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비이성(광기)의 경계를 분명히 하려는 권력에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구별하는 선은 늘 분명치가 않다. 분리 불가능한 것을 분리하려는 의지는 예술을 광기에 귀속시키곤 한다. 합리주의가 지배적 가치가 된 현대 사회에서 예술은 비합리주의의 온상이자 근거지가 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와 구획 짓기가 예술에 꼭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성의 금기를 넘어서 무한대의 자유를 허용하는 듯하지만, 결국 광기가 통용될 수 있는 비좁은 해방구를 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상에서 우주적 차원에 이르는 거대한 삶의 맥락을 제도로 확립되어진 예술로 제한하는 것이다. 미셀 푸코의 책 [광기의 역사]는 이성이 지배가 확립되기 시작한 고전주의 시대에 광기가 구빈원이나 감호소로 감금되기 시작한 역사적 사건의 계보를 다룬다. 그것은 종교와 축제 등을 통해 삶과 밀접하게 호흡했던 예술이 작업실이나 미술관으로 한정되어 갔던 예술사의 계보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예술은 광기와 더불어 길들여짐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반항을 통해 동병상련의 처지가 된다. 필자는 푸코의 [광기의 역사]의 논지를 따라가면서 광기와 예술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후반에 가시화된 히에로니무스 보스(도1)나 페터 브뢰겔의 그림에는 광인의 항해라는 주제가 종종 발견된다. 보스의 [바보들의 배]는 당시에 널리 읽혀진 풍자적 연작시를 근거로 그려진 것이다. 월터 기브슨은 보스에 대한 연구에서 브란트가 출간한 [바보들의 배]에서 ‘온 세계가 어둡고 맹목적인 죄악이 끊이지 않고 거리마다 바보들로 가득하다’고 불평하였다고 인용한다. 여기에는 르네상스의 인간에 대한 낙관적 관념 보다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이 강조되던 중세적 태도가 내재되어 있다. 보스가 그린 [바보들의 배] 안에는 농부들과 술을 마시는 수도사와 두 수녀가 묘사되어 있다. 돛대로 사용되는 무성한 나무와 키로 사용되는 부러진 나뭇가지는 배가 어디로 항해할지 알 수 없게 한다. 오른 편에 앉아있는 광대는 인간의 광기를 전달해준다.
[바보들의 배]에 승선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인간을 지배하는 광기는 계급적 차이를 가리지 않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의 태운 배 자체가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축도처럼 보인다. 보스의 그림은 매우 환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다. 그리고 비판적이면서도 긍정적이다. 그의 또 다른 유명한 작품 [지상의 쾌락의 동산]처럼, [바보들의 배]는 인간의 악덕에 대한 일종의 사회비판이기도 하지만, 지상적 쾌락의 현실성을 강하게 긍정하면서 이를 감각적 색감에 실어 보여준다. ‘16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화가’로 칭송받는 페터 브뢰겔은 제 2의 보스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 [악녀 그리트](도2)에서 화면 오른쪽에 보이는 배는 당시에 유명한 테마인 [바보들의 배]의 모티프를 반복한다. 작품의 무대는 지옥이며 화면을 활보하는 늙은 노파는 지옥을 약탈하는 악녀로 그려진다. 지옥은 단지 환상의 산물이 아니라 현실의 축도이다. 투구와 칼로 우스꽝스럽게 무장한 노파는 자신의 여성성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미친 여자에 가깝다.
