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야, 이국적 도시, 주변의 일상적 풍경이 스펙터클하게 펼쳐지는 풍경은 화면 상단의 1/3이나 1/4정도만 차지하고, 그 아래로부터 깍아지를듯한 추상적인 색 면이 시작된다. 그러나 풍경도 사실에 충실한 것은 아니다. 강물이 흐르거나 길이 나 있는 나지막한 산등성이 아래의 평야를 그린 풍경의 하늘은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고, 이국적인 관광지 풍경의 하늘은 보라색이다. 어떤 순간 하늘이 붉은 빛, 또는 보랏빛을 띨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하늘의 전형적인 색은 아니다. 다분히 인공적으로 선택된 하늘의 색들은 아래의 추상적 색 면들과 조응한다. 추상적인 색 면들은 마치 풍경의 단면인 양, 각 장소의 특수성을 패턴화 한다. 가령 평야를 그린 풍경에는 평야를 이루고 있는 지형지물의 색이 주조를 이룬다. 자연적 색상에서 변형이 이루어지더라도, 각 색상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유지된다. 이국적 도시 풍경은 장소를 이루는 색상에 대한 보편적 공감대를 자아낸다. 흰 벽과 붉은 색 지붕들로 된 풍경이나, 흰 벽과 청색 지붕들로 이루어진 풍경이 그렇다. 관광객에게 강렬한 첫인상을 남기는 어떤 도시의 상징 색이 화면 하단의 색 띠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 전시에서 가장 크며 세 개의 캔버스를 간격을 두고 연결시킨 [landscaaaape_a7m09]는 아파트 공화국이라고 할 만한 한국의 특수성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충격적이라 함은, 지상 위의 건물들이 가지는 수직 지향적인 구조가 화면 하단의 추상적 색 띠와 거의 단절 감 없이 연속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자연이나 이국적인 풍경에서는 화면이 장면과 느낌이라는 이원적 구조로 구별이 되는데, 여기에서는 그 차이가 사라진다. 잿빛 하늘조차, 다른 작품처럼 인공적으로 변형된 색이기 보다는, 현실 속의 희뿌연 공기를 닮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건설회사 로고를 박아 넣고, 낡아 보일 틈도 없이 새 페인트로 다시 칠하는 한국의 아파트촌은 그 자체가 이미 기호적 풍경이다. 이러한 소재는 아래로 떨어지는 색 띠를 가격이 새겨진 바코드처럼 보이게 한다. 지평선이 보이는 이국적 들판을 그린 한 작품은 화면 중앙의 관통 도로의 차선들과 인공 구조물이 그대로 색선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서도 기호와 대상은 최대한 근접 한다. 자연은 아파트 풍경처럼 도시의 격자형 시뮬레이션으로 뒤덮인다. 색 띠는 장소에 대한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느낌이 펼쳐지는 시각적 스펙트럼일 뿐 아니라, 풍경의 울림을 야기 시키기 위한 주요 장치이다.

자연 속에서 대상과 연결되지 않은 순수한 색의 배열을 볼 수 있는 것은 무지개의 경우가 유일하다. 인공적인 상황에서는 실험실에서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색의 띠를 형성한다. 김영훈은 어떤 장소를 이루는 색을 구성요소로 분해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하여 어떤 장소의 특징이 색으로 집약된다. 마가레테 브룬스는 [색의 수수께끼]에서 색은 ‘모든 물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꽃’이라는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면서, ‘색farbe’이란 단어의 독일어 어원은 본래 한사물이나 존재의 아주 일반적인 성질과 외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풍경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색 띠는 장소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 김영훈은 그림을 자연적인 환영에 근접시키는 하늘색의 고유성을 현격하게 박탈하면서, 풍경을 위아래의 인공적인 색 면들 사이에 끼워 놓는다. 여기에서 자연적 대상은 그자체로 주목되기 보다는 화면 위아래의 추상적 색채가 전개되기 위한 1차적 참조대상이 된다. 색은 평면성과 기하학적 선과 결합하여 구조화된다. 형태의 견고성에 비해 불안정하고 상대적인 위치를 가질 뿐이었던 색은 그의 작품에서 세계의 질서 속에 단단하게 끼워진다. 색의 자율적 존재감으로 인해, 풍경은 희미한 출발점으로서의 위상만을 가진 듯 보인다.
그러나 작가가 이 참조대상을 완전히 삭제하지 않은 것은 색채의 뿌리로서의 세계를 예시하는 것이다. 한 작품에서 분석과 종합이 오고가면서 화면은 활기를 띤다. 색의 띠는 분절화 된 구조로 화면에 리듬을 부여한다. 스펙트럼처럼 펼쳐지는 색의 계열들은 하모니를 이룬다. 장소에 대한 경험은 소리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겨나고 소멸하며, 사물의 고유색은 관념 속에서 추상화 된다. 감각들 간의 상응이 이루어지는 공감각에서, 색과 소리는 파동을 통해 다가온다. 김영훈의 그림에서 시청각적인 파동은 스펙트럼으로 가시화 된다. 그것은 무지개나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계량화되면서 음이 가지는 추상성과 교차한다. 브룬스는 색과 소리 사이에 이루어진 공감각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한다. 근대의 과학자로서 색을 처음 분리한 뉴턴이 스펙트럼이나 무지개에서 색의 개수를 7개로 확인한 것은 보다 정확히 또는 과학적으로 색을 분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서양음계 7음과의 유사성을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에피소드는 색의 계열화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이 중요시하는 상징과 결부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김영훈의 그림에 나타나는 다양한 색의 스펙트럼은 기호화된 풍경이기도 하지만, 단조로운 풍경에서 차이를 감식해내는 감수성의 발로이기도 하다.
출전 | 공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