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불현듯 과거 속으로 빠져들 때가 있다. 몸은 비록 현재의 시간대에 속해져 있지만, 의식만큼은 여전히 과거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불행인지 축복인지는 모르나 인간은 몸과 의식을 일치시킬 수도 있고 분리시킬 수도 있다. 이렇게 몸으로부터 분리된, 현실로부터 유리된 의식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일까.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것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흔치는 않지만 이처럼 유독 강하게 과거를 회상시키는 사건들이 있다. 내내 손길 한번 닿지 않은 채 먼지를 잔뜩 눌러쓴 책장을 정리하다가 책갈피 속에서 발견한 마른 꽃잎이 그렇다. 색 바랜 종이 위로 그 수액이 흐릿한 얼룩을 중첩시켜놓고 있는 그 꽃잎은 도대체 언제, 어떤 연유로 지금의 그 자리에 자리하게 된 것일까. 알 수가 없다. 기억해낼 수가 없다. 박제가 된 그 꽃잎은 분명 예사롭지 않은 사건, 설레는 사건으로 내 삶의 안쪽으로 들어왔을 터이지만, 도무지 그 사건을 복원해낼 수가 없다. 시간도 증발하고, 사건도 잊혀진 지금 불현듯 내가 대면하고 있는 그 꽃잎은 마치 나의 형해 같고 박제 같다. 그것은 증발해버린 나의 어떤 부분, 한때 나에게 속해져 있어서 나의 인격을 형성시켰을 어떤 부분에 천착케 하는, 복원할 수도 해석할 수도 없는 낯설고 생경한 기호며 수수께끼 같다. 한갓 마른 꽃잎에 지나지 않은 것이지만, 그것은 이처럼 결코 잊힐 수 없는 사건으로써 현재를 간섭하고 사로잡는다. 정작 돌이킬 수도 복원할 수도 없는 사건(과거)을 결코 잊힐 수 없는 사건(현재)으로써 각인시켜 놓고 있는 이 아이러니, 이 패러독스야말로 삶의 속성이지 않을까 싶다.

이 꽃잎을 보고 있으면 이 꽃잎으로 그림을 그릴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무엇이든 그림의 소재(재료)가 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발상은 아닐 것이다. 이 발상을 말 그대로 실천하는 작가가 전미경이다. 전미경은 마른 꽃잎으로 그림을 그린다. 아니, 엄밀하게는 마른 꽃잎뿐만 아니라 눌려서 말린 각종 식물류를 소재로 하여 이를 화면에 콜라주 한다. 자연으로부터 식물을 직접 채집해 이를 회화로 옮기는 식의, 일견 자연을 회화로 번안하는 행위에 비유될 수 있겠다. 이때 소재로 차용되는 식물은 그 종에 따라서, 그리고 그 부위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형태와 색채를 지니고 있어서 이를 이용한 회화적 재구성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작용하는 문법은 다분히 회화의 생리를 따른 것인데, 이를테면 채집된 식물류를 원형 그대로 사용하는 대신, 이를 자잘한 부분들로 해체해 작가가 머리에 그리고 있는 이미지에 따라 이를 재구조화하는 것이다. 해서, 화면 속에서 식물은 그 고유의 존재성 대신 회화를 위해 복무하는, 회화에 종속되는 형식을 취한다.



지금까지의 전개과정을 보면 대략 재현적인 화면에서 추상적인 화면으로, 재현적인 풍경에서 심의적인 풍경으로 변화해온 것이 확인된다. 재현적인 화면이든 추상적인 화면이든 풍경화가 주된 장르로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풍경화가 중심이 되면서, 간간히 전통적인 달 항아리를 소재로 한 것 같은 일종의 정물화로 범주화할 만한 경우들이 발견된다.

