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에도 무려 만여 건에 가까운 크고 작은 전시들이 갤러리, 대안 공간, 미술관, 공공장소 등 다변화된 전시공간에서 열린다. 그중 상당수가 개인 돈을 들여서 개인의 세계를 표현하고 개인적인 경력에 몇 줄 보태면서 때로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는 경우이다. 개인적으로 진행된 전시와 더불어 상업 화랑이나 이런 저런 명목을 내걸고 작가를 모으는 공모전 같은 제도는 이러한 흐름에 합류한다. 이러한 전시들에 대한 작품에 대한 담론도 ‘작가만의 개성적인 표현’이나 ‘뛰어난 솜씨’ 등에 맞추어지면서, ‘매우 훌륭하다’는 식의 비평 담론의 연성화가 만연하게 된다. 왜, 어떻게 훌륭한가에 대한 구체적인 논증 과정은 생략된다. 전시가 개별 작가의 잠재적 가능성이 발현되는 중요한 장이기는 하지만, 사적이고 상업적인 동기를 초월하지 못하는 한계 속에서 객관적인 비평 담론이 조성되기는 힘들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름대로 힘들게 작업했는데, 보태준 것도 없이 비판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류의 전시에서 흥행은 각급 매체에 대한 작가와 화랑의 섭외 능력에 좌우될 뿐이다. 그러나 지난 십여 년 동안 자리 잡은 대안 공간이나 공적인 전시지원 제도에 힘입어 막 화단에 발을 내딛은 새내기 작가들조차도 전적으로 자비만으로 전시를 진행하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지원제도의 확충은 그동안 등한시되어온 문화의 공공성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서 공공성이란 지원 및 선정 작가들이 공공미술을 해야 한다거나, 작품에 공익적 가치관을 담아야 한다던가 하는 의미가 아니다. 공공기금이 집행되는 전시는 이미 공공영역에 속하게 되며, 그 영역에서 요구되는 것은 대중과의 성공적인 소통이라는 것이다. 물론 각 분야가 전문화되고 있으니만큼 대중도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미술 대중으로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공공기금에 의해 운영되는 지원제도는 ‘작가만의 개별적인 세계’ 에 더하여 미술 대중과의 소통능력을 중요해 진다. 소통 능력은 작품에 부가되는 어떤 외적 측면이 아니라, 작품의 내용과 형식 그 자체에 내재된 질적 요소이기에 중요한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전시회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 지원서를 작성하고 심사를 받고 하는 과정에서 작가 또는 기획자는 끊임없이 공적 언어로 자신을 검증해야만 하는 절차를 받는다. 이러한 층층의 객관적 검증 과정은 작품 외에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에 익숙하지 이들에게는 힘든 과정일 수도 있지만, 부차적일 수도 있는 그러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작품이나 작업에 대한 논리가 튼튼해 질 수 있다. 물론 형식만을 중시하다 보면 작품은 부실하고 기획서만 그럴듯한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은 전시를 주최하는 제도적 기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 왜 이 공간에서 이러한 작가와 작품을 선택했는가하는 것들이 분명해 질 때, 다른 전시 및 공간들과의 차별성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각급 지원제도의 차별성이 얼마큼 담보되고 있는가는 회의적이다. 그래서 준비도 없이 무작정 지원서를 넣고 보자는 부류가 생겨나고, 지원 받으면 하고 못 받으면 안하는 식, 아니면 똑같은 기획서로 여러 지원금을 동시에 받는 경우도 생겨난다. 각 지원기관의 선정 기준이 모호해질 때, 개성적인 신진작가의 전시 기회는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축소된다.

