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조각-공중누각(空中樓閣)


허공에 지은 집, 존재의 메타포




전통적인 조각의 개념으로는 양감과 물성 그리고 공간감을 들 수 있으며, 이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양감일 것이다. 장르적 특수성에 천착한 모더니즘 서사에 의해 지지되던 이 개념이 후기 근대의 다원주의 양상이 전면화하면서 재고되기에 이른다. 소위 탈(脫)의 논리에 힘입은 이러한 태도는 조각에 있어서는 탈조각의 경향성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는 조각의 전통적 개념이면서 핵심적 개념인 양감을 결여한 조각, 가급적 실체감과 물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조각을 통해 전통적인 조각의 개념을 재해석하는 한편, 그 범주의 확장 가능성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물질에 대한 최소한의 흔적만을 견지한 이 조각은 굳이 따지자면 종래의 부드러운 조각과 공간설치작업과 일정하게 맞물리면서도 이와는 또 다른 지점을 향해 열려있다.

주제에 대해 살펴보자면, 공중에 떠 있는 신기루, 허무하게 사라지는 가공의 사물 등을 뜻하는 공중누각의 일반적 의미는 부정적이지만, 조형적으론 그 부정적 의미가 오히려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술은 일상보다는 이상에 치우쳐져 있고, 이로 인해 일상적인 언어용법을 예술의 특수성에 맞춰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부정적 의미를 긍정적인 의미로, 생산적인 의미로 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예술은 일상이 결여하고 있는 부분을 이용하고 전유하고 보충한다. 이를테면 모순율과 아이러니가 그렇다. 모순율과 아이러니는 일상의 관점에서 볼 때 부정성의 대상이지만, 예술이 비롯되는 원천이기도 한 것이다. 더불어 공중누각 즉 공중에다 집을 짓는다는 의미 자체는 이번 전시의 형식적 특징이랄 수 있는 드로잉조각의 성격에도 부합한다. 이를테면 드로잉으로 공중에다 집을 짓는다고나 할까.

참여 작가들을 일별해보면, 미디어시스템이 문제를 일으켜 이미지가 파열되는 순간에 주목한 강영민, 가녀린 철사를 엮어 거대한 고치를 만드는 김세일, 숯을 매달아 가공의 구조물을 재구성한 박선기, 섬유를 소재로 한 사각패턴의 변주를 통해 명상적이고 관조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장연순,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돌과 석고 덩어리를 통해 중력을 실험하는 전강옥, 머리카락과 스타킹 등 신축성 있는 소재를 통해 장력을 실험하는 함연주 등이다. 이렇듯 참여 작가들의 면면에서도 느껴지듯이 마치 공간(허공)에다 드로잉을 한 듯한 인상과 함께, 공간과 유기적으로 상호 작용하고 상호 침투되는 조각, 그저 공간에 설치(세팅)되는 조각이 아니라 공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조각, 공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조각, 공간과 함께 형성되는 조각이 새로운 공간경험을 예시해줄 것이다.




강영민, 이미지가 파열되는 아찔한 순간에 주목하다

기계문명과 전자문명 그리고 연이은 디지털문명을 아우르는 미디어 혁명은 삶의 질을 판이하게 바꿔놓고 있다. 한자리에서 세계와 접속하고 소통할 수 있는 현대인은 어쩌면 신인류일지도 모른다. 메시지를 정보의 형태로 압축하고, 이렇게 압축된 정보를 자유자재로 입출력하고 송수신할 수 있게 해주는 미디어의 힘은 이미지와 이미지에 대한 인식 역시 변화시키고 있다.

