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선의 근작은 대략 안경을 오브제로 차용한 , 풍경을 소재로 한 도판작업 , 그리고 합(盒)으로 구별된다. 이 가운데 도판작업과 합은 이전부터 죽 해오던 작업을 변주한 것이며, 은 근작에서 새로이 시도되고 있는 작업이다. 지금까지 주로 추상적인 형태 속에 삶의 서정을 녹여낸 작업에 주력해왔다면, 근작에서는 그 삶이 상대적으로 더 구체성과 실체성을 얻는 형식으로 변화해오고 있음이 확인된다.

People in People. 사람 속에 사람이 있다. 내 속에 네가 있고 네 속에 내가 있다. 주체란 타자를 전제한 개념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타자 없는 주체가 있을 수 없고 주체 없는 타자가 있을 수 없다. 연작에서 최홍선은 타자와의 소통을 꾀한다. 여기서 타자는 말 그대로 타자이면서, 동시에 작가 자신의 무의식적 자아이기도 하다. 결국 이 작업을 통해서 작가는 타자와 만나고, 타자를 통해서 본 자기 자신과 만난다. 이 과정을 작가는 자전적 기억이라고 부른다.

작가는 이 작업에서 안경을 오브제로서 차용한다. 여기서 안경은 말할 것도 없이 본다는 것의 의미와 알레고리를 위해 차용된 것이다. 보는 것은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보는 동시에 보여지는 대상(세계)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탐색하는 종합적 인식행위인 것이며, 이로써 대상(세계)을 자기 내부로 불러들여 자기화하는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프리즘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인식한다). 작가 역시 자기만의 세계관, 우주관, 자연관, 인생관, 예술관이 투사된 안경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그런데 그 관념이 엇비슷한 탓에 작가의 작업은 보편성을 얻고 쉽게 공감을 끌어낸다.

먼저 도자기로 다양한 형태의 안경을 주조한 연후에 그 안경의 전면에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의 모습을 중첩시킨다. 산책하는 사람, 어깨에 가방을 멘 채 어딘가로 종종걸음을 걷고 있는 사람, 멀리 내다보고 있는 모자를 눌러쓴 사람, 아마도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반갑게 손을 흔드는 사람, 손동작으로 하트모양을 그려 보이는 연인 등등 세상사는 모습이 스틸화면으로 순간 포착돼 있다.



그 표현방식을 보면, 세부묘사를 생략한 채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정작 그가 어떤 포즈를 취하고 있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져 있는지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세부가 지워진 실루엣 형상만으로 축약표현된 것이지만, 그 그림자의 빈 자리를 암시력이 채워주는 것이다(정보와 암시력은 반비례한다). 이렇게 작가는 최소한의 가장자리 선만으로 사람형상을 표현하는데, 연이어진 점선으로, 그리고 상감기법을 적용해 표현한다. 거의 (반)기호화된 형식도 그렇지만, 특정인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불특정다수의 익명적인 주체들을 소재로 한 것이다. 실제로도 작가는 이 일련의 사람형상을 잡지와 같은 일상적인 미디어에서 임의로 발췌한 이미지를 단순화시키고 양식화하는 과정을 거쳐 작업 속에 끌어들인다. 이로써 오히려 누구든 주변에서 흔히 볼 법한 보통 사람들의 삶의 초상이 그려지는 것이며, 이로 인해 보편성과 공감대를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점선으로 묘사된 사람들에 비해 상감기법으로 묘사된 사람들이 아무래도 작가와 좀 더 친근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는 있다. 주지하다시피 상감기법은 도판에서 묘사하고자 하는 부분을 파내고 다른 색깔 있는 흙으로 그 부분을 채워 넣는 식이며, 따라서 그 기법이 단순한 재현을 넘어 일종의 각인(새겨 넣는)으로 부를 만한 상대적으로 더 확고하고 견고한 방식이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사람들은 우선은 익명적 주체들이며, 다르게는 작가 자신과 타자들과의 관계를 암시한다. 즉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서 보통사람들의 세상사는 다양한 장면들을 포착해 보여주고 있으며, 개인적으론 작가 자신과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단순히 작가에게 머물지가 않고,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라고 하는 우리 모두의 주제의식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이처럼 안경을 오브제로 차용한 작업이 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더 스케일이 큰 군상작업도 있다(안경작업에선 기껏해야 한 두 사람 이상을 담아내기가 어렵다). 철판에다 아크릴을 칠해 보드를 만들고,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의 모습을 주조한 도자기의 뒷면에 고무자석을 달아 철판에다 부착한 것이다. 안경작업이 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말을 걸어온다면, 보드 작업은 좀 더 일반적인 경험의 층위에 호소한다는 점이 다르다.

