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총체성과 개별성 사이의 비평

비평은 그것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사회적 좌표계뿐만 아니라, 비평의 대상과 주체에 관련된 내부 논리의 구축이라는 이중적인 맥락을 가진다. 양자는 서로 얽혀있지만, 스펙트럼의 양쪽을 극명하게 대비시킴으로서, 그 사이에 위치하는 다양한 비평의 계열들에 대한 위상을 함께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좌표설정이라는 목적을 가지는 비평 경향은 거대담론의 틀을 갖추면서 보편성을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한쪽 끝에는 작품이나 작가라는 개별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분류는 비평 뿐 아니라 작품에도 적용될 수 있다. 총체성을 지향하는 지식인적 태도는 리얼리즘에서, 장르적 개별성에 자신을 한정하고 그 내부 논리를 파고드는 경향은 모더니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모더니즘은 사회역사적 현실을 괄호 치는 대신에, 고밀도의 형식을 완성하는데 치중한다. 리얼리즘이 현실을 반영하고 변혁하려는 정치적 태도를 고양함으로서 사회적 총체성을 아우르려는 반면, 주류 미술사에서 미술 내부 논리의 전개는 미술작품을 순도 높은 평면성에로 한정시킨다.

그것은 미학적 논리가 압축되어 있는 평면을 향한 단선적 움직임을 보여준다. 둘 다 어떤 목적을 향한 필연적 운동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역사주의적 면모가 있다. 리얼리즘적 흐름이 사회적 진보를 향한 단계별 운동을 예시한다면, 모더니즘적 흐름은 미술의 장르적 순수성을 획득하게 되는 순차적 단계들을 가정한다. 그러나 양자의 흐름은 중첩되기도 한다. 서양미술사의 예를 들자면, 재현성과 화면의 두터운 질감이--재현 대상을 분명히 고정시켜주는 언어의 투명성을 와해시키고 화면의 평면성을 부각시키는 마티에르 효과--공존하는 쿠르베의 말기 풍경화에서 예시되듯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은 분리불가능하게 교차된다. 리얼리즘을 표방했던 1980년대 민중미술은 추상화로 경도된 한국적 모더니즘에 대항하는 전선을 형성하였지만, 내용면에서 근대화 과정에서 분출된 한국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려했다는 점에서, 모더니티와 연관된다. 미술계라는 제도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보편성까지 아우르려는 거대담론으로서의 비평은 80년대에 처음 두각을 나타냈다. 압축적 근대화를 거치면서 파란만장한 역사적 굴곡을 가진 분단국가 체제 하에서 거대담론과 그 일환으로서의 비평은 1980년대를 풍미하였고, 시민운동의 절정기인 1987년을 지나 90년대에 도래한 ‘문화의 시대’까지도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은 사회적 진보에 기여하는 미술 또는 비평, 특정한 계층에만 한정되는 예술보다는 민중, 시민, 대중 등으로 까지 확장될 수 있는 소통의 장을 열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도 실현 되었다기보다는 실현되면 좋을 과제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현실주의’라기 보다는 이상주의에 가까웠다. 그 이상이 모두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워낙 크고 강력했던 만큼 우리 문화에 커다란 흔적을 담겼다. 개별적인 사안이 아니라, 총체성으로서의 문화를 염두에 둔 이러한 흐름들은 개혁 지향의 청년기적인 감수성으로 가득해서, 서구에서는 모든 이념에 대한 회의주의라고 해야 할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시작되는 80년대에 우리의 미술문화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보다도 젊었다고 생각된다. 비록 80년대식의 계급적, 또는 민족적 전망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진보의 시대 끝머리에서 열린 다양한 문화의 흐름을 총괄하면서 비평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문화비평’이 꽃핀 90년대의 흐름도 총체성이라는 전체적인 틀을 유지한다. 문화라는 표현은 예술보다는 더 범위가 넓고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80년대와 90년대의 차이는 정치에서 문화정치로 강조점이 이동한 것이다.