20세기 이후 이미지의 존재방식과 관련한 핵심적인 논객으로는 발터 벤야민, 마샬 맥루한, 그리고 장 보들리야르를 들 수 있다. 이미지를 복제 재생산할 수 있게 해주는 미디어의 출현 이후 이미지의 정체성은 오리지널리티로부터 리프러덕션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그 표상형식 역시 인쇄매체의 망점(발터 벤야민)으로부터 전자매체의 광점(마샬 맥루한)으로 그리고 재차 디지털 매체의 픽셀 단위(장 보들리야르)로 진화한다. 각각 인쇄매체의 망점과 TV의 주사선 그리고 디지털 매체의 픽셀이 단위원소가 돼 이미지를 구축하기도 하고 해체하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보들리야르에게서 이미지는 언어체계인 코드를 의미하는데, 이는 컴퓨터 공학의 이진법 체계, 생물학에서의 DNA 체계, 텔레비전과 사운드레코딩의 디지털 체계, 그리고 여타의 정보 테크놀로지의 체계 등 사실상 동시대적인 소통 방법의 상당 부분을 포괄하는 것이다. 여기서 코드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내포하지 않은 고도로 추상화된 언어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코드의 언어체계를 빌려 상호간의 소통을 이어주는 연결망이 인터넷이고 웹인 것이다. 말하자면 코드 자체는 디지털 체계로 구현돼 있으며, 이를 아날로그 체계로 해석해주는 전환 장치 없이는 누구도 그 언어체계에 접근할 수가 없다.

이런 심각한 구조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정작 누구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단지 최종적으로 구현된 이미지와 정보와 메시지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 메커니즘의 구동방식과 시스템의 구조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과부하와 노이즈 그리고 다운과 같은 심각한 장애는 시스템이 표면화되는(시스템의 구조가 드러나 보이는) 보기 드문 순간인데, 강영민은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한다. 최종 출력물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가 생산되고 조작되고 유포되고 피드백 되고 폐기되는 시스템의 구조와 구동방식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때 이미지는 단순한 시지각적 정보 이상의 이미지의 정치학과 이미지 메이커와 같은 정치적이고 사회학적인 범주를 광범위하게 아우른다.

누가 어떤 이미지를 왜 유포시키고, 이미지를 어떻게 왜곡시키는가. 이 문제는 시스템이 정상으로 작동할 때보다는 심각한 장애로 이미지가 파열될 때 더 잘 드러나 보인다. 강영민의 작업은 바로 이처럼 이미지가 파열되는 순간을 형상화하고, 미처 노이즈가 처리되지 않은 채 이미지들이 마구 뒤엉키는 지점을 가시화한다. 이로써 이미지 자체보다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메커니즘과 시스템의 구동방식에 주목하도록 유도한다. 참여 작가들이 대체로 추상적이고 유기적인 형식의 설치작업에 치중하는 반면, 강영민의 경우 서사를 끌어들여 작업을 풀어내는 점이 눈에 띤다. 이로써 여타의 작가들과 구별되면서도 오히려 이로 인해 어떤 예기치 못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김세일, 존재의 집, 무한 증식되는 망 구조물

김세일은 가녀린 철선을 엮어 비정형의 망들이 중첩된 거대한 구조물을 만든다. 엄청난 양의 시간과 노동력이 요구되는 이 작업은 일종의 유기적인 반복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 이면에 차이를 내포한 반복으로 정의할 만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제작과정도 그렇거니와 완성된 후에도 그 형태나 크기가 엇비슷하게 보일 뿐, 사실은 똑같은 망이 하나도 없다. 이를테면 작가는 압축된 상태의 구조물을 전시장에 가져다 놓고 이를 펴면서 부풀려나가는데, 그 펴는 정도나 양상에 따라서 매번 다른 구조물로 변신한다. 그리고 대개는 거대한 공처럼 부풀려진 구조물이 그 중심으로 갈수록 망들이 더 많이 겹쳐지는 탓에 밀도감이 높아 보이는 반면, 구조물의 가장자리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밀도감이 희박해 보이는 시각적 변화가 감지된다. 나아가 이 작업에 관한한 엄밀하게는 완성되거나 완결된 지점이 따로 있을 수가 없다. 다만 원하는 크기나 형태가 조성되면 작업을 잠정적으로 중단할 뿐, 실제로는 무한하게 증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망 구조물은 전통적인 조각에서의 매스를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실체감마저도 희박해 보인다. 가능한 한 물질감이나 실체감을 최소화하면서, 가급적 순수한 암시력만으로 존재하는 어떤 경지를 겨냥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김세일의 작품은 실체감이 희박한 만큼 오히려 암시력의 비중이 현저해지는 인상을 주며, 이로써 거의 순수한 환영을 대면하고 있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더불어 설치된 조명이 구조물의 표면에다 반짝이는 빛의 편린들을 드리울 때면 환상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이와 함께 작가의 작업에서는 특히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판타지가 구조물 이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구조물 자체의 실체감이 희박한 만큼, 경우에 따라선 오히려 그림자의 실체감이 더 뚜렷해지는, 이른 바 구조물과 그림자, 실재와 허상과의 역전 현상이 발생한다.

