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종석은 자신의 작품이 저항적이라고 항변하며, ‘저항미술 성명서’까지 발표한다. 그의 저항의 대상은 ‘사회, 작가주의, 재료학, 상품성, 안락함’ 등이다. ‘인간을 탐구하며 사회에 저항 한다’는 주장이다. 보통 저항적 예술은 적을 분명히 하고 이를 물리치기 위한 단일대오를 위한 조직이 필요하기에, 합리주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온통 비합리적인 힘으로 가득하다. 주장과 현실 사이에는 간격이 있는 것이다. 저항의 집단적 주체가 분명치 않고 형식은 갈갈이 흩어져 있다. 그가 ‘도그마’로 선언하는 10가지 서약--예를 들면 ‘반드시 인간을 주제로 한다’는 등의--은 스스로 주장하듯이 객관적인 의미 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책임일 뿐이다. 보통 선언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현실보다는 당위를 포함하고 있기에, 다소간 과도한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육종석은 작품과 선언문을 통해 사회를 비판하려 하지만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작품은 차갑게 굳은 현실을 뒤집어엎고 뒤섞으려는 무정부주의적 충동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무의식과 육체까지도 남김없이 코드화하려는 현대사회에서 저항은 비합리주의적 수밖에 없다고 항변하는 듯하다. 전위주의를 비롯하여, 지나간 수많은 저항적 태도들이 그러했듯이, 이성은 곧잘 지배적 권력으로 변하기 때문일 것이다.
윤소연의 그림에는 작업도구와 소비품들이 뒤섞여 있다. 보통은 작업실과 일상 공간이 나뉘어져 있고, 이를 물리적으로 나눌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심리적인 경계선이 있게 마련이다. 그녀의 그림에는 그 경계가 와해되어 있고, 실제 공간의 재현이라고 할 작품 공간은 갖가지 소비품으로 잠식되어 있다. 쇼핑 중독자가 아니더라도 익숙하게 되어버린 이러한 일상풍경은 현실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영이다. 우리에게 상품사회가 도래한지는 꽤 되었지만, 소비 품목이 흐드러지게 넘쳐나기 시작한 때는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가동되면서 거대 노동력을 제공하기 시작한 근 10여년 사이의 일이다. 특히 윤소연의 작품에 많이 나오는 옷이나 구두 같은 품목들이 그렇다. 작품에 범람하는 장식적 물건들에는, 원래 의상 디자인과를 가고 싶어 했던 작가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다. 그녀는 ‘쇼핑을 통한 치유’를 언급하면서, 작품에 그리고 싶어서 쇼핑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고 말한다. 액자의 틀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담아두는 시각적인 금고’(존 버거)를 넘어서, ‘캔버스가 쇼핑백’(윤소연)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갖고 싶은 상품의 목록만큼 그것을 다 재현하기는 힘들 것이다. 상품이 만들어지는 속도와 작품이 만들어지는 속도는 다르기 때문이다. 갖고 싶은 것을 다 살 수 있을 만큼 지불 능력도 따라갈 수 없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의 일상을 솔직하게 베껴내는 작업을 통해, 현대적 삶이 생산과 소비 사이에 벌어진 괴리를 드러낸다. 작업을 포함한 삶은 그 괴리를 좁히려는 욕망에 의해 추동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윤소연의 2000년대 초기 작품은 생활하고 있는 실내 공간을 미세하게 떨리는 화면으로 전치하여, 고정된 일상에 움직임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작품 [무대 위의 일상](2003)에 드러나듯이, 공간 속 거주자는 서서히 연극배우 같은 느낌으로 변화한다. 세상이 점차 아름다운 세트장으로 변화하는 만큼, 인간 역시 수시로 변장하는 배우가 되는 것이다. 옷, 가방, 신발 같은 소비 품목에 사람의 흔적을 보여주거나 물건들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통해 사람의 존재를 예시한다. 갖고 싶을 정도로 생생하게 재현된 물건들에 비해, 흐릿하게 처리된 인간 의 실루엣은 상품에 비해 부차적 지위를 가지는 인간을 표현하는 듯하다.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존재는 상품으로 구조화된 체계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미소한 매개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또 다른 자연이 되어버린 자본주의의 문화적 유전자는 매우 ‘이기적’이어서, 인간을 도구화시키며 자율적인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경향이 있다. 정말 필요하고 쓸 수 있는 물건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체계는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는 목적도 없고 끝도 없는 욕망을 부추킨다. 어쩌면 그것은 작업 자체를 이끄는 끝없는 욕망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작업과 소비 지향적 삶은 분명히 다르다. 그것은 자신이 주도하는 것과 끌려다는 것의 차이인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양자 간에 선택해야하는 순간이 온다. 윤소연은 자신의 작업이 앞으로는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 쪽으로 경도될 것이라고 말한다.