월터 기브슨의 연구에 의하면 중세와 르네상스의 희극 문학에서 통상적으로 등장하는 심술궂은 아내는 남성의 주도권을 빼앗으며, 지옥의 악마마저도 유린할 정도의 위세를 가진다. 속담집이나 그림에 나타나는 것은 지배적인 여성에 대한 혐오와 공포감이다. 중세 이래 육체가 이성에 종속하듯이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신이 내린 운명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러한 본성이 불안정한 여성의 자유와 쾌락은 공포를 낳았다. 브뢰겔의 생존 당시에 플랑드르 여성들이 누렸던 이례적인 독립성이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기브슨은 [악녀 그리트]가 그려질 때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스코틀랜드가 모두 여성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지옥 입구를 지나 앞뒤 가리지 않고 나아가는 악녀 그리트와 그 무리의 형상은 현실에 존재했던 자유로운 여성을 광기(히스테리)와 결합시키는 사고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보스나 브뢰겔의 작품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는 그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환상적 세계가 현실의 축도이며, 이 축도 속에서 광기는 세계로부터 명확히 분리되기 보다는 광범위하게 편재함을 알려준다. 이들의 작품에서 광인들은 작은 배를 타고 기착지가 불분명한 다른 세계로 향한다. 대양이라는 거대한 불확실한 장소로의 항해는 광인에 대한 그 시대의 집단 무의식을 담고 있다. 세계는 이편과 저편으로 나누어지고, 광인들이 탄 배가 향하는 미지의 그곳은 초월적인 면모를 가진다. 푸코는 르네상스 시대에 세계의 저편으로까지 광기를 팽창시켰던 상상력의 자유를 지적한다. 그러나 고전주의 시대(17세기)에 오면 광인들의 배가 사물들과 사람들 한가운데에 정박하여 움직이지 않게 고정된다. 고전주의 시대에 광기는 그 이전 시대처럼 세계와 세계의 숨겨진 형태들에 연결되어 있다기보다는, 인간 내부로 스며든다. 광기는 인간이 자신과 맺고 있는 미묘한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세계의 이편에서 저편에서 저편으로 주파하던 광인들의 항해는 사회 한켠에 감금의 장소에 묶이게 되었는데, 광인과 광기에 관한 환상은 감금의 장소에서 다시금 번성한다. 푸코에 의하면 이러한 수용의 역할은 부정적 배제였을 뿐만 아니라, 긍정적 조직화이기도 했다. 세계를 구제함과 동시에 규제하려는 이러한 욕망이 부르주아의 노동 윤리에 담겨있다. 광인들은 기이한 순례가 아니라, 대대적으로 수용되는데 비이성의 역사에서 수용은 결정적 사건, 말하자면 광기가 가난, 노동 불능, 집단 속으로의 통합 불가능성이라는 사회적 지평 위에서 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수용의 장소에서 의학, 도덕, 노동, 법 등은 서로 공조하여 광기를 순화 내지는 정화하려 한다. 수용된 광인들에게 부여된 노동의 의무는 윤리의 실천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이러한 수용제도를 통하여 도덕적 원칙의 차원에서 신체의 차원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열렸다.
그러나 자연 혹은 우주의 저편으로 떠나던 광인들이 인간이 만든 제도적 공간 속에 수용되면서 기대되었던 교화의 기능은 의문에 붙여진다. 수용의 장소에서 광기는 악화되거나 새로운 광기를 발생시킨다. 광인은 야만인이나 동물처럼 취급되었다. 그러나 푸코는 동물은 미칠 수 없거나 적어도 광기를 야기하는 것은 인간 속의 동물성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인간은 동물의 직접적 세계를 벗어나 인간의 주위에서 인간에 의해 구성된 반자연적 환경이 더 두껍고 더 불투명하게 됨에 따라 광기의 위험은 증가하는데, 문명은 매개현상을 늘려가면서 소외의 계기를 끊임없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그러하다. 인간적 현실이 중층적으로 매개됨으로서 소외와 압박이 시작된다. 이성을 무기로 자연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시작한 이성의 시대에 감금의 장소(도3)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히 꼬여있는 악무한의 이미지로 구현되곤 한다. 고립과 유폐, 그 안에서의 고통과 환희는 수용소에서의 광인과 마찬가지로 근대 예술에서 친숙한 이미지가 되었다.

2. 이성과 광기
문명은 자연의 직접성으로부터 벗어나 매개의 공간을 더욱 늘린다. 푸코는 프로이트를 따라, 문명은 일반적으로 광기의 확대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고 말한다. 이성은 광기를 대상화하면서 배제한다. 그것은 존재의 반대인 결여, 진실의 반대인 거짓, 질서의 반대인 무질서, 필연의 반대인 우연성 등은 이성에 대해 부정적인 것 전체를 지시한다. 부정적으로 정의된 광기는 열려있고 다양한 계열을 이룬다. 광인의 수용이라는 물질적 제도는 독단적 이항 분류법에 상응하는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에 광기는 한 지점에 모아진 비이성의 전부가 되었다. 광기는 이성의 부정적이고 텅 빈 형태로 분류되고 가시화된다. 광기는 다른 편에 있으면서 동시에 이성의 시선 아래에 있다. 다른 편에 있다는 것은 즉각적으로 파악되는 차이, 순수한 부정성, 비존재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배제의 논리는 역설적으로 소외된 상태로만 세계에 현존하는 광기와 이성의 은밀한 연관관계를 드러낸다.
