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영의 풍경화의 한 가운데에는 오후의 햇살을 가득 받는 나지막한 집이 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산촌의 집 근처에는 낟가리들이 듬성듬성 쌓여 있곤 한다.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이국적으로 보이기까지 한 이러한 풍경은 아직도 산골 어딘가에 남아있는 실제 풍경이면서도 작가의 추억이 가득 서린 원초적 시공간과 겹쳐진다. 그러나 정태영의 풍경화는 막연히 향토적 서정에만 호소하는 상투적인 그림과는 다른 분위기가 서려있다. 그것은 작가의 뇌리 속에 깊이 박혀있을 원초적 장면에 대한 강렬한 체험과 관련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올라온 작가는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다. 화가의 꿈이 시작된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었지만, 지금도 그의 그림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천진무구했던 그 시절이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산과 들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오던 추억은 그의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원형적인 체험이다. 물론 작가는 그것을 단지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그의 그림에는 노는 아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절에 보고 경험했던 상황들은 마음 깊숙한 곳에 무의식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무의식의 저장고에 더하여, 자연이라는 배경은 작품의 마르지 않는 영감의 근원이 되어 준다. 전 작품에 걸쳐 비슷한 소재로의 반복적인 회귀는 아직 생각하고 있는 것이 완전히 표현되지 않는 남아있기 때문이다. 정태영은 사라진 그때의 상황과 느낌을 다시금 표현하려 노력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오감을 촉수를 뻗는다. 황토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풍경에는 흙냄새와 거름 냄새, 밥 짓는 냄새가 풍겨 나오는 듯하다. 냄새는 가장 원초적인 감각으로, 특정한 기억을 활성화하는 강한 매개가 된다. 냄새는 단번에 과거의 한 시점으로 우리를 데려갈 수 있는 것이다. 공간감 또한 특이하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마을 풍경이 많은 그의 풍경은 통상적인 풍경화와 다르다. 그의 작품에서 풍경화의 주요 요소 중의 하나인 하늘의 비중이 높지 않다. 정태영은 2007년 문화일보에 쓴 에세이에서, 어릴 때 큰 감나무에서 내려다 본 마을의 전경에 대해 이야기 한다. 자연에 푹 싸여있는 마을의 풍경을 포착하는 시점은 동서양의 미술사적 전통과 더불어 이러한 자전적 체험에서 온 것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매순간 새로운 대지를 발견해 나가는 가슴 벅찬 소년의 시점인 것이다.

[삶-오후]라는 제목이 일괄 붙어있는 작품들은 삶의 터전과 흔적이 담겨있다. 작품 [삶-오후 I](2008)에서 그의 작품에서 예외적으로 정면 포착된 풍경에는 화면 상단의 1/6정도만을 차지하는 하늘과 높지는 않지만 웅장한 느낌을 주는 산자락 아래의 마을이 보인다. 작품 [삶-오후 I]는 하늘 한 조각 없이 화면 가득히 잡혀 있는 풍경으로, 작은 길 사이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이 있다. 작품 [삶-오후 II]에서는 화면 앞쪽의 길, 후경으로 사라지는 길이 강조된다. 한적한 오후, 추수가 끝난 들녘이라는 시간적, 계절적 시점의 선호는 노동과 활동 그 자체 보다는 그 흔적에 집중하는 것이다. 좁다란 길, 비탈진 밭고랑, 굴뚝 연기 등은 그 속에 사는 인간의 자취들이다. 흔적과 자취를 선호하는 것은 그의 풍경화가 이미 지나간 시간, 잃어버린 시간에 가까운 것임을 예시한다. 눈 쌓인 들판에서 나무 해오는 농부를 그린 [삶-귀로 II](2005)는 실제 인간의 모습이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작품 중의 하나인데, 나뭇짐을 지고 귀가하는 노인은 일회적인 사건의 묘사가 아니라, 변치 않은 삶의 패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연을 무대로 원초적 삶을 그리는 정태영의 작품 모델은 강원도 정선, 영월, 평창 등, 개발의 손이 닿지 않은 오지의 풍경들이다. 그의 실제 고향은 경주지만, 사실과 모델이 꼭 일치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늦가을 오후라는 시점에 내재된 고즈넉함은 극적인 빛의 처리로 집약된다. 이 빛은 삶 속에 내재된 고요와 신비를 예시한다. 그는 어린 시절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던 숭고한 빛의 기둥들’을 잊지 못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국의 풍경에서도 발견된다. 올해 노원 문화예술회관에서 전시된 작품들은 인도, 튀니지, 중국 등 오지 여행에서 건져 올린 것들로, 오후의 햇살을 받는 이국적 차림새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을 비추는 정오나 오후의 빛은 누추한 일상적 삶에 숭고함을 부여한다. 이국적 풍경 속에서도 발견되는 공통적 소재는 삶의 보편성에 무게 중심이 실려 있다. 작가는 어디에 가서도 고향의 풍경과 분위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빛은 장면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색은 자제되어 있어 많은 작품이 황토 빛 모노톤이다. 빛은 전체적인 분위기 뿐 아니라, 영원한 현재라는 찰나의 포착과도 관련된다.

