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비정하다. 거리는 차량과 사람들의 물결로 분주하고, 하늘은 공해로 인해 우중충한 잿빛 일색이다. 그 속에서 도시인들은 익명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도시가 더욱 비정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햇빛을 반사하는 차가운 유리창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빌딩의 숲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간다.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지하철을 타거나,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버스에 실려 출퇴근을 한다. 피곤에 지친 무표정한 얼굴들. 지하철이나 버스에 탄 승객들은 한결같이 말이 없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빗 리스만의 표현대로 ‘군중 속의 고독’을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다.

노세환은 도시의 군중을 소재로 다룬다. 인구 천 만이 넘는 서울이나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 사는 익명의 사람들. 그들은 유독 타인에게 말이 없다. 횡단보도의 빨간 신호등 앞에서 파란 불이 켜질 때를 기다리며 멈춰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노세환은 셔터를 누른다. 그 앞을 차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그러나 차들의 모습은 특유의 카메라 촬영 기법에 의해 흔적만 있을 뿐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무료하게 신호등이 바뀌기만 기다리고 있다. 장소는 파리 크로아상 빵 가게 앞이다.

노세환의 <교통신호등(Traffic signal)> 연작은 화려한 컬러 프린트로 도시의 단면을 핍진하게 보여준다. 그가 보여주는 이 일상적 풍경은 우리의 눈에 익다. 그것은 너무나도 평범하여 처음에는 특별히 이런 장면에 관심을 갖는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자세히 사진을 들여다보면 그가 카메라를 빌어 ‘인간 행태의 파노라마’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머리를 쓰다듬는 여인, 전화를 거는 남자, 가방을 든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중년 여성 등등 좌우로 긴 직사각형의 사진에서 인간들의 행태가 정직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시간이 박제된 사회의 박물관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한 시대, 한 사회의 단면을 기록한 기록사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사진이 지닌 물신적 가치가 높아지면서 발터 베야민이 이야기한 ‘아우라’와는 다른 의미가 생성되겠지만, 그것은 노세환의 사진이 노리는 바가 아니다. 그는 그보다는 오히려 철저히 ‘지금 그리고 여기(hic et nunc)’에 주목하여 순간의 덧없음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 지도 모른다. 일정한 시간을 두고 명멸하는 신호등을 따라 부평초처럼 떠도는 도시인들의 삶에 그는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다.
노세환의 사진은 그의 화면에 자주 등장하듯이, 파리 크로아상이나 KFC, 맥도널드와 같은 대형 간판을 배경으로 삼는다. 이런 상품들은 파퓰러한 도시적 삶의 아이콘이 아닌가. 특히 맥도널드의 경우는 이미 뉴욕이나 동경, 파리, 런던, 상파울루는 물론이고 요한네스버그, 심지어는 저 카리브 해의 작은 섬나라인 바에이도스의 수도 브리지타운에서도 볼 수 있는 만국공통어가 돼 버린 지 오래다. 서울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이런 문화적 아이콘들은 도시인들의 평균적 삶에 대한 표지가 된다. 아침에 일어나 파리 크로아상에서 간단한 빵과 음료로 요기를 하고, 점심에 직장동료들과 식사를 마친 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저녁 때 퇴근 후에는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다. 노세환의 사진은 이러한 도시인의 평균적 삶의 행태를 행간에 깔고 있다. 그 삶의 행태란 철저히 익명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것 같지만, 너무나도 그렇고 그런 것이어서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에서 허무감을 동반한 페이소스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까닭도 바로 도시적 삶이 주는 신산함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사진에서 유독 웃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까닭도 팍팍한 도시 생활이 주는 저 삶의 신산함에 있는 지도 모른다. 그의 사진이 필경 연출에 의한 것이 아닐진대, 분주하게 오가는 행인들의 무표정한 얼굴은 서두에 언급한 도시의 비정함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세환의 사진 작업이 마냥 무거운 주제만 깔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진은 오히려 경쾌한 편이다. 그것은 일초 미만의 촬영 속도처럼 빠르게 피사체를 담아낸다. 그의 사진 속에서 사람이나 차량의 일부는 흐리멍덩하게 뭉개져 있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 그의 사진은 분명한 대상과 흐릿한 대상의 결합처럼 보인다. 이러한 촬영기법은 왜 필요했던 것일까. 그것은 사진이 하나의 현상임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정지된 속에서의 움직임, 일찍이 마르셀 뒤샹은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1912년 작)를 통해 회화에 시간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마찬가지로 사진에서의 장노출 기법은 일정한 시간의 흐름을 한 장의 사진 속에 압축해 보여준다. 인간의 눈이 보는 방식과 기계가 보는 방식은 같을 수가 없지만, 어떤 현상을 담는다는 점에서는 같다. 노세환의 사진은 피사체를 일순간에 박제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움직임의 요소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의 사진 속에서 부옇게 표현된 피사체들은 마치 이제 막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모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들은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노세환이 사진을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또 하나의 시선은 도시의 변화하는 모습이다. 그는 같은 장소를 1년의 시차를 두고 촬영을 했다. 신촌의 연대 앞 굴다리 부근을 찍은 사진은 어떤 필요에 의해 공사를 벌이는 장면이다. 2006년의 어느 날 그곳의 넒은 담벼락에는 대형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 그 앞에 수많은 행인들이 서 있다. 그러나 1년 뒤의 어느 날, 그곳은 공사 중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듯 강철 빔들이 빼곡히 들어찬 담벼락 앞에는 형형색색의 우산을 든 사람들이 서 있다. 1년이 지난 뒤 그 곳에는 또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 그는 다시 날을 잡아 그 곳을 촬영할 것이다.

노세환은 도시의 현상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에게 있어서 도시는 하나의 주제다. 유장한 이야기를 결코 그칠 것 같지 않은 그것을 위해 그는 오늘도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