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진 전 | 3.5-4.5 | 성곡 미술관
송명진과 성낙희의 회화에는 각자 자연과 연관된 구상적, 추상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지만, 구상과 추상이 공유하는 재현적(표상적) 체계로부터 경쾌하게 미끄러지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작품에서 구조는 사건에, 존재는 생성에 자리를 내준다. 플라톤으로부터 출발하는 재현적 체계는 이성적인 것(본질)과 감각적인 것(외관)이라는 이분법을 전제하고 있는데, 송명진의 작품 속 환상성과 성낙희의 작품 속 음악성에서 이러한 구분이 와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모종의 풍경이 드러나긴 하지만, 실재와 닮은 도상적인 면이 아니라, 이를 대신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들로 채워진다. 질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시뮬라크르는 원본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복사물과는 달리, 무한히 느슨해진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시뮬라크르는 부조화와 차이 위에서 구성되며, 동일자의 모델이 아니라 타자의 모델을 가진다. 이질적인 계열들을 포함하는 혼란스러운 시뮬라크르는 관찰자가 지배할 수 없는 거대한 차원들, 깊이들, 거리들을 함축한다.
송명진의 작품에서 녹색으로 상징되는 자연은 평면들로 조각나고, 인공도 자연도 아닌 이상한 무대가 펼쳐진다. 그녀의 녹색 풍경에서, 자연은 두툼하고 안정된 물질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하얀 공백으로 나타나는 밑도 끝도 없는 가상적 공간 속에 얇은 평면들로 절개되어 얹혀 있을 뿐이다. 자연은 뿌리 없는 녹색 덮개로 얼기설기 엮여있고, 뜬금없이 뚫려 있는 망net은 또 다른 차원으로의 탈주를 예시한다. 평면 위에서 일어나는 모험과 사건들을 분주하게 이끌어가는 이들은 머리도 손도 없는 인간들이다. 작가가 ‘손가락 인간’으로 칭하는 이들은 신이나 인간이라는 원본으로부터 먼 거리에 있는 퇴락한 존재들이다. 작품 [Ducks Cross]에서 손가락 인간들은 거대한 장난감 오리를 묶고 있는 가느다란 실들에 매달려, 파도치는 듯한 대양을 헤쳐 나간다. 그들은 종이배, 나무배, 뗏목, 작은 오리 인형 등에 타고 있으며, 사납게 솟아오른 물마루와 그 안팎의 공간에서 얽혀있는 실로 엮여서 표층들에서 벌어진 사태의 심각함을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한다.
화면은 떨어져 나가는 녹색 종이들과 드러나는 바탕, 깃털처럼 거대 오리 위에 덮여있는 평면들이 날려 어수선하다. [Ducks Cross]는 낚는 것인지 낚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힘의 분배가 두드러진다. 2차원 또는 3차원적 대상들의 껍데기가 떨어져 나가면서 대상과 배경은 무엇이 먼저랄 것도 없이 자신의 빈 몸뚱이를 드러낸다. 난리 통에 벗겨진 것은 진실이 아니라, 속이 텅 빈 가짜 존재인 플라스틱과 아무런 물질적 지지대를 찾을 수 없는 공백들이다. 작품 [a foolish step 1]에서도 녹색 평면들이 가득 붙은 가상의 벽이 등장한다. 벽이라기보다는 빈 무대의 가림 막 같은 양상이다. 간간이 떨어진 공백을 채우는 것은 녹색 연필 자국들이다. 그것은 이 가상의 막이 그려진 평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무대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쪽을 향해 질주하는 손가락 인간은 가까스로 지탱되고 있는 질서가 붕괴되기 직전의 긴장감을 부여한다. [a foolish step 4]에서도 손가락 인간은 아무 쓸모도 없는 낙하산을 매달고 건축적 구조물에 건성으로 붙은 녹색 평면들을 훑어낸다.

