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공개되는 고경호의 새로운 작품은 낡은 벽들에 새겨진 아이들의 파릇파릇한 모습을 담고 있다. 다양한 매체가 동원된 그의 작품은 배우고 노는 아이들의 소리로 떠들썩해야 할 학교가 마지막 몇 명의 졸업생을 끝으로 문을 닫고, 현대미술의 전시장으로 거듭난 후쿠다께 하우스에서 전시된다.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마지막 졸업생 다섯 명으로, 지금은 스무 살 정도 되었다고 한다. 시골 학교의 분위기가 남아있는 일본의 전시장은 그곳의 주인공이었던 아이들을 기념하기 위한 작은 무대가 된다. 그는 패널 하나에 아이들 한명씩을 배정한다. 아이들은 작가의 호출에 하나씩 불려 나오는 듯하다. 단체 사진 찍은 것에서 하나씩 오려낸 아이들의 이미지는, 똑같은 자세이면서도 약간씩 다르다. 마치 먼 기억 속의 이미지처럼 그들은 반복 속의 차이를 보여준다.

아이들의 이미지가 반영되는 벽들에 비슷한 방식으로 새겨진 나무 이미지에서도 반복 속의 차이가 발견된다. 아이와 나무는 차이가 있지만, 고경호의 작품에서 아이들은 나무들이고, 나무들은 아이들처럼 보인다. 그것은 자연화 된 인간이고, 인간화된 자연이다. 나무는 풍경을 이루는 주요한 소재이고,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그 장소를 증거 한다. 아이와 나무는 작품을 통해 다시금 영속화된다. 벽에 투영되는 나무 이미지는 2000년대 중반의 영상 설치 작품에서도 등장한 바 있지만, 이번에는 부조처럼 만들어졌다. 테라코타 벽돌로 쌓아 낡게 연출된 벽은 시간의 흐름을 한 공간 속에 압축한다. 사진, 그림, 부조적인 방식 등 여러 가지 버전을 가지는 [reflection-tree]는 각각이 아니라, 세트화 되어 보여 진다. 작가가 찍은 사진에 기반 한 이미지이지만, 자세한 형태보다는 흐릿한 그림자 같은 모노톤을 유지한다. 벽 패널 위의 나무 이미지는 여러 겹으로 중첩된 시간이 새겨져 있다.

이미지가 새겨지는 낡은 벽은 직접 제작된 작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다. 테라코타 벽돌은 90년대 초반 유적지 같은 풍경을 연출한 그의 작업에도 많이 사용된 것인데, 무엇인가를 기념하는 이번 작품에 다시 사용되었다. 작가에 의하면 벽돌은 고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것이다. 그는 특정한 장소를 증거 하는 것은 나무와 벽이라고 말한다. 양자는 장소를 잘 나타낸다. 나무와 벽이 감내하는 장구한 세월에 비한다면, 인생은 짧기 그지없다. 폐교의 아이들을 나무와 같은 방식으로 새긴 것들은 서로 구별되는 시간대를 충돌시키면서 감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부르면 막 뛰어나올 듯한 아이들의 이미지는 다른 재료들과 뒤얽혀 목질화, 석질화 되어 있다. 낡은 벽돌들은 이전작품처럼 오벨리스크 등 유명한 유적지가 아닌 시골의 작은 학교 풍경을 구축하는데 사용되는데, 그것은 거대 역사에서 미시 역사로 옮겨온 작가의 관심사를 반영한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지만, 모두가 공유해야할 공통의 역사를 강요하는 전형적인 기념비가 아니다. 기념비의 역사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조각의 입장에서 굳이 분류한다면, 차라리 반(反)기념비에 가까울 것이다. 고경호의 작품은 작가 주변의 미시 역사로 이동하였지만, 두터운 질감에 각인된 시간의 흐름이라는 이미지는 이전의 작업과 연속적이다. 같은 소재를 다양한 매체로 조금씩 변화시키는 그의 방식 자체가 시간적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사진과 그림, 다시금 그림을 찍은 사진 등의 여러 단계를 통하여 선명한 자연적 대상은 또 다른 정조로 물들여진다. 이러한 재가공에서 관객의 상상력으로 채워져야 할 사물들 사이의 공백도 늘어난다. 그러나 최초의 대상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다. 그대로이든 변형된 채로든 사진적 차원은 드러나 있다. 이번 작품에서 사진적 프로세스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아이들의 이미지를 작은 입상으로 제작한 것들이다. 입상들은 작은 인형처럼 30-40cm 정도 된다. 피규어처럼 사실적으로 형상화된 입상 다섯 개는 통상적인 시점이 아니라, 관객이 고개를 들어서 찾아봐야 하는 시점에 배치된다.