비이성은 이성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 안에서 이성에 의해 포위되고 소유되며 사물화 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푸코는 17세기 초 자유사상은 생겨나고 있는 중인 합리주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성 자체의 내부에 비이성이 있다는 사실 앞에서의 불안이었다고 말한다. 광기의 이면이 이성이고, 이성의 이면이 광기라는 점에서 양자는 짝패의 관계를 가진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 한다’는 데카르트의 근대적 명제는 이성과 광기의 대립관계를 천명하며, 근대의 인본주의 또한 이러한 배제의 공간 속에서 탄생하였다. 이러한 경향을 미술제도 속에서 찾아보자면, 가령 고전주의에서 강조되는 이성으로서의 자연, 인간 등은 아카데미의 미학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다. 여성을 비롯하여 아카데미에서 누드 그리기를 배울 수 없었던, 그래서 결국은 미술이라는 제도에 편입될 수 없었던 타자의 이야기는 대안의 미술사에서 많이 등장하는 주제이다. 비이성으로 자리 매김 된 광기의 역사 단면에는 다양한 구조와 유형의 광기가 드러난다. 엄밀한 과학과도 무관한 이 영역은 그 풍부한 상징적 이미지로 인하여 광기와 예술 간의 내재적인 관계를 알려준다.
먼저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흔하게 광기와 유사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무의식이 의식의 지배를 벗어나는 꿈이다. 잠과 꿈의 복합이 명료한 깨어있는 상태로 옮겨오면 광기가 시작된다. 꿈은 시각적 이미지에 호소하는 미술에서 환상의 저장고로서, 낭만주의 이래로 근현대 예술사에 걸쳐 한 번도 간과된 적이 없다. 예술가의 기질과 관련된 광기로 가장 먼저 지적되는 것은 우울증(멜랑콜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멜랑콜리를 예술가의 이미지에 결부된 몽상적 슬픔이란 의미로 사용했으며, 이는 르네상스(도4)나 낭만주의에 다시 나타나곤 하였다. 조광증은 우울증의 반대편에 놓인다. P. 브르노는 [천재와 광기]에서 조광증 흥분을 정신작용의 신속한 언어유희, 횡설수설, 자연발생적 아이디어들의 연상 작용, 그리고 극도의 활동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상태라고 규정한다. 조광증은 흔히 동요와 흥분, 나아가 난폭함까지 동반하는 기질의 넘침과 열광상태를 나타낸다. 슬픔, 완만, 자기성찰은 자신감, 외향화, 낙관주의, 그리고 전능하다는 감정에 자리를 내준다. 아이디어들의 연상 작용은 쉽고 신속하고 독창적이고 비전을 지니고 있다. 우울증이 모든 것을 하나로 수용하는 고요한 물이라면, 조광증은 타오르면서 휩쓸려가는 불의 이미지를 가진다.

3. 광인의 감각과 언어
비이성의 자리에 놓여 진 광기는 마찬가지의 자리에 놓여 진 감각과 통한다. 그것은 대상과의 거리를 상실한 무아지경의 도취 상태로부터 예민한 차이를 감식하는 능력이 된다. 광기와 연관된 육감은 성, 동물성, 질병, 죽음 등의 이미지로 변별된다. 지옥 같은 상상적인 장면에는 이러한 이미지들이 복합적으로 등장하곤 한다. 성(性)은 금기로 둘러싸여졌으며, 그만큼 위반에의 충동이 빈발한 영역이다. 광기는 혼란된 성에 뿌리를 둔다. 이성애에 바탕을 둔 지배적 규범을 혼란시키는 것은 다형적인 성으로, 이는 광기와 연결되어 생각된다. 푸코에 의하면 고전주의 시대에 동성애자나 성병 환자는 광인과 한 무리가 되어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당시의 수용시설에 수시로 출몰하는 것은 일종의 동물성의 이미지이다. 광기는 짐승의 모습을 띤다. 광기에 동물성이 현존한다는 이러한 생각은 질병의 징후로 여겨진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늠하는 시선에서 반(反)이성이자 반(反)자연은 질병 및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광기는 인간에게 이미 도래한 죽음으로 간주되었다.
미치광이는 음산한 죽음의 전조를 내보이면서, 죽음의 주제가 광기의 주제로 대체(도5)된다. 문제는 변함없이 삶의 허무 이지만, 이 허무는 위협이나 종말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실존의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형태로 체험되는 것이다. 광기는 감각 뿐 아니라, 인식에도 관련된다. 푸코에게 광인의 앎은 금지된 앎으로 간주된다. 광기는 인간이 지닌 모든 사악한 것을 지배한다. 광기는 어떤 터무니없고 쓸데없는 지식에 대한 징벌이다. 과잉된 지식은 광기 속에서 전복된다. 종교나 예술에서 일종의 상상적 풍경이 극단화되었을 경우에도 광기는 앎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앎은 단순한 앎이 아니라 계시가 된다. 그래서 종교적 심성의 뒤를 근대예술은 광인과 예언가의 이미지를 중첩시켰다. 여기에서 광기는 이성의 긴 우회로를 순간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는 기민성을 갖춘다. 순간적으로 솟아오르는 반짝이는 광기의 언어는 순차적인 질서를 따라야 하는 현실의 언어와 차이가 있다. 광인의 언어는 명료한 논법이 아니라, 일종의 게임 규칙이라는 점에서 예술적 담론과 연관된다.