이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서 작가의 작업은 경계와 구조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바꿔놓고 있다. 이를테면 기존의 경계와 구조에 대한 인식이 결정적이고 닫힌 체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작가의 작업에서처럼 안과 밖이 따로 없고 겉과 속이 서로 통하는 소위 통(通)구조는 비결정적이고 열린 체계를 지향한다. 그 열린 체계, 즉 망과 망들이 연접돼 무한 증식되는 구조가 어떤 의미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를테면 망 하나하나가 인연의 계기를 암시하며, 이로써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에 기인한 정신세계를 엿보게 한다.

이외에도 작가는 일종의 지점토를 수제비처럼 잘고 얇게 빚어 만든 조각을 철선 구조물과 함께 엮는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텅 빈 망 구조물과 함께 이따금씩 그 속에 오브제를 감싼 망 작업에 연이어 선보인 이 일련의 작업들은 흡사 허공에 매달린 고치를 연상시키며, 빛을 은근하게 투과시키는 반투명성으로 인해 시적이고 몽상적이며 일말의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자아낸다. 실상 이런 느낌은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작가의 여타의 작업들에서도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어찌 보면 작가의 지배적인 정조가 아닌가 싶다.

이로써 집채만큼 크지만 사실은 실처럼 가녀린 망 구조물이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작가의 작업은 조각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재고하게 하며, 경계에 대한 종래의 인식을 흔들어 놓는다. 그리고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안과 밖, 겉과 속, 있음과 없음, 실체와 일루전이 서로 내통하는 것임을 주지시킨다.


박선기, 작은 것들이 모여 하나의 견고한 형태를 이루다

세계는 하나의 단위원소(모나드 혹은 단자)로부터 비롯되었다. 원소와 원소가 결합해 존재를 만들고 존재들이 모여 세계를 이룬다. 원소는 존재의 씨알이며 생명의 원천이다. 이처럼 그 속에 생명을 품고 있는 원소가 곧 소우주이며, 소우주(개별존재)는 대우주(자연)와 유기적으로 연속돼 있다. 숯을 소재로 한 박선기의 설치작업은 부분으로써 전체에 종속되면서도 독자적인 개별성을 잃지 않는 부분, 똑같지 않은 부분, 그 속에 차이를 내포한 부분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부분들의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예시해주며, 하나의 단위원소가 세계를 잉태하던 그 물리적이고 관념적인 처음 순간을 되돌아보게 한다.

작가는 가녀린 낚싯줄에 숯을 묶어 천장에 매다는데, 흡사 숯을 줄줄이 꿰어 만든 주렴 같다. 이 숯의 주렴을 공간에 설치하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 계단이나 기둥 그리고 주랑(기둥들이 연이어진 홀) 등 건축 구조물의 한 부분을 재구성한다. 사물을 천정에 매단 것이 샹들리에의 기본형에 착안해 이를 변형한 것처럼 보이는 이 구조물들은 그 자체 완전한 형태로서보다는 발굴된 고대 유적의 폐허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유적의 파편들을 재구조화한 듯한 조형물들이 흡사 시간의 주랑을 거니는 것 같은, 시간의 흔적과 대면하는 것 같은 낭만주의의 정서적 유산(이를테면 시간과 죽음과 흔적 같은)을 떠올려준다.