전윤정의 2000년대 중반 작품은 노트 모서리에 아무 생각 없이 죽죽 그은 낙서 같은 드로잉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처 없이 그어진 선들을 통해 갈등과 권태, 무의식 등이 전사되었다. 그러나 종이와 펜만으로 그려진 이러한 드로잉들에 대해, 한 전시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비슷한 부류의 작품을 많이 보고 자극을 받았다고 함--캔버스 위에 검정 라인 테이프로 드로잉 하는 스타일로 변화한다. 작가에 의하면 라인 테이프 드로잉은 펜 드로잉에 비해 감정 표현이 더 절제된다고 한다. 그것은 필기도구에 비해 쓰기가 매우 불편하다. 0.2mm 되는 가는 테이프를 잘라 붙인다. 겹겹이 붙인 테이프는 도톰하게 올라가면서 시각적인 환영을 넘어 물성을 획득한다. 캔버스 틀 안에서만 쌓은 것을 넘어서 확장된 공간으로 나아가서, 공간에 직접 선을 쌓아 붙이기도 한다. 쌓으면서 발생하는 물질적, 육체적 에너지는 시각적인 환영을 넘어선다. 이렇게 완성되는 벽화들은 평면 위가 아니라, ‘직접 벽에 들어가는 작업하는 느낌’을 준다. 연극적으로 연출된 공간은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개인의 방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심리적이며 육체적인 공간이다.
가늘게 그어진 펜 드로잉은 떨어진 머리카락 같은 느낌을 주듯이, 라인 테이프 드로잉 역시 어떤 육체적 단편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휙 지나가면서 본 정체불명의 검은 물체 같은 실루엣을 가지고 있다. 차에 여러 번 치인 야생동물의 사체 같은 불길한 검은 파편이 떠오른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파편이란 죽음을 연상시킨다. 전윤정의 검은 형상들은 심리적이며 육체적인 단편들이다. 명확한 형태와 생동감 있는 색채를 포기함으로서, 죽음과 분열의 이미지가 압도한다. 이 드로잉은 구상이 아니듯이 추상도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매우 구체적이라고 한다. 그것은 주체나 객체의 반영이나 재현, 표현은 물론이고, 추상도 아닌 것이다. 이 작품들에서 파편은 사회, 역사, 주체라는 전체의 일부로 자리 매김 되지 않는다. 전윤정은 ‘나를 표현 한다’는 것이 지리멸렬하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감정 표현에 집착하는 나를 거부’하면서 양식을 바꾸어 나갔다. ‘작가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이 대목에서, 관념적인 의미의 ‘나’--요컨대 인간이나 예술가를 포괄하는 주체의 개념이나 그 연장선상에 있는 휴머니즘의 문화--는 사라지고 주체와 대상의 경계가 불분명한 가운데 다가오는 모호하지만 강렬한 경험만이 남게 된다.
라인 테이프 작업은 펜 드로잉에 비해 환영보다는 실제 공간에서의 연출이 더 중시된다. 폐허에 홀로 선자가 느낄 법한 이러한 현존의 체험은 현재 고립된 공간에서 작업하는 생활과 관련되어 있다. 옛날에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갈등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작품의 내용이었는데, 지금은 고립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산 속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밤과 낮이 뒤바뀌는 생활 속에서 발견한 이미지들이 라인 테이프 드로잉으로 되살려진다. 전윤정은 진짜 밤하늘은 하얗고 말한다. 캔버스의 하얀 바탕이든, 하얀 벽이든 작품 속 화이트는 완전히 전도된 사고방식에서 태어난 무한 공간이다. 이 밑도 끝도 없는 공간 속에서 어둠이나 그림자들이 척척 겹쳐지는 듯한 이미지가 탄생했다. 여기에서는 어둠이나 그림자 같은 네가티브 공간이 더욱 활성화 되었다. 그것은 강렬한 감정의 상태이며 물질의 원초적인 상태이기도 하다. 바깥의 공간에서 작업하는 전윤정의 작품은 고립을 통해 비로소 타자와 가능해진 소통이라는 예술의 본원적 존재 방식을 보여준다.
