해롭지 않은 욕망인 것처럼 제도를 속이거나(대체와 전이), 제도가 감내할 수 있는 정도로 그 강도를 조절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기도 한다. 이런 여타의 계기를 통해서도 실현되지 못한 욕망은 주체가 약해지거나 제도가 방심하는 틈을 노려 자기를 실현하는데, 이것을 프로이드는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고 부른다.

한편으로 좌절된 욕망은 정상적인 언어의 형식을 빌려서는 표상되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언어, 암시적인 언어, 무의식의 언어, 몸의 언어 등등 상징과 기호의 형태로써 표상된다. 자크 라캉(Jacques Marie Emile Lacan)은 이처럼 좌절된 욕망을 표상하게 해주는 비정상적인 언어의 용법을 오브제 a라고 칭한다. 즉 욕망은 대상화할 수 있는 부분(오브제)과, 대상화할 수 없는 부분(오브제 a)이 하나의 결로 중첩돼 있다는 것이다. 오브제 a는 말하자면 그 실현이 억압되고 좌절된 탓에 다만 무의식의 언어로만 표상될 뿐인, 엄밀하게는 표상마저 부재한 탓에 인식할 수조차 없는 욕망의 알 수 없는 실체와 그 성질을 지시한다.

예술가는 이 모든 일련의 사태를 의식적인 층위로 끄집어 올린다. 예술가는 말하자면 욕망과 억압의 관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나아가 욕망을 반사회적이고 반제도적인 실천논리를 위한 의식적인 도구로 사용하는 남다른 능력과 충동을 타고난 존재들이다. 이로써 욕망의 모호한 대상성을 드러내며, 오브제 a 개념의 실체를 엿보게 해준다.

빨간책- 에로티시즘, 포르노그래피, 패티쉬.
이성(異性)의 속옷이나 사진 그리고 소지품에서 성적 충동을 느끼고, 욕망을 충족하려는 심리적 현상이 패티쉬다. 여기서 욕망의 대상은 이성이 아닌 이성이 소지한 물건이며, 그 물건이 이성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성 자체를 인격체로서보다는 무슨 물건처럼 대상화할 때도 역시 패티쉬는 발생한다. 공공연하게는 성을 상품화하는 대중매체 속 이미지나 포르노그래피도 그렇지만. 특히 가학과 피학은 패티쉬와 관련이 깊다. 여하튼 비록 우회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물건을 통한 이러한 욕망의 충족이 가능한 것은 성적 환상(일루전)을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환기력(실제와 이미지의 동일시 현상) 때문이다. 이는 그대로 물신 숭배라는 페티시즘의 보다 확대된 의미범주와 통한다.

물건에 대한 이러한 욕망은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동시대인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 유혹이며, 나아가 그가 살아가는 존재의미이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가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아가 정신적인 가치마저 그 자체 순수한 것이기보다는 언제나 오감이라는 감각 코드를 자극하는 물질적이고 질료적인 차원의 과정을 통해서 온다. 이처럼 물건은 그저 물건이 아니라 그 이상의 욕망이라는 심리적 계기(혹은 존재론적 계기?)와, 그리고 일루전이라는 미학적이고 예술적인 계기와 관련이 깊다.


인식지도 그리기.
황제에 속하는 동물, 향료로 처리하여 방부 보존된 동물, 사육동물, 젖을 빠는 돼지, 인어, 전설상의 동물, 주인 없는 개, 이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광폭한 동물, 셀 수 없는 동물, 낙타털과 같이 미세한 모필로 그려질 수 있는 동물, 물 주전자를 깨트리는 동물, 멀리서 볼 때 파리같이 보이는 동물...

이것은 남미의 환상 리얼리즘 작가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가 고대 중국의 한 백과사전에서 인용한 것을 미셀 푸코(Michel Foucault)가 <말과 사물>(1966)의 서문에서 재인용한 글이다. 정통적인 분류체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벗어난 이 동물 분류법을 읽고 푸코는 바로 그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시대명사의 불가능성을 통감한다. 정통적인 권위를 부여받은 지식체계,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지식체계, 선입견과 편견으로 굳어진 지식체계를 푸코는 그릇된 지식(독사 doxa)이라 일컬으며, 그 틀 바깥에 놓여진 지식체계, 그 틀을 허물고 부수는 역동적이고 가역적인 지식체계를 진정한 지식(에피스테메 Episteme)이라고 부른다. 이로부터 비활성의 지식의 틀을 깨고 이에 의해 억압된 활성의 지식을 회복해야 한다는 푸코의 강변이 들리는 것 같다. 그런가하면 롤랑 바르트 역시 <신화론>(1957)에서 자연스런 사실로 알려진 것이 실상은 특정 주체의 이데올로기(바르트에게 이데올로기란 문화를 자연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의미한다)에 의해 신화화된 것으로 간주하며, 그 더께를 걷어내고 사태 자체를 투시해 볼 것을 주문한다.

이상의 예는 지식체계의 상대성에 대해 말해준다. 더불어 이데올로기의 간여로 인해 상대성이 절대성으로, 문화적 사실이 자연적 사실로 변질되는 가능성과 그 과정에 대해서 말해준다. 이로써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인식지도 그리기라는 실천논리가 당위성을 얻게 된다.

예술은 인문학이다. 이 정의는 감각적 예술의 종말(헤겔)과 형식주의 예술의 종말(아서 단토) 이후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여기서 감각적이고 형식적인 예술의 종말을 인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다른 층위의 문제에 속한다). 예술은 온갖 이질적인 삶의 계기들이 합류되는 깔때기와도 같다. 요샛말로 소위 통섭의 논리를 실천하고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에 정설이 따로 있을 수는 없다. 만약 있다면 운동성의 계기(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인식지도 그리기)를 매개로 해서, 그 정설의 고정된 지점들을 가로지르며 흔들어놓는 것이 예술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