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지하철의 사인 보드, 해변가의 풍경,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릴 듯한 술집 정경, 숲을 배경으로 앉아있는 벌거벗은 남자 등 일상적인 소재와 시사적인 프로를 방영하는 모니터 등 사회적인 주제가 어우러지는가 하면, 이미지와 텍스트 그리고 추상적인 기호가 상호 간섭하면서 공존하는, 암시적이고 관계적인 그림들을 보여준다. 이 일련의 벽면 드로잉은 향후 작가의 그림의 성격을 예시해주고 있다. 회화이면서도 드로잉의 성격이 강한 그림, 완결된 형식의 지점보다는 현재진행형의 프로세스가 강조되는 그림, 사유의 즉각적인 표출이 중의적이고 다중적인 의미와 함께 아이러니를 파생시키는 그림, 그 의미가 결정적이기보다는 비결정적이고 암시적인 그림,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의미와 관계가 생성되는 그림(사실상 드로잉의 특정성이랄 수 있는) 등을.
2008년 전시(일민미술관과 대안공간 루프)에서 샌정은 본격적인 타블로 작업을 선보이는데, 전작에서의 드로잉적인 특징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차이점이라면, 소재나 주제의식이 일상적이고 사회학적인 것에서 상대적으로 더 개인적이고 내밀한 경험을 표출하는 것으로 변화한 것이 눈에 띤다. 자기 외부로 향했던 시선이 자기 내면으로 향해 있으며, 무의식적 자아와 대면한 듯 보다 심층적이고 존재론적인 주제의식에 천착한 것이다. 이런 드로잉적인 성격이나 존재론적 주제의식이 이번 국제화랑 전시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세부적인 차이를 도외시할 때, 이들 세 전시는 보기에 따라서 같은 맥락에 속한 듯 보인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드로잉은 회화를 헐겁게 하고, 암시적이게 하고, 문학적이며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러한 시적인 느낌은 그대로 주제의식에도 반영돼 있다. 이를테면
그 표상형식은
그리다 만 듯한, 어눌한 듯하면서도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자연스러운 샌정의 그림은 그 이면이 비쳐 보일 듯 투명하고 맑은 색감이 어우러짐으로써 여백이 풍부한 울림을 암시한다. 여백은 단순한 공간적 개념이 아니다. 사물, 세계, 대상은 그 안에 미처 그 무언가로 이름 붙여지기 전의 비결정적인 성질을 함축하고 있는데, 여백은 다름 아닌 그 비결정적인 성질을 의미한다. 사물은 대상화할 수 있는 부분과 대상화할 수 없는 부분으로 축조돼 있는데, 이때 대상화할 수 없는 부분 즉 사물의 잉여와 여분, 결여와 결핍에 해당하는 오브제 a가 여백이다(자크라캉). 그리고 사물에 속한 자질이지만, 그 자체로는 규명되지 않는, 다만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규명되는 자질이다(메를로퐁티).
그리다 만 듯한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사물의 잉여와 여분을 드러내며, 타자와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그 실체를 포착할 수 있는 사물의 대상성을 암시한다. 사물과 사물의 개념은 다르다. 사물은 결코 사물의 개념으로 환원되지가 않는다. 작가의 그림은 친근하면서도 낯선데, 한눈에 그 실체를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사물의 개념을 확인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친근하나, 그 대상이 미처 개념화되지 않은 부분과 그 비결정적인 성질을 드러내고 암시한다는 점에서는 낯설다. 어쩌면 예술은 이처럼 사물에 내포된 개념화되지 않은 부분이나 개념화되기를 거부하는 성질 즉 사물의 본성으로서의 여백을 감각과 인식의 표층 위로 불러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여백은 관객과의 상호작용성의 계기를 향해 열려 있다. 작가는 그 여백을 의도된 결핍이라고 칭하면서, 관객들이 더 많이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게끔 화면을 더 많이 비웠다고 한다. 사물과 개념은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 나는 간격만큼 회화(재현)에 크랙, 균열, 구멍이 생긴다. 이로써 관객은 저마다의 이해와 해석을 매개로 그 경계를 넘나든다. 샌정의 그림은 말하자면 올이 굵고 헐거운 구조로 직조된 천과 같아서 그만큼 관객들이 개입하고 간섭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이다. 여백은 천의 올이 그런 것처럼 그림의 숨통 역할을 한다. 숨통은 막힘이 없어야 하고, 그림의 의미 또한 열려 있어야 한다. 그 의미가 열려 있을수록 그림의 암시력은 그만큼 더 커진다. 이때의 비결정적이고 암시적인 공간이 여백이다. 그리고 여백으로써 암시적인 의미를 전달해주는 방법이 드로잉이며, 이때 작용하는 계기가 우연성과 즉흥성이며 인상이다.

샌정의 그림은 회화이면서도 생리적으로 드로잉에 가깝고, 그 의미가 결정적이기보다는 비결정적인데, 이 모두가 여백에 대한 감각적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백은 침묵이 말로 생성되기 전의 침전호인 것처럼 이미지가 생성되기 전의 잠재적인 장이다. 그 존재적 자장이 잠재적인 것인 만큼 작가의 그림은 암시적이다. 이로 인해 그림 속 이미지는 그 실체감이 희박해보이고, 그 희박한 실체감마저 머잖아 휘발될 것처럼 덧없어 보인다. 특정의 대상이나 존재를 그렸다기보다는 존재가 한때 머물렀었을 흔적을 그린 것 같고, 찰나적이고 순간적인 존재의 인상을 그린 것 같다. 이처럼 순간을 그리고 인상을 그리는 행위는 어쩌면 존재의 흔적을 붙잡는 일이며 되새김질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그 자체 일종의 부재의 인식론에 의해 강력하게 뒷받침되는).
작가의 그림에는 이런 인상을 우의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대상이 있는데, 바로 여성이다. 그림 속 여성은 아마도 어느 정도는 작가의 개인사에 연유한 실질적 대상이면서, 이와 동시에 실질적 대상을 넘어선 우의적 대상으로 확대돼 보인다. 이에 대해 작가는 자연 앞에선 누구든 섬세한 감성으로 충만해지기 마련이며, 여성은 그 섬세한 감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여성은 말하자면 자연과 대면하는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존재의 결을 의미하며, 작가 자신의 서정적이고 수동적인 감정 상태(작가의 여성적 자아 즉 아니마)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작가뿐만 아니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든 자연(원형적 장)과 대하면 서정적이고 수동적이게 된다(말을 잃어버리게 된다). 자연은 침묵으로써 말을 아우르고 있고, 여백으로써 이미지를 감싸는 존재의 자궁(그로부터 말이 태어나고 이미지가 생성되는)이기 때문이다. 그 자궁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과 공기, 신화와 전설, 그리움과 향수 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은 은총(일종의 비의적 체험의 순간)이며, 아마도 그림 속 여성(나의 여성적 자아)은 새와 말과 같은 다른 소재와 더불어 그 미지의, 미답의, 미몽의 영역으로 인도해주는 메신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