여경섭의 작품은 먼지로 이루어져 있다. 먼지로 연출된 풍경, 역사적 장소와 먼지의 조합, 명화를 먼지로 만든 것 등이 있다. 먼지라는 존재방식에 걸맞게 미니어처나 무대 세트 같은 형식이다. 종교와 역사적 모티브와 얽힌 먼지는 이데올로기와 정치에 대해 말하고, 천사 같은 허구적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은 동화적이다. 먼지란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입자이기에, 재료 자체의 속성이 반 기념비적이다. 그의 작품에는 먼지로 만든 피라미드, 남대문, 자유의 여인상 등 동서고금의 대표적 기념비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먼지의 반 기념비성에 대한 역설적 표현이라 생각된다. 수많은 작품에 필요한 먼지들은 자기 집에서 청소기로 모으거나 빌려온 것, 심지어는 선물 받은 것도 있다. 대상의 표면에 서서히 쌓여가는 먼지는 처음부터 잘 보이는 것은 아니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은 무엇인가를 기념하기 위해 수많은 수직적 기념비를 만들어왔다. 그것은 중심과 주변을, 위와 아래를, 안과 밖을 구별하는 담론 구조에도 그 흔적을 남겨왔다. 그러나 여경섭이 취하는 먼지의 존재방식인 수평성은 죽음을 연상시킨다.
눈 덮인 세상에서 경계와 구별이 사라지듯이 하얗게 쌓인 먼지는 수직적 위계질서를 와해시키는 요소이다. 이러한 해체적 존재는 살아있는 존재라면 당연히 죽음을 몰아내듯 없애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된다. 삶의 잔여물이며, 모호하게 퍼져있고 불확정적인 존재방식을 가진 먼지를 작품의 소재와 주제로 삼음으로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주로 먼지로 연출된 장면을 사진으로 완성하는 그의 작품은 역사부터 동화에 이르는 방대한 서사적 스케일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개되는 이야기는 아웃 포커스로 처리되어 있다. 어떤 이야기이든 먼지 속에 녹아 들어가 먼 풍경이 되고 만다. 여기에서 작가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말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후기 구조주의 계열의 비평가들이 주장하듯, 그것은 예술적 담론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먼지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고 핵심이 없다. 또한 그것은 사회와 육체의 경계를 오염시키는 존재로 삶을 위해서 경계 밖으로 몰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먼지는 자체의 본질이나 궁극적인 의미는 없이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주변적이고 기생적이며, 잉여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이 부차적인 존재는 자명한 듯 존재하는 현실의 자기동일성을 서서히 와해시킨다. 작가는 모든 존재가 먼지로 덮여지는 시간의 흐름을 작품을 통해 초고속으로 압축시켜 보여줄 뿐이다. 그의 작품에서 먼지가 전면화 되면서 관객이 깨닫게 되는 것은 인간이나 지구 자체가 우주의 먼지가 응집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동일성 자체가 타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자신과 세상, 역사와 동화를 먼지로 이야기하는 작품의 주된 방식은 사진으로 완성된다. 사진은 먼지와 같이 일시적인 것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먼지 입자가 보일정도로 확대된 사진은 또 다른 수직적 구조가 되어 관객을 압박하는 감이 없지 않다. 그것은 내용과 형식 간의 모순이라기보다는, 시공간을 일시적으로 고정시켜야 하는 조형 예술의 숙명이라고 생각된다. 여경섭에게 먼지는 매체이다. 그의 작품에서 먼지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들을 섞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매체는 메시지’(맥루한)가 된다. 그는 ‘먼지로 바라 본 세상’을 그린다. 작가는 앞으로 쌓여있거나 뭉쳐있는 것만이 아니라, 먼지를 떠오르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먼지라는 존재가 사건화 될 때, 어떤 국면이 펼쳐질지 기대된다.

출전 | 대전 시립미술관 2009 청년 작가-Next Code 전 참여 작가 프리젠테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