풍경은 작가의 작업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듯 크게 재현적인 풍경(전작)과 심의적인 풍경(근작)으로 갈린다. 이러한 구분은 세계와 주체와의 관계에 따른 것으로서, 처음에 주체는 세계의 감각적 표면현상에 천착하지만, 이후 점차 그 세계를 자기 내부로 불러들여 재차 내뱉는 과정을 거친다. 세계와 주체가 서로를 대상화하는 동떨어진 관계로부터 시작하지만, 이후 점차 그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서로의 지평이 상호작용하고 삼투되고 융화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해서, 종래에는 주관적인 풍경, 나의 풍경으로 부를 만한 지평이 열리는데, 그 지평이 열어 보이는 비전은 세계와 만나지는 저마다의 관계나 경험이 대동소이한 탓에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보편성을 얻는다. 특정 주체에게 속한 심상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공감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렇듯 작가의 그림(엄밀하게는 콜라주 된 화면)은 보통사람들의 보편적인 감수성을 건드려준다. 사람들이 저마다 머리에 그리고 있을 풍경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어떤 지점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 풍경은 비록 실제 하는 풍경에서 건너온 것이지만, 종래에는 실제 하는 풍경과는 동떨어진 풍경, 나아가 일말의 비현실성마저 포함하고 있는 풍경, 즉 심의적 풍경이란 점에서 일종의 유토피아의 외화로 볼 수 있다. 심의적 풍경이란 사실상 욕망이 그려낸 풍경이며, 욕망은 현실을 치장함으로써 부정하는(적어도 현실의 이미지는 현실 자체보다 아름다워야 한다는) 심리적 기제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결국, 풍경이란, 특히 심의적 풍경이란 일종의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를 마련하는 것이며, 따라서 작가의 그림은 우리 모두가 머리에 그리고 있는 이상향에의 욕망을 실현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이처럼 재현적인 풍경으로부터 심의적인 풍경으로의 변화는 말할 것도 없이 상당할 정도로 추상화되고 양식화된 화면구성에 대한 인식이 뒷받침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더불어 평면화의 경향성마저 두드러져 보이는데, 이런 조형장치들이 어우러져서 일말의 비현실성과 함께 내면적이고 관념적인 인상을 강화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다시 소재로 돌아가 보면, 근작에서 작가는 자작나무 껍질과 코스모스 씨앗 등을 차용해 이를 재배열함으로써 회화적 화면을 구축한다. 특히 자작나무 껍질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서, 그 껍질은 비록 한 종에서 채집된 것이지만, 여러 다양한 색감과 질감을 간직하고 있어서 화면을 다채롭게 해준다. 자작나무는 종이만큼이나 얇은 껍질이 겹겹이 중첩돼 있는데(이런 겹 껍질이 어떻게 왜 생겨났는지는 모를 일이나, 아마도 자연의 뛰어난 재생력이나 복원력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층위마다의 껍질의 색깔이며 질감이 다 다른 것이어서, 이를 재구성해 정적이면서도 관조적인 느낌의 유기적인 화면을 축조해낸 것이다.

이와 함께 근작에서 특히 주목되는 소재로는 코스모스 씨앗을 들 수 있다. 마른 코스모스 씨앗을 연이어 붙여 일련의 점선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문양이나 패턴을 재현해내고 있는데, 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나선형의 점선 문양이 수면에 이는 파문을 연상시키며, 마음속에 이는 동요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특히 이런 파문들이 모여 있는 이미지가 기의 운동성을 떠올리게 하며, 흡사 바느질로 한 땀 한 땀 수놓은 스티치를 연상시킨다. 그런가하면 코스모스 씨앗 자체는 <씨앗에게 말을 걸다>는, 작가가 부친 근작의 주제와도 통한다. 근작에서의 주제는 씨앗인 셈인데, 주지하다시피 씨앗은 모든 존재의 최소단위를, 모든 생명현상의 처음사건을 의미한다. 씨앗은 말하자면 그로부터 생명 있는 모든 존재가 유래하는 존재의 씨알인 셈이다. 파문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씨앗의 문양은 생명의 번짐 현상을 표상한 것이며, 가장 작은 미물로부터 가장 큰 생명이랄 수 있는 우주와 그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를 표상한 것이다. 특히나 코스모스 자체가 우주 혹은 질서(우주의 원리)를 의미하지 않는가.

작가는 이런 심의적인 풍경과 함께, 이따금씩 옹기종기 모여 있거나 저 홀로 동떨어져 있는 집을, 연못과 물가에서 노니는 물고기들을, 그 위로 하늘하늘 흩날리며 떨어지는 꽃잎들을, 그리고 공간을 부유하는 새를 포치해 정감을 자아낸다. 이 모티브들은 기본적으로 콜라주에 의한 것이지만, 작가는 이와 함께 일종의 태우기 기법과 금박을 덧입혀 화면에 다채로움을 더한다. 특히 태우기 기법은 모티브의 가장자리를 태워 거뭇한 라인이 생겨나게 한 것으로서, 이로 인한 선이 자작나무 껍질의 점선이나 코스모스 씨앗의 점선과 대비된다. 이와 함께 나무껍질의 목질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흡사 담채화와도 같은 투명하고 엷은 색조가 어우러져 감각세계 저편의 아득하고 아련한 향수를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