개별적인 작품론 및 작가론 연구에 관련된 비평은 대체로 학계에 있는 학자들(미학, 미술사)이나, 비루한 현실과는 구별되는 고상한 영역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취향을 가진 개별적인 평자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미술사적 의미, 예술적 질(개성, 솜씨)은 비평의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학술적인 방식이 자신의 주장이 검증될 수 있고 책임질 수 있을 만한 영역을 한정짓고 그 안에서 논리의 일관성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한 그것이 제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형식을 갖추기 위해 애쓴다면, 현장 속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평자들은 그 스스로가 고급스러운 문화예술의 향유자임과 동시에 그것의 감식가가 되려한다. 후자의 비평적 담론은 인상이나 감상 등 개별 취향에 관한 소박한 서술로 채워진다. 학자들의 객관성, 그리고 자신의 인상과 감상을 유사(類似) 문학적인 문체로 전달하는 이들을 동일한 부류로 묶을 수는 없지만, 그들은 사회적, 역사적, 이론적 맥락 보다는 작가 개인의 작품 세계 등을 강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총체성을 아우르려는 전자의 경향이 비판적인 지식인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개별성에 충실하고자 하는 후자의 경향은 전문가로서의 역할에 자신을 한정 짓고자 한다. 양자는 서로 다른 방식이지만, 미술이라는 막연한 현상에 주먹구구식으로 대응해 왔던 이전의 예술 문화를 대체해 나간다. 물론 서로 대별되는 이러한 흐름도 일관성 있게 자신의 논리를 밀어붙인다면 만날 수 있다. 가령 총체성을 가장 잘 구현했던 개별적 작품은 무엇인가, 한 작품의 미술사적 의미는 무엇으로 보증되는가, 예술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과정에서, 총체성은 개별성과 개별성은 총체성과 만나기 때문이다. 비평적 담론이란 과학만큼 객관적인 것은 아니지만, 작품보다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 평단에 부족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일관성 아닐까. 일관성의 부재로 총체성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각자의 흐름은 나름의 자족성마저도 성취하지 못한 채, 서로의 불완전한 반쪽이 되었다. 양자는 겉으로는 대립하는 듯했지만,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이항대립의 관계를 이루면서, 제도적 공간 속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그것은 또 다른 질곡으로 다가오게 된다.


2. 세 흐름의 교차

원대한 지식인적 지평을 가진 거대담론이 정치(1980년대)에서 문화(1990년대)로, 다시 경제적 현실(2000년대 이후)로 강조점이 이동하는 시대적 굴곡에 따라 부침이 심했었다면, 미술에 대한 개별적인 취향의 표현에 자신을 한정할 뿐인 전문가적 방식은 학계와 미술계의 고정적 수요에 대응하면서 항상성을 유지했다. 후자의 경향이 도전받지 않은 이유는, 우리 사회에 있어 미술대학과 인사동을 중심으로 하는 전시회 문화가 사회적 제도의 하나로 굳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별다른 이슈 없이도 익숙한 관행이나 범주로서 그 존재 의미가 의심되지 않고 유지되어 오고 있다. 후세를 교육하고 대중의 교양(고상한 취미)을 함양한다는 건전한 역할이 부정될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호사가적인 취미활동과 구별될 수 없는 전시회 중심의 평론들은 머리가 복잡하지도 않고 위험하지도 않았다. 사회의 잉여적 존재로서 장식적 역할만 수행하면 되기 때문이다. 미술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된다. 이러한 자유방임적인 스타일은 평소에는 현실안주적이고 안이한 방식으로 있다가, 위기가 닥치면 급속히 정치화된다. 이를 통해 미술계에는 무슨 유파로 구별될 수조차도 없는 수많은 친목 및 이익 단체들이 형성되었다.