요즘은 변화된 매체환경에 의해 신진 작가들도 매체에 많이 오르내린다. 그러나 이러한 오르내림이 정확한 비평적 평가와 병행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름이 알려진 신진작가는 선정에 있어 유리해질 수도 있고 불리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의 면면을 자료를 통해 접해야 하는 심사과정에서, 이미 활발한 전시활동을 통해 작품이 알려진 경우에는 비평적 판단이 상대적으로 빨리 설 수 있다. 이번 심사에는 그동안 이 공간이 쌓아온 방식대로 실험적인 젊은 작가의 전시를 우선시 했지만, 그동안 진행했던 좋은 전시 및 프로그램이 미술 대중들에게 많이 공유되지 못했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름이 알려진 젊은 작가들도 배제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 몇 년간 미술시장의 붐으로 상업화랑에서조차 젊은 작가들을 우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대안공간이 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할 역할에 역행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절충이 일부러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후보 작가들은 자기만의 언어가 정리 되어 있지 않아서, 이들의 작품은 실험적이기 보다는 파편적으로 다가올 뿐이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기획서 안에는 ‘파편적’ 현실, 주체, 역사, 사회 등의 표현이 적지 않게 발견된 바이다. 작품이란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펼치고 접히고 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 논리가 발전하고 정리 되어야 하는데, 펼치기만 하고 추스르지를 못하는 경우이다. 아마도 젊은이 특유의 과도한 표현 욕구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되며, 다시 기회를 찾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만의 논리가 가다듬어질 것이라 본다. 이름이 다소간 알려진 젊은 작가라 할지라도 새로운 작품을 시도하는 경우, 기존의 것과 연결되지만 심화된 작품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되는 이들은 ‘신진’이라는 기준에 얽매여 역차별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일부 작품이 알려진 작가라 할지라도 이 공간에서의 전시는 또 다른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다시 출발하는 인사미술공간에 대한 기대치와 관련 된다. 현대미술은 젊음과 실험을 지나칠 만큼 우대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의 제도적 공간에서 그러한 가치가 활성화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대안 공간들 못지않게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느라 애쓰는 상업화랑에서는 내용적으로 적당히 새로우면서 형식에 있어서 세련됨과 기술적 숙달이라는 당의정을 입히려하며, 많은 작가들이 이에 부응했다. 상업 화랑의 젊은 작가에 대한 관심은 작품의 다양화를 낳기 보다는 쏠림 현상을 낳았다. 몇 년 사이에 옥션이고 어디고 간에 ‘주목해야할 젊은 작가’들로 넘쳐났지만, 몇 사람이 그린 양 비슷한 작품들만 눈에 띌 뿐, 진정한 다양성을 찾기 힘들었다. 상품으로 포장되기 쉬운 순응적 작품들이 양산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상업주의적 쏠림현상이 심한 현재의 미술문화 풍토에서 다양성의 씨앗을 뿌리는 역할이 문화의 공공성이 구현될 지점이다. 특정 공간을 중심으로 하는 전시 지원은 다른 공공기금과는 달리, 맥락의 일관성--전시와 비평의 공공성에 대한 기준이 정립되고, 그 기회가 확충되는 계기를 말함--이 유지될 수 있다.

특히 몇 년간의 미술시장 붐은 비평과는 무관하게 진행된 현상이다. 굳이 주목받는 담론이란 것이 있었다면 미술 시장분석 정도일까. 대안공간의 확충으로 글쓰기를 겸비한 젊은 기획자들이 늘어나면서 기성의 평단이 적지 않게 무력화된 바 있는데, 미술시장의 붐은 그 뒤를 이은 두 번째 충격파라 할 만하다. 위작 시비 등에서 알려진바 있듯이, 돈 문제가 걸려 있으면 비평적 담론은 소모전적인 논쟁에서 헤어 나오기가 어렵다. 좋은 경우이든 아니든 이러한 도전들은 매너리즘에 빠져 ‘비평의 죽음’을 자초한 기성의 평단에 자극제가 되었다. 이러한 미술문화 환경을 생각할 때, 비엔날레 급의 대형 전시가 자주 열리는 한국에서 화단의 정치적 논리에 휩쓸리지 않고, 작지만 내실 있고 순발력 있게 젊은 작가들의 감수성과 실험을 고무하고 지지해주는 대안 공간에 대한 기대가 크다. 또한 이러한 공간은 많은 인적 자원들이 집중되는 곳이니 만큼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함으로서 비평적 담론도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내실 있는 문화의 공공지원 제도는 비평과 창작 모두를 사적 영역--권력의 사유화를 포함하는--으로 부터 탈출시켜줄 것이다.


출전 | 인사미술 공간 사업개선을 위한 토론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