이와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일종의 액자를 재구성한 작품은 큰 액자 속에 작은 액자들이 점층적으로 중첩돼 보이는 형태로써 전통적인 원근법에 대한 반응이 엿보인다(다른 작업에서 작가는 시점의 문제를 다루기도 한다). 이 일련의 작업들이 직선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면, 곡선과 유기적 형태를 띠는 구조물도 있다. 이는 구불구불한 형태로 인해 거대한 뱀이 허공에서 용트림하는 것처럼도 보이고, 먹으로 일필휘지한 듯한 허공에 쓴 먹선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 곡선 구조물은 대개 기하학적 형태를 띠기 마련인 공간과 대비되는데, 공간의 정적 구조와 구조물의 동적인 구조가 부닥치면서 긴장감과 함께 일말의 내적 울림을 자아낸다.

그리고 거의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는 낚싯줄의 희박한 실체감으로 인해 이 일련의 구조물들이 마치 공중에 띄워져 있는 것 같은 일종의 무중력 상태가 느껴진다. 여기에 벽면에 드리워진 조형물의 그림자가 가세하면서 복합적이고 다중적인 시지각적 판타지를 연출해 보인다.

한편, 박선기의 작업에서 숯은 단순한 소재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주지하다시피 숯은 유대 신비주의의 카발라와 고대 연금술의 핵심물질(실제로 변환 내지는 변질되는 성질을 내포하고 있거나, 이를 상징하는 물질들) 가운데 하나이다. 숯은 재의 일종으로서 그 자체 탄화된 것(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다른 생명을 위한 거름(재생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정화와 재생(모든 종교의 핵심개념인)의 상징물질인 숯 구조물 작업을 통해 작가는 공간을 정화하고 죽어가는 예술을 재생시키는 상징적이고 주술적인 제의로서의 의미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장연순, 존재의 몸과 시간의 매트릭스

장연순은 섬유를 소재로 해서 추상적인 구조와 형태를 구현하며, 이를 통해 소위 부드러운 조각을 예시해준다. 마의 일종인 아바카 섬유를 정련한 사각형을 기본 모듈로 하여, 이를 무수하게 중첩시킨 겹 구조(자바라 구조?)를 보여주는 작가의 작업은 빛과 공간과 공기의 흐름이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한다.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기하학적 형태를 기본형으로 해서, 이를 반복적으로 쌓거나 열거하는 한편, 이를 연이어 덧붙여나가는 방법으로써 구조적 다변화를 꾀하는데, 이 모든 과정이 풀 먹임과 바느질이라는 지난한 수작업을 통해 수행된다. 수행은 작가의 작업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즉 작가는 단순히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 자신의 존재를 투사시키고 일치시킨다. 이러한 사실은 자신의 몸을 최대한으로 단순화시켜 육면체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 상자 속에 자신의 마음을 담는다는 작가의 고백에서도 확인된다. 말하자면 기본형으로 취해진 큐브(육면체)는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 이상의 작가 자신의 존재를 상징하며, 이로부터 일종의 모더니즘적 환원주의에 대한 공감이 엿보인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 사각형을 소재로 차용하고 변주한다는 점에서 형식적 환원주의가, 그리고 그 기본적인 형태를 자신의 존재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론적 환원주의가 견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렇듯 자신을(동시에 존재 일반을) 상징하는 큐브 속에다 어떻게 마음을 담아내는가. 쪽빛으로 염색한 섬유에 풀 먹임과 재봉만으로(물론 이를 포함해 대략 12단계에 이르는 과정들을 거치지만) 조형적이고 건축적인 형태를 만들어내는가 하면, 겹 구조를 통해서 드러나 보이는 쪽빛 염색의 은근하고 맑고 깊은 색감이 동양적인 관조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과 밖이 서로 닫혀있으면서도 열려있는, 막혀있으면서도 통하는 일견 역설적인 구조를 실현한다. 아바카 섬유의 성긴 올 구조와 조형물의 통 구조에 힘입고 있는 이러한 인상 자체는 창호 문이나 발을 통해 집 밖의 풍경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이와 동시에 안과 밖을 구별했던 전통적인 미적 관념 내지는 생활철학을 엿보게 한다. 구별하면서도 통하는 구조. 이는 어쩌면 섬유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이며 본질적인 국면이랄 수 있는데, 작가는 그 성질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극대화한 것이다.