선반 위에 배치된 그것들은 설치된 카메라에 의해서만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또 다른 표현기법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기억에 있어 사진이 차지하는 위상을 강조한다. 한국의 금산 갤러리 전시에서의 경우,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원하여 하나의 상에 내재된 다양한 차원들을 매체를 통해 반영할 것이다. 장소성에 충실한 일본에서의 전시는 무대 같은 장소를 연출하곤 하는 고경호의 작품 성격과 잘 맞는 듯하다. 교무실이 있던 자리에 설치될 작품들은 오래된 사물과 같이 연출되며, 개개의 작품 보다는 작품 들 사이의 관계 및 전체적인 상황, 그리고 분위기가 중시된다. 한국에서의 전시는 장소성이 다소간 탈각되면서 스케일과 스펙타클이 강화되지만, 첫 개인전 이래 그의 작품에 면면히 흐르는 연극성theatricality은 보존된다. 복합적 층위를 가지는 그의 작품은 현재에 한정되지 않는 시공간적 확장과 중첩이 특징이다. 하나의 형식으로 완결된 장면이 아니라, 상황 속의 체험을 강조하면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각의 일과성temporality을 지향한다.

낡은 벽들 위에 새겨진 아이들과 나무들은 지금도 덧씌워질 또 다른 시간의 켜를 드러내면서 진한 상념을 자아낸다. 그것은 한순간에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어 각인된다. 지금 여기에는 없는 자연과 인간들이 무한히 지속되는 경험으로 재탄생한다. 전형적인 미술의 형식을 벗어나는 연극적인 방식은 주관 또는 객관 그 자체에 방점이 찍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의 시공간에서 촘촘한 망을 짜고자 한다. 일본 폐교의 아이들을 단지 작품의 소재로 체택하거나 그것을 대상화하는 주체의 관점은 배제된다. 영겁의 세월 속에서 부침하는 익명적 인간의 삶에서 예외적인 존재는 없다. 작가는 폐교의 아이들을 자신과 마찬가지의 인간적 운명을 통과하는 존재로 호출한다. 주체는 시간성에 몸을 실은 타자와 같은 차원에 놓여진다. 주체는 세계로 던져지며, 역으로 세계는 주체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메를로 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지적하듯이, 체계의 보편적 사유자로의 주체나 객관적 사고에는 타인과 의식들의 복수성을 위한 자리가 없다.

고경호의 작품은 현상학의 화두처럼, 세계와 주체의 조망을 결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조망의 얽힘에서 시간은 중요한 매개 고리가 된다. 시간이라는 차원은 차이를 발생시킨다. 타인의 얼굴 그자체가 바로 차이이다. 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에서 오로지 홀로 있는 주체에서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것, 순수하게 개인적인 지속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미래와의 관계, 즉 현재 속에서 미래의 현존은 타자의 얼굴을 마주한 상황에서 비로소 실현된다고 본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미래로 향한 현재의 침식은 홀로 있는 주체의 일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관계이다. 그것은 단지 주체와 타자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지금 여기로 귀속시키는 것, 즉 소유하고 장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는 부재하지만 미지의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을 작품 속의 아이들은 타자의 차이성을 강조한다. 그것이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고경호의 작품에는 특정한 개인들이 호출되어 있지만, 그들은 무수한 익명적 주체들의 공존으로서의 세계를 예시함으로서, 집단의 역사로 확대된다. 나무로 나타나는 자연이나 벽으로 나타나는 문명 또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시간 속에서 주체와 조우하는 타자로 드러난다. 이러한 타자들은 인간적 생애를 초월하는 두터운 시간의 겹을 둘러쓰고 있지만, 인간 이전의 것도 인간 이후의 것도 아닌 시간에 둘러싸인 세계, 곧 문화적 세계이다. 그것들은 익명적이지만 주체 가까이 현존하는 것이다. 크고 작은 단편적 시간들의 흔적이 응집되어 있는 벽은 신체와 장소를 말한다. 그것은 많은 알레고리를 담고 있는 유적지처럼, ‘돌이킬 수 없는 해체와 부식의 과정으로서의, 기원으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져가는 것으로서의 역사’(크레이그 오웬스)를 의미한다. 유적지라는 비유는 특정한 의도와 형식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고전적인 의미의 예술작품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에 귀속된site-specific 작품으로 되풀이하여 읽혀질 알레고리를 간직한다.