광인의 언어와 예술의 언어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할 때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은 정신분석학이다. 크리스테바는 [현실적 진실]에서 존재와 말Logos 사이의 내적인 의존(공명, 상호 의사소통)과는 다르게 말하는 주체와의 명백한 관계없이 제시되는 광인의 어법에 주목한다. 광인은 지배 사회의 질서가 아로 새겨져 있는 상징성을 벗어나려 한다. 인간은 언어의 습득을 통하여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기 정립을 시도한다. 그러나 광인의 언어에는 이러한 정립을 가능하게 하는 공통의 약호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의 이면에 있었던 광기나 신비, 예술에는 공통의 약호를 벗어나는 서사, 불가능을 이야기하려는 시도로 가득 차 있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이성의 이면에 있는 이 또 다른 현실에 대한 강박관념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문제이다. 정신분석학은 정신병을 언어의 진실에 대한 위기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의 위기는 광인들만 겪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지배적 상징으로서의 언어는 자식을 억압하는 원초적인 아버지의 질서(도6)가 아로새겨져 있다. 언어는 특히 19세기 모더니즘 시기에 위기를 겪는다.
계몽이 점차 변질되어 가 던 역사적 과도기에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는 그림을 그린 바 있는 고야는 충격적인 그림 [제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위기의 파열음을 표현한다. 그것은 또한 심한 병을 앓고 귀머거리가 된 화가, 요컨대 감금된 광기의 극단적 환상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광인의 언어는 이러한 부계의 질서에 대한 파기와 틈이 드러난다. 광인의 언어는 항상 뭐라 결정지을 수 없는 욕망, 다시 말해 불가능에까지 동요하는 언어에 가까워진다. 그것은 머리에 가깝기 보다는 육체에 가까운 언어이다. 예술의 언어 또한 육체적 충동을 직접 표출한다. 지시대상과의 인과적 관계를 벗어난 순수한 기표는 주체의 담론에 구멍을 뚫는다. 예술작품에서 종종 나타나는 순수한 기표의 진실과 정합적인 줄거리 없이 고립된 채 부유하고 이름붙일 수 없는 현실의 한 조각을 포획하곤 하는 광기의 언어에 조응한다. 광기나 예술의 언어에 나타나는 유동성은 동시에 주체의 유동성의 문제이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보편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주체의 중심을 벗어난다. 고정된 주체는 이제 과정 중의 주체가 된다.
정신분석학의 목표와 예술의 목표는 중첩되는 바가 있다. 새로운 또는 미지의 언어를 발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예술은 배제의 원리에 둔 정체성이 아니라, 타자를 포용하는 새로운 정체성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보편적 언어든, 광인의 언어든, 예술의 언어든, 소통을 추구하는 언어는 타자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진실, 또는 적어도 진실임직함을 추구한다. 광기는 환상과 현실을 근접시킨다. 정신분석학은 광기의 담론이, 허구 속에서 기호가 모든 객관적 증명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자기 고유의 상상적인 지시대상을 창조한다고 본다. 광인과 예술가의 명명방식은 자의적이지만 일관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들은 지배적인 상징질서에 의해 값비싼 희생을 치룬다. 자연 그자체가 아닌 복잡한 매개를 거쳐야 하는 사회와 언어의 메카니즘이 인간을 미치게 한다. 예술은 그러한 광기를 치유하거나 심화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양자의 언어가 완전히 동일시될 수는 없다. 예술의 언어에서 기호와 대상사이의 거리는 무한정 늘어나 있지 않다. 예술은 그 내부에서 수많은 주름을 잡아가며 유희하며, 자아는 타자들 중의 한 항목이 된다. 주체 내부에 이미 타자가 있기에 타자와의 소통에 섬세한 기술을 발휘하는 예술은 광기의 긍정성을 구현한다. 그리하여 예술은 광기의 침묵을 깨고 때로 동질성의 질서를 빠져나갈 수 있는 탈주로로서의 새로운 언어를 구축해 나간다.
출전 | 미술세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