[soft monument] 시리즈는 지상에 솟아있는 기념비에 내재된 남근적 형상과 기념비 기단에 새겨진 글자로 상징되는 로고스중심주의를 연결시킨다. 글자들은 새겨지기 전이거나 감추어지거나 지워지는 중이다. 빈 구멍, 또는 달 아래의 각 기념비들은 자신만의 깊이를 뽐내며 위풍당당하게 서있고자 하지만, 그것을 뒤덮는 것은 새어나오고 접히며, 부풀어 오르는가 하면, 아래로 늘어지거나 분열하는 기이한 표면들이다. 송명진의 작품에서 남근이성주의와 무관하지 않은 재현적 체계를 혼란에 빠뜨리거나 무력화시키는 것은 유동하는 표면의 힘이다. 여기에서 사건과 외관 배후의 본질이나 실체는 빈 공백이거나 영원히 개봉되지 않을 끝없는 수수께끼일 뿐이다. 표면들은 객관적 대상의 표피가 아니라, 낱장으로 오려지고 붙여지고 꿰매지며 흩날리는, 심층의 비밀이 드러나 있지 않은 빈 공백이다.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은 경계지대와 가장자리들이다. 들뢰즈는 사건들은 가장자리에서만 생성하고 증식된다고 말한다. 가시적인 것이나 개념적인 것은 들추어진 표면을 따라서 펼쳐진다. 심층으로 깊이 들어가는 대신,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끝없이 다른 방향으로 이행한다. 송명진의 작품은 깊이 아닌 넓이에서, 배후에 아무것도 없는 표면들 위에서 한계지어지지 않은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
성낙희의 전시는 마치 재즈나 전자음악을 듣는 느낌을 준다. 전시된 16개의 그림이 110x130cm이거나 120x130cm의 캔버스로 되어 있고, 화이트 큐브에서 다양한 높낮이로 배치되어 있어, 설치 방식 자체도 리듬을 탄다. 그림에서 무엇을 읽거나 알아보기 보다는, 거의 정사각형으로 보이는 화면을 채우는 색채의 화음과 형태의 리듬이 두드러진다. 유기체적이며 기하학적인 요소들이 리드미컬하게 결합되고 배열된 그림에서, 제목은 비정형적인 이미지에 다가가는 열쇄가 되어준다. 전시 부제도 ‘Translation’이다. 그러나 언어의 속성이 그러하듯이, 말과 사물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놓여있고, 이 막간의 공간에서 직선과 곡선, 형태와 흔적, 색조들이 뒤섞이며 미지의 것을 생성한다. 작품 [bloom], [rise], [leap] 등에서는 꽃망울이 터지거나 꽃씨가 날아오르거나 물방울이 튀는 듯한 이미지가 점과 선, 색이라는 조형 요소들에 실려 전달된다. 작품 [bond], [whirl], [stream] 등에서는 조형 요소들이 형태나 색채의 밀도 차이에 의해 전진과 후퇴, 상승과 하강, 응집과 흐름 같은 물리적인 운동감을 보여준다.
작품 [escalade]나 [velocity]는 기계나 도시 이미지 같은 인공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 선과 곡선이 함께 어우러져 정교하고 질서 있게 배치되거나 구축되어 있지만 명확한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요컨대 어느 것도 닮지 않은 형상들이다. 작품 [resonance], [cohesion], [source]는 중앙으로부터 발산되는 강력한 색과 선의 흐름이 특징적이다. 다층의 계열로 구분된 밝은 형태로부터 어두운 바탕 면으로 뻗어나가거나 굴절되는 색선들이 출발하는 명확한 지점은 없다. 중심은 보이지 않으며, 시점에 따라 조금씩 이동하는 듯하다. 성낙희의 그림에서 명확히 알아볼 수 있는 도상이나 표상은 이심(異心)적인 원환 속에서 끝없이 되돌아오는 형상들 속에서 전복된다. 이 영겁회귀의 원환들은 발산과 탈중심화를 통해 어떤 효과를 산출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영겁회귀는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카오스를 긍정하는 잠재력을 가진다. 그것은 표상의 정합성을 고유한 혼돈과 방황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영겁회귀가 시뮬라크르들 만을 되돌아오게 한다고 말한다. 시뮬라크르는 다른 모든 차이들에 스스로를 열고, 모든 것을 표면으로 기어오르게 하며, 이동성과 강렬함을 만들어낸다. 강도의 차이는 분절되고 발산되는 계열들로 열린다. 원의 중심에는 차이가 놓여 있으며, 가장자리는 발산하는 계열들이 통과하는 영원한 이동이다. 성낙희의 회화에서 주어진 대상이나 상징적인 코드화로 부터 비상하는 또 다른 매개는 색채이다. 색채의 대조는 화면의 활기와 더불어 비정형적 공간에 지속성을 부여한다. 제목으로 나타나는 개념적 언어는 조형적인 언어로 번역된다. 그러나 양자는 부호적 등가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므로, 변조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들뢰즈의 또 다른 책 [감각의 논리]가 언급하듯, 가치의 관계 대신에 스펙트럼 질서 안에서 접근된 색조들을 나란히 놓음으로서, 변조는 팽창과 수축이라는 이중적 움직임이 된다.
성낙희와 송명진의 작품에서 깊이는 평면들의 결합으로부터 이루어지는 표면적인 깊이이다. 깊이와 달리, 표면은 그 변화무쌍한 양태로 복수성과 다양함을 긍정한다. 그들의 작품은 미학적, 철학적 원리들을 일자 또는 전체와 동일시하는 깊이의 관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여기에서는 주체나 객체, 회화의 자기 동일성이나 모순이 아니라, 단지 유사성과 차이, 구성과 해체, 공존과 와해가 있을 뿐이다. 다시 [의미의 논리]의 어법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요소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구성들, 조합들이다. 그들의 작품에 존재하는 가로지름은 원인들이나 인과계열들의 환원 불가능한 다수성, 원인들을 하나의 총체로 결합할 수 없는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원자들처럼 하나의 동일한 물체 내에서 이질성을 만들어낸다. 그들이 작품은 다양한 것들의 자체 내 이질성과 또한 다양한 것들의 유사성을 말함으로서, 미로와도 같은 먼 우회로를 거쳐 다시 자연과 가까워진다. 자연의 본질적인 속성은 다양성이기 때문이다.
출전 | 아트 인 컬쳐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