그 알레고리 중의 하나는 모든 현상들의 일시성과 덧없음이다. 고경호의 작품은 하나의 모티브를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하면서 지각의 과정을 강조한다. 메를로 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우리는 ‘그림 밑에 캔버스가 가까이 현존해 있다는 것, 기념물 밑에 시멘트가 풍화되어가고 있는 채로 가까이 현존해 있다는 것, 등장인물들의 태도에서 피로한 모습의 배우가 가까이 현존해 있다는 것’을 지각한다고 말한다. 지각은 어떤 사물이 실려질 매체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양태를 보인다. 어떤 것과의 조우, 기억, 역사, 흔적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사진의 역할은 적지 않다. 고경호의 작품은 작가가 관념적으로 꾸며낸 것이나, 반대로 객관적인 것으로 실증하려는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사진이라는 매체는 이중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것은 사실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려주는 동시에, 주관의 투사에 의해 변형되어지는 기본적인 틀이 되어준다. 사진은 그림과 부조의 방식으로 변형되면서, 다양한 차원에서 기원한 지각을 조율한다. 이 지각의 장 속의 사물은 단지 상기되는 어떤 것이 아니며, 고정된 과거에의 고착과 무관하다.

고경호의 작품은 오래된 화석이나 유물같이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지만, 특정한 과거시제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라깡이 정의한 무의식처럼, 실재를 통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하려 한다. 그의 작품은 특정한 경험을 재현한 것과 거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관념에 의해 투명하게 구성된 것도 아니다. 메를로 퐁티는 ‘벽돌로 집을 짓듯 지각을 의식 상태로 짓고, 이런 자재들을 하나의 압축 물로 용해시키는 정신’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작은 테라코타 벽돌로 구축된 대상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또 다른 층위의 시공간적 흔적들로 뒤덮인다. 이 두터운 벽은 인간 또는 자연이 새겨진 존재의 집 일부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존재는 시간의 빛 속에서 이해’(하이데거)된다. 현존재는 현재를 넘어 과거 또는 미래의 시간성으로 투사되면서 자신의 유한성을 파악한다. [지각의 현상학]에 인용된 ‘시간은 삶의 의미sens이다’(클로델)라는 말은 고경호의 작품에 나타나는 바, 주체와 분리 불가능한 시간성을 잘 설명해주는 듯하다.

그러나 고경호의 벽에 나타나는 시간성은 흐르는 물로 대변되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갖지 않는다. 스쳐지나가는 바람 사이로 조우했을 법한 나무의 이미지에서도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기 보다는, 끝을 알 수 없는 기저 면에서 솟구쳐 오르는 듯하다. 나무의 존재 방식에 각인된 시간성 자체가 그러하다.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시간은 내가 기록하는데 만족하는 실재적 과정, 실제적 연속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과 나의 관계에서 탄생한다. 현재는 의식이 현재, 과거, 미래 사이에 정립하는 관계들에 의해서만 현전한다. 시간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의식이 시간을 전개하거나 구성한다. 고경호의 작품 속 시간성은 강물보다는 분수와 비교될 수 있다. 메를로 퐁티는 이러한 비유에서 물은 변화하나 분수는 그대로라고 지적한다. 분수는 물의 지속적 밀어내기에 의해서만 동일하게 남는다. 여기에서 시간은 용출되고 주체 또한 이러한 용출의 결과물이다. 흔적들로 뒤덮인 불투명한 덩어리들로서의 벽은 지향성들의 망을 이루는 시간과 접촉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