어디에도 침해받지 않을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고 그것을 구가하려 하면서도, 집단적 움직임에 급속히 편입되곤 하는 것이 우리 미술문화의 특징이다. 이들을 지탱해주는 미학이나 윤리라는 것이 있다면, 아름답지 못한 현실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위장술, 순수하지 못한 자세를 순수하게 꾸미려는 처세술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미술대학은 현실 속에서 그 자리가 취약한 미술을 제도로서 지탱시켜주는 보이지 않는 중심이 되었다. 미술대학에서 아카데믹한 흐름은 현실의 화단정치와는 조금 달랐다고 생각된다. 필자의 기억에 교수이며 작가, 교수이며 비평가가 아닌, 학술행사 중심의 활동을 하는 단체들이 본격적으로 생겨난 것도 80년대 중후반의 일이다. 아쉽게도, 당시에도 지금도 순수한 학자로서의 활동은 제도 속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위치에 비해 영향력이 크지 않다. 그들이 생산하는 논문중심의 텍스트는 다른 비평적 텍스트에 비해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지만, 미술 현장이나 사회 문화적인 차원으로 통용되기에는 부분적이다. 학문의 자율성과 분화가 체계적으로 갖추어진 서구에서 개별적이고 단편적인 연구들이 전체의 일부분으로서 기능적으로 자리매김 된다면, 그러한 시스템이 부족한 한국에서 개별적인 연구는 말 그대로 단편적인 것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실성과 엄밀함을 바탕으로 하는 학적 흐름은 2세대 교수의 충원이라는 실제적 역할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도 잠재적 가치로만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개별적인 것들이 양적으로 축적됨을 통해 질적 전환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학술활동 중심의 아카데미즘은 주석들의 거대한 상호반사와 자기 지시성의 한계를 맴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엄밀하게 지키고자 하는 실증주의적 가정에도 문제가 있다. 실증주의적 경향의 담론은 예술 작품과 작가 같은 존재가 현실 속에 성립하기 위한 맥락을 당연시하고, 그 존재 자체의 자명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자명성들은 벌써 해석’(바르트)인 것이다. 그러나 실증적인 태도를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미술사의 모든 이즘들은 회의에 붙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명의 작가에 대한 예술적 정체성을 규명하는 문제 또한 그럴 것이다. 현대 언어학의 세례를 받은 새로운 비평의 흐름들은 범주의 자명성을 검토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언어학을 비롯한 타 분야의 담론적 혁명을 미술사에 적용하는 ‘새로운 미술사’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 미술사, 미학, 예술학 등 각 단과 학문의 자기동일성이라고 생각되던 것들이 자신의 분야와 다른, 요컨대 외재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타자들로 가득 채워짐을 발견하게 된다.

현장 비평의 한켠에서, 예술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큰 나머지 예술이라는 범주 자체를 폐기하려 했던 거대담론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이 미술계를 얼마나 넘어섰는가 하는 문제는 남아있다. 미술계 안에서 미술을 거부하는 자가당착 속에서 아예 미술계를 떠나다 시피 사람도 있고, 미술 및 예술가라는 개념의 폐기라는 과감한 주장을 한 적 없다는 듯이 뒷문으로 자신이 거부하고 극복하려 했던 범주와 용어로 되돌아 온 이들도 있다. 그것은 현실이 변화 했다기보다는, 끝까지 ‘진보적’ 논지를 전개해나가기엔 그가 가진 이상이나 그것을 구체화시킬 능력이 부족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은 존재하고, 더 심화된 면도 있기 때문이다. 거대 담론의 주장자들 역시 대학 등 제도적 공간에 자리하면서, 자신이 몸담은 제도적 인프라를 이용하여 이전에 품었던 이상을 확대 재생산하려는 흐름으로 나아간 반면, 반대로 기득권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었다는 자기만족에 머물고 만 평자들도 적지 않다.