정태영의 유화에는 자잘한 터치들이 많이 있는데, 화면에 리듬과 활기를 부여하는 색 점들은 실경산수의 점묘법이나 인상파의 영향을 보여준다. 작품 [삶-오후]는 점묘로 표현된 산들을 보여주며, 2007년의 전시작품인 [도라지 꽃]이나 [양귀비 꽃]은 화면 가득한 색 점이 화면이 특징이다. 그의 그림은 러시아의 리얼리즘이나 인상파 회화처럼,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환상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소박하지만 자족적인 우주를 이루고 있는 원초적 풍경은 낙원의 이미지와 관련된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이오네스코와 낙원의 향수]에서 동향(同鄕)의 작가 이오네스코가 미로와 낙원을 대립적인 위치에 놓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에게 미로란 지옥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여겨진다. 반면 낙원은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총체적인 구상의 세계이다. 정태영의 풍경 역시, 현대의 복잡하고 미로적인 삶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지도처럼 한 눈에 들어오는 삶의 터전은 늘 따스한 빛을 받고 있다. 빛으로 가득한 그 시공간의 체험은 되풀이 하여 상기하고 싶은 광경이 되었다. 그것은 원초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로, 행복과 충만감을 준다.

엘리아데의 책에 인용되는 예술가의 체험--‘어린 시절 어느 봄날에 저 황톳길에서 보았던 영광에 찬 변화는 곧 기적과 같은 것이었다. 불현듯 세계가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빛나기 시작하곤 했기 때문이다’--처럼 완전성이라든가 고요함, 명징성, 아름다움 등의 관념을 신비로운 빛의 현존과 연관된다. 이때 빛과의 조우에는 기쁨과 평정, 영원에 대한 확신 감, 절대적 진리 계시, 중력의 법칙에서 자유로워진 것 같은 느낌 등이 수반된다고 한다. 이러한 빛의 경험은 종교와 신비주의, 예술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정태영의 풍경도 비슷한 맥락에 놓여 있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이오네스코의 낙원도 그가 어릴 적 시골 마을에서 보냈던 시절의 체험에서 비롯된다. 그의 일기와 대화에는 끊임없이 저 잃어버린 아름다움에 대해 상기--‘그곳에서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현재 안에서만 살았다. 그리하여 삶 자체가 곧 기쁨이자 은총의 상태였다’--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길지 않으며, 쉽게 반복되지도 않는다. 상실된 낙원을 상기하려는 반복적 시도에서, 작품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한 격전지가 된다.

정태영의 풍경은 민초들의 삶이 담겨있는 구수한 고향 풍경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초월적이고 거룩한, 요컨대 이질적인 분위기를 가진다. 특히 그것은 우리의 일상을 이루고 있는 현대성과 차이가 있다. 거기에는 경건한 종교인의 방식처럼 세속적 일상과 단절되는 시공간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종교적 인간은 성스러움으로 가득했던 태초의 신화적 과거로 주기적으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그것은 직선적이고 진보적인 현대의 시간이 아니라, 순환적 시간과 관련된다. 역사보다는 신화에 가까운 이 영원한 현재는 현대인이 주기적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시간이다. 지금 여기와 단절되어 보이는 정태영 작품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려는 몸부림과 연관된다. 그것은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구체적인 사건의 재현에 한정되지 않는다. 작가는 단지 현재와 연속되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원형적 체험은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만 속해 있지 않다. 무엇인가에 대한 향수는 ‘규정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생떽쥐뻬리)이기 때문이다. 그가 작품을 통해 되찾으려는 것은 미지의 것이며 과거와 현재, 미래 모두를 향해 있다.

출전 : 미술과 비평 2009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