한편으로 보드작업은 고정된 것이 아닌 탓에 관객들이 임의로 사람형상을 떼었다 부쳤다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상호작용성의 개념이 적용되고 있다. 임의로 그 위치나 상황에 개입하고 조작하고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관객들은 저마다의 상황을 재현해볼 수 있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꾸며낼 수가 있다. 말하자면 보드에 부착된 사람들은 일종의 연극무대에 출현한 배우들이며, 그 배우들의 연기를 지휘함으로써 삶의 다양한 장면들을 연출하고 극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보드작업에서 관객참여는 단순한 기술적 장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론 이를 통해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라고 하는 존재론적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그 관계란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임을, 그리고 나아가 자기가 만들어가는 것임을 주지시킨다(관계의 비결정성).



Landscape - as free as the wind. 작가는 도판에다 일종의 풍경을 재현한다. 비록 풍경을 재현했다고는 하나, 정작 화면에는 선하나 달랑 그어져 있는 것이 고작이며, 때에 따라선 그 단출한 선 하나조차도 없는 화면(도판)도 있다. 음각으로 표현된 그 선은 아마도 산등성이나 능선일 것이다. 화면을 아래쪽과 위쪽으로 분절하는 그 선은 이렇듯 때로 땅과 하늘을 가름하는 지평선이 되고, 이따금씩 산과 하늘이 맞닿는 공지선이 된다. 그런가하면 이 도판들 하나하나는 각기 독자적인 풍경이면서, 이것들을 일렬로 이어붙이면 옆으로 긴 또 하나의 풍경이 된다.

이렇듯 선 하나로 풍경을 대신한 이 도판작업은 풍경 자체를 재현했다기보다는 풍경이라는 관념을 표상하는 풍경, 관념적인 풍경이며 추상적인 풍경이다. 그리고 제목처럼 바람만큼이나 자유로운 풍경이다. 바람은 막힘이 없고 모든 곳에 분다. 그 바람이 풍경의 세부를 실어가고, 풍경임을 암시하는 최소한의 관념(혹은 표상)만을 달랑 남겨놓았다. 그리고 원래 세부가 있던 빈 자리를 여백으로 채워 넣는다. 여백은 단순한 공간적 개념이 아니다. 모든 사물, 세계, 대상에는 인식의 안쪽으로 불러들일 수 없는 영역이 있는데, 그 부분에 붙여진 이름이 여백이다. 인식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무엇이며, 따라서 모든 여백은 어느 정도는 존재론적 여백이다. 작가는 이렇듯 단출한 선 하나와 여백만으로 암시적이고 함축적인, 관념적이고 존재론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합(盒). 합은 굳이 용기로 쓸려들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 크기나 형태가 아무래도 생활자기로서보다는 관상용으로 제작된 것이며, 그런 만큼 실제 용도와 기능으로서보다는 이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다른 관점, 이를테면 심미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이런 관점(심미적 관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합은 구조적으로 그릇과 뚜껑이 합쳐져 한 짝을 이루는 것이며, 그 자체가 나와 너, 주체와 타자의 관계로부터 비롯된 무수한 관계들(혹은 관계형성)을 암시한다. 그리고 위압적이지 않을 만큼 적당히 큼지막한 크기와 텅 빈 구조가 비우기와 담기(실질적인 의미로서보다는 일종의 마음의 그릇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이해해야)의 양가성을 암시하며, 공, 허, 무와 같은 동양의 전통적인 가치론적 개념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를테면 충만하면서도(공) 허허로운(허), 존재가 유래하고 귀속되는 근원(무)으로서의 크고 넉넉한 세계와 대면케 한다.

어떤 합이나, 합의 뚜껑 가운데 부분에 오롯이 앉아있는 새나 물고기 형상(아마도 손잡이에 해당하는)에는 그 표면에 마치 곰보처럼 잔구멍들이 나있는데, 이를 통해 작가는 안쪽과 바깥쪽이 막혀있으면서 서로 통하는 일종의 이중구조 내지는 통구조를 실현한다. 아마도 발과 창호문을 통해 외계를 관상하면서 동시에 내부와 단절시키는 전통적인 미의식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구멍들은 호흡이 드나드는 숨길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종의 유기체적 우주관에 의해 뒷받침되는 그 의미는 아예 <호흡>(Breathing)으로 명명된 일련의 다른 작업들에서 본격적으로 개화한다. 그 형태를 보면 크고 작은 알 같기도 하고, 변형된 표주박 같기도 하고, 뇌나 태반 등의 무슨 장기 같기도 하고, 이도저도 아니면 그저 비정형의 자갈이나 돌멩이 같다. 이 작업들에는 그 표면에 어김없이 자잘한 구멍들이 뚫려있는데, 말하자면 형태가 그 구멍을 통해서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구멍 뚫기는 어쩌면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일 수 있는 동화(나와 너, 주체와 타자, 안과 밖이 서로 내통하는)를 의미하고, 호흡(흙은 숨을 쉬고, 그 흙을 질료로 한 작가의 작업 역시 숨을 쉰다)을 암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