90년대에 와서 비평적 논의가 예술에서 문화로 확장되면서 수많은 ‘문화비평가’가 탄생했지만, 그들의 담론을 통해 미술이 보편적 문화로 고양 되었다기보다는, 예술이 보다 강력해진 대중문화의 영향권에 들어감으로서 하위문화의 한 갈래로 변주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90년대 신세대 미술의 원동력이 되었는데, 여기에도 예술이나 예술가에 대한 냉소적 태도가 만연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얼마나 제도 예술의 범주를 벗어났는지는 의심스럽다. 실제적으로 일어난 것은, 극단적인 거부를 통해 더 강하게 주류에 합류하는 반역의 역사를 되풀이 한 것이다. 비평적 담론에도 신세대론이나 대중문화, 키치, 시뮬레이션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이들은 다원주의적인 양상을 보이면서 정치적으로나 형식적으로 근엄하기만 한 이전의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을 동시에 극복하고자 했다. 이들 세대에게 비평은 재기발랄한 자신들의 작업에 방해만 될 뿐인 것, 보탬은 되지 않으면서 억압적인 것으로 비추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들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사회, 문화, 역사적 상황이야 어떻든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미를 찬미하면서 개별적 작품에 장단을 맞추고 미술인으로서의 알리바이를 유지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비평적 수요 계층인 작가들과 밀착하며 나름의 자생성을 확보한다.

모든 분야가 전문적으로 분화되고 있는 와중에서도 한국 미술계의 흐름을 좌지우지 하는 힘은 여전히 작가들에게 있기 때문에, 작가의 개별 세계를 상찬하는 식의 아부성 비평이 사그라든 적은 없다. 이들의 비평은 수많은 개인 도록을 채우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의뢰받고 쓰여 지는 도록의 서문은 본격적인 비평이 성립되는 공공영역에 속해 있다고 보기 힘들다. 이들의 비평을 지탱하는 어떤 이즘이란 것이 있다면, 변형된 예술지상주의 같은 것이다. 두서없는 자화자찬 스타일의 비평문들은 그것이 주장하는 바처럼 지고한 예술의 힘이 확인되기 보다는, 현실에 대한 예술의 영향력이 미미한 한국의 문화에서 스스로를 여분의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비평의 입지를 오히려 축소시키고 있다. 감상주의 스타일의 비평은 실증주의 같은 건조함과 객관성이 없지만, 여기에서도 여전히 주요 비평적 범주에 대한 역사적, 이론적 반성 없이, 막연한 무중력적 공간에 예술이라는 지고한 가치를 띄우는 일에 집중한다. 총체성을 지향하거나 개별성을 지향하는 몇 가지 계열들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작품, 주체, 현실 등 비평적 개념을 이루는 주요한 기준들에 몇 가지 공통적 가정을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세대의 비평가들에게는 극복의 대상이 되고 있다.


3. 작품과 비평 범주의 해체와 재구성

새로운 비평은 가장 자명하게 전제되는 가정부터 문제 삼는다. 상식적인 듯이 다가오는 객관적 현실의 반영, 주관적 현실의 표현이라는 두 방식은 리얼리즘이나 표현주의 미학의 근간을 이루고, 이는 비평에서도 마찬가지로 통용된다. 그것은 작품에서 시대의 상황이나 작가의 주관적인 의도(경험, 관념 등)를 찾아내는 비평이며 작가가 끼워놓은 것이라고 가정된 이야기, 또는 사회적 메시지를 발견하여 이를 관객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해주는 것이 비평의 의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표현 혹은 재현으로서의 비평’(캐서린 벨지)은 그 미학과 마찬가지로 소박한 가정에 불과하다. 의식이 실재를 반영하고 표현한다는 가정은 그것들이 ‘역사와 구조, 세력들의 결과’(마이클 라이언)임을 잊는 것이다. 비평이 찾아낼 수 있는 것은 현실이나 작품의 궁극적 본질이 아니라, 차이적 관계로 남아 있는 불완전한 상황뿐이다. 현대의 예술작품은 어느 시대의 작품보다 불완전하고 불확실하지만, 무한한 해석의 그물망에 열려 있다. 그 그물망을 어떻게 다시 엮어내는가가 비평의 관건이 된다. 그것은 객관적인 것의 반영이나 주관적인 것의 표현이 아니라, 생산이며 재구성인 것이다.