작가는 그 중첩된 망 구조의 조형물을 <늘어난 시간>으로 지칭한다. 물론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은 논리적인 현상은 아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논리를 뛰어넘는 발상이 필요한데, 그 일단을 작가가 또 다른 부제로서 끌어들이고 있는 <매트릭스>에서 엿볼 수 있다. 매트릭스는 시간의 자궁이며 공간의 자궁이다. 자궁은 논리와 개념으로 구조화되기 이전의 가능성의 세계를 상징하는 만큼 그 속에서 시공간은 주체의 의식 여하에 따라서 마구 휘어지고 분절되고 재배치된다. 주체의 의식이 세계를 낳고 왜곡시키고 사라지게도 하는 것이다. 사실 의식 속에서라면 시공간이 고정된 형태를 가질 리가 없다.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이나 주관적인 시간개념도 알고 보면 이처럼 시간에 대한 주체의 의식을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신축성 있는 섬유 구조물로 인해 <늘어난 시간>이란 주제가 더 적절해 보이는 작가의 작업은 이를 통해 늘어난 시간은 물론이거니와 압축된 시간과 휘어진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관적인 시간을 추체험하게 한다. 더불어 그 무궁한 시간의 망 속에서 존재와 존재가 끊임없이 연기(緣起)하여 만나지는 것임을 주지시킨다.


전강옥, 불안정한 균형과 삶의 유비

전강옥은 나뭇가지를 엮어 각종 크고 작은 사각형 같은 구조(틀)를 만든 연후에 그 표면과 속을 낚싯줄로 얼기설기 엮는다. 그리고 이렇게 엮어낸 낚싯줄 위에다 자잘한 석고 덩어리나 조각돌을 얹는다. 따라서 그 구조물을 건드리기도 할양이면 가녀린 낚싯줄을 지지대 삼아 그 위에 얹혀져 있던 석고 덩어리나 조각돌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부실하고 불안한 느낌을 준다(실제로도 작은 스침에도 그 덩어리들은 떨어지게 돼 있다). 마찬가지로 낚싯줄에 매달린 추가 내려 누르는 힘에 의해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나무 큐브들은 손으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은(실제로도 그러한) 불안정한 형태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데, 이로부터 극도의 긴장감이 유발된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기우뚱하게 서 있는 풍선이나 삐딱하게 서 있는 테이블과 의자들, 그리고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큐브들로 나타난 불안한 균형을 통해 중력과 균형에 대한 성찰을 유도하는 한편, 그 자체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는 것들, 불안정하고 덧없는 것들, 그 존재감이 박약하고 희미한 것들에게 실체감을 부여해주며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전강옥은 이 일련의 작업들을 중력조각이라고 칭한다. 중력을 조각의 본질적인 요소와 성질로 본 것인데, 그러나 중력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인 탓에 정작 그 실체가 잘 드러나 보이지는 않는다. 공기만큼이나 자명한 사실일 때 그 실체는 오히려 희박해지는 일종의 인식론적 딜레마에 빠져들게 되는데, 중력 역시 예외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 딜레마를 돌파해서 중력의 실체를 가시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어떻게 중력의 실체를 뚜렷하게 부각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아방가르드의 핵심전략이기도 한 낯설게 하기가 동원된다. 즉 자명한 현상으로서 작용하는 중력을 오히려 최소화함으로써 그 실체를 부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물이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을 때 그 균형을 지속시키는 힘의 실체가 더 잘 드러나 보이며, 가까스로 안정체제를 유지하고 있을 때 계속해서 안정체제를 지속시키려는 힘의 계기가 더 뚜렷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불안정한 조각은 중력을 완전히 소거하지 않으면서(무중력 상태가 될 것이므로) 최소한으로 유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약간의 충격에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불안정한 구조에서 중력은 이처럼 최소한으로만 작용되어지지만, 이로 인해 극적 긴장감은 오히려 그 만큼 더 강화된다. 중력과 긴장강도가 반비례하는 것이다.