생산과 재구성은 객관적인 것도 주관적인 것도 아니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작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인간의 위상 변화와 연결된다. 캐서린 벨지는 [비평적 실천]에서 현대 언어학의 가설이 주체를 언어의 산물로 보면서, 주체성, 즉 개인의 마음이나 내적 존재가 의미와 행동의 근원이라는 인본주의적 가정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지적한다. 테리 이글턴이 [비평과 이데올로기]에서 언급했듯이, 자유주의 휴머니즘의 이데올로기는 비모순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진 세계, 즉 개인들의 자유로운 의식이 의미와 지식, 그리고 행동의 원천이 되는 세계를 가정한다. 이런 맥락에서 개별적인 주체(저자)에 의해 인식된 어떤 진실을 말한다는 텍스트의 개념은 유지될 수 없고, 그 주체의 성찰이 텍스트의 유일한 권위적 의미의 근원이라고 보는 관점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에 대한 위상 변화는 ‘저자의 죽음’(바르트)을 낳는다. 바르트에 의하면 저자는 더 이상 작품 뒤의 유일한 목소리, 언어의 유일한 주인, 생산의 유일한 기원이 아니다. 예술작품은 저자에 기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도달하는 독자의 해석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 작품은 통일성을 가정하는 고전적 의미의 그것이 아니라, 해석에 열려 있는 텍스트가 된다. 독자들은 주어진 작품을 단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로 재생산한다. 애초에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는 빈 틈 사이로 텍스트를 연결하는 그물망을 다시 엮는 것이다. 비평가는 이렇게 재생산하는 독자의 입장에 놓이게 된다. 또한 작품(텍스트)이 원 저자의 힘을 넘어서 세상에 돌아다닌다. 텍스트로서의 작품, 세계, 주체는 개방되어 있다. 무한한 해석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직관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작품이나 비평에 대한 상식을 뒤집는 이러한 이론들의 출발은 소쉬르로부터 시작되는 현대 언어학이다. 빈센트 라이치는 [해체비평이란 무엇인가]에서, 소쉬르에게 언어는 언제나 하나의 체계 내 다른 요소들과의 차이와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계층적 요소와 세력들의 무의식 체계라고 규정하면서, 비평적 연구는 현상에 드러나는 의식적인 층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하부구조를 대상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실체가 아닌 관계, 작품이 아닌 텍스트, 의식이 아닌 무의식에 방점이 찍혀진다.


4. 현대 언어학의 흐름과 비평

현대의 비평은 언어에 집중된다. 비평 뿐 아니라 세계, 주체, 현실 등이 모두 언어로 집중되는 것은 또 다른 형식주의로의 함몰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분야에 모두 관철된다는 의미에서 훨씬 보편적이다. 총체성을 가정하지도 않고, 전문화의 비좁은 틀에 갇히지도 않으면서 보편성과 개별성은 자연스럽게 만난다. 그것은 종합이라기보다는 연결이자 접속이며, 단편은 전체의 유기적 부분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전체를 담고 있다. 언어에 대한 새로운 사고는 언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서 분야 간의 호환성을 어느 때보다도 드높였다. 미술비평은 곧장 문화비평, 그리고 사회비평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현실화 시키는 것이 새로운 세대의 비평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언어는 이전처럼 더 이상 투명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주체에 대한 가정도 무너졌으므로 언어는 자율적 개인들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단순한 매체가 아니게 된다. 캐서린 벨지는 현대 언어학의 가설이 개인들과 사물들의 세계를 구성하고 그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 언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언어는 사고의 모방이나 표현이 아니라, 사고의 조건이 된다. 우리가 언어를 말한다기보다는, 언어가 우리를 말한다. 사물들은 그 언어를 구성하는 차이들의 체계 밖에서는 생각할 수 없기에, 의미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을 바로 언어이다. 그러나 언어는 고정적이지 않고 부단한 변화의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독서나 비평적 작업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의미의 가능성의 범위일 뿐이다. 텍스트들은 다원적이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개방되어 있다. 개방된 텍스트 전후에 놓여 진 주체란 다름 아닌 언어적 주체이다. 그러나 언어는 본질이나 실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망일뿐이다. 우리는 경험과 기표의 사용 간에는 분명한 틈새가 놓여 있음을 알고 있다. 주체성에 대한 언어의 우위성, 그리고 언어는 이미 해체--지시대상과 기호, 기호와 기표 사이의 간극을 말함--되었다는 가정은 개인적 의식의 중심해체를 확실히 한다. 그 결과 주체는 더 이상 의미, 지식, 그리고 행동의 원천으로 여겨지지 않게 된다. 담론이 주체성을 구성한다.