작가의 조각은 바로 이 극적인 순간을 포착해 보여준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외부로부터 작용하는 힘의 계기(심지어 우연성의 계기마저도)를 피할 수는 없다. 이렇게 낚싯줄 위에서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오브제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씩 떨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는 삶의 유비를 본다. 삶이란 최소한의 중력으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사물처럼 힘겹게 버티다가, 외부로부터 작용하는 미미한 힘에 부닥쳐 마침내 추락하는 것이 아닐까. 삶이란 그 추락을 피하기 위해 긴장의 강도를 최고치로 유지하는 순간들의 연속이 아닐까.


함연주, 부드러운 긴장

함연주는 머리카락이나 스타킹 등 신축성을 지닌 소재 고유의 성질인 장력과 탄성에 주목한다. 스타킹의 인장강도, 라텍스 소재의 탄력성, 용수철의 탄성, 그리고 자력 등 비가시적인 자연의 에너지를 가시화한 것이다.

이를테면 금속 성분의 링을 축 삼아, 그 좌우로 스타킹을 팽팽하게 당겨 만든 구조물을 통해 그 인장강도를 드러내는 식이다. 그리고 라텍스 소재는 고유의 탄력은 물론이거니와 색감과 질감이 살갗과 흡사한 유사 신체성이 특징이며, 이를 소재로 한 작업에서는 거대한 고치나 벌레의 알집 등 유기체가 연상된다. 또한 시계부품 같은 기계부속을 소재로 한 작업에서는 복제 재생산된 레디메이드 고유의 패턴이 두드러져 보이며, 그 패턴은 자력에 의해 재구성된다.

이외에도 작가의 작업은 스팽글 같은 하나의 단위구조(모나드)가 반복 중첩되면서 만들어낸 기하학적 패턴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된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엿보이는 구조적 특질, 이를테면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나, 좌우대칭이 엄격하게 적용된 중심성이 강한 구조, 그리고 기하학적 패턴은 그대로 에너지를 가시화한 표상형식에 해당한다. 보기에 따라선 그 구조가 우주적 에너지를 표상한 만다라의 변주된 형식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처럼 에너지의 물리적 실체가 뚜렷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느슨하고 암시적이며 여백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머리카락을 소재로 한 작업이다. 작가가 일관되게 천착해온 <부드러운 긴장>이라는 주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작업이 아닌가 생각된다. 작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실 삼아, 그리고 투명한 레진을 접착제 삼아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이어 붙이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 마치 정형이나 비정형의 거미줄 위에 이슬이 맺힌 것 같은 환상적인 효과를 연출한다. 이런 망 구조가 확대 재생산되면서 공간을 잠식해 들어가는데, 흡사 온통 거미줄로 점령당한 오래된 폐가를 보는 듯한 황량하면서도 서정적인 풍경이 전개된다. 미세한 바람에도 하늘거리는 이 미약하고 섬세한 망 구조물은 그대로 덧없는 존재를 증명하는 시간의 그물이며 미망의 그물을 연상시킨다. 한편, 이는 머리카락을 소재로 해서 공간에 개입하고 공간을 구성한 공간설치작업으로써 공간 자체가 작품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장소특정성이 강하게 작용하는 편이다(공간이 없으면 작품도 없다). 머리카락이라는 미약한 소재를 사용해 서정적인 공간을 연출하는 것에서 여성주의의 감성과 몸 담론(특히 에브젝션 담론)에 대한 공감이 읽혀진다.

작가는 이처럼 부드러운 소재를 매개로 하여 그 소재 특유의 장력(에너지)을 가시화한다. 허공에 떠 있는 일련의 구조물들(그 자체 에너지의 단자들에 해당하는)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지만 너무나 미약해서 그 실체감이 쉽게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오히려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조형물과 실체감을 겨루는 듯한 느낌이 들기조차 한다. 이처럼 존재감이 희박한 조형물과 상대적으로 실체감이 뚜렷한 그림자가 어우러져서 허공중에 실제와 허상의 레이어를 연출한다. 이로써 함연주의 작업은 부드럽고 우호적이고 심약한 소재 속에다 일말의 긴장감을 내장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