단일한 의미를 위한 권위로 개별적 주체를 설정하는 것은 주체성 그자체가 하나의 담론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저자의 주체성이란 것은 그 자체가 언어 속에서 구성된 것으로, 단지 다른 낱말들을 통해서만 낱말들을 설명하고 무한히 그렇게 계속하는 기성의 사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바르트나, ‘주체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 구성된 것이다. 인간이 말하는 것은 상징이 그를 인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라깡의 말은 분열된 주체의 위상을 알려준다. 주체의 분열은 주체를 만드는 언어 분열의 결과이다. 결국은 주객의 합일을 요구하는 낭만주의나, 반영을 요구하는 사실주의 같은 기성 미학의 요구는 기각될 수밖에 없다. 주체와 텍스트는 고정되지 않은 하나의 과정이므로, 작품은 초월적 주체성이 투사되는 장이 아니라, 상호텍스트적인 단편을 조립함으로서 하나의 텍스트를 구성하는 일이 된다. 그것은 저자와 독자, 그리고 비평가에게서 모두 행해지는 작업이다.

자아의 연속성이라는 신화는 깨지고, 주체는 언어와 담론 속에서 구성된다. 캐서린 벨지는 주체가 모순의 장소이며 항구적인 구성의 과정 중에 있다고 강조한다. 단지 고정된 구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구조화 과정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 의미 역시 기표에 일대일로 대응하는 기의가 아니다. 고정된 의미는 의미화의 끝없는 과정이 된다. 의미의 기원과 목적은 요컨대 의미의 중심은 고정되어 있지 않는다. 고정된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정체성, 의식, 이성 따위였다. 그것은 현대 정신분석학과 언어학이 예시하듯이 탈중심화 된다. 탈중심화는 기원과 궁극성의 부재, 미결정성을 야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빈센트 라이치는 순수 실체, 오염되지 않은 사물, 직접적인 현존, 원래의 대상, 분열되지 않은 기원 등은 필연적으로 허구라고 말한다. 하나의 기표에 대응하는 기의, 결정하거나 고정시킬만한 필연적이거나 본질적인 의미, 즉 타고난 자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은 인식론적 회의주의와 불가지론으로 기울면서 정치적으로 보수화 될 염려를 낳는다. 그러나 작품의 재구성과 해체는 그 언어적 속성을 통해 또 다른 차원으로 호환될 수 있는 점에서, 또 다른 정치적 가능성을 내포한다.

변화된 담론의 조건 아래 비평이 할 수 있는 작업은 무엇인가? 비평의 대상은 작품의 무의식, 즉 작품이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무의식이 된다. ‘외부로부터 작품에 유착된 역사적 설명을 소개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작품 내부에서의 일종의 분열을 보여주어야 한다.’(마슈레이) 이 분열이 작품의 무의식인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듯이 ‘텍스트 내의 갈라진 틈은 해석이 판을 치는 곳이며 그 해석은 비록 자아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자아와는 이질적인 것이다’ 비평은 작품과 마찬가지로 통일된 사유양식이 아니라, 차이들이 발생하는 틈새와 분산의 공간을 추적하는 것이다. 단일하게 짜여져 있지 않은 텍스트는 저자의 단일한 목소리를 소음으로 뒤덮는다. 텍스트는 다음성polyphonic이 울리는 공간이며 대화적 공간인 것이다. 비평의 목적은 작품의 통일성이 아니라, 작품의 모순들을 들추어내면서 그 속에서 의미의 다양성을 재구축하는 작업이다. 작품이 해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은 작품 분석 뿐 아니라 작가, 현실, 독자, 비평가 자신의 또 다른 진실을 파악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출전 | 아르코 미술관 퍼블릭 프로그램, 2009 아르코 아카데미 신진작가 비평 워크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