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봉균(Ahn, Bong-Kyun)의 회화

텍스트와 이미지, 문자와 의미와의 관계를 묻다


이미지는 보는 것인가 읽는 것인가. 이미지는 시각정보다. 이미지는 단순한 시각적 대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어떤 의미(이를테면 비가시적인)를 내재한 정보 곧 의미론적인 대상이다. 헤겔은 예술을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라고 했는데, 물질로 드러나 보이는 감각적 현상 내지는 형상은 결국 비물질적이고 비가시적인 이념의 자기현시를 돕기 위한 것이다. 플라톤의 암시와 상기 역시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로써 이미지는 보는 것이면서 동시에 읽는 것이며, 시각적 대상이면서 동시에 의미론적 대상인 것이며, 봄으로써 읽는 것이다. 이미지란 한마디로 어떤 의미를 내장하고 있는 일종의 텍스트며, 이미지 텍스트라는 말이다. 이런 이미지와 텍스트와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인식은 예컨대 교회를 장식하고 있는 각종 그림과 조상들이 사실은 전혀 글을 읽거나 쓸 수 없는 문맹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일종의 그림책(이코노그래피)으로써 고안된 것이란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문자의 기원 역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데, 사물의 형태와 이치를 모방한 상형문자가 그렇고, 그 인식의 연장선에 놓인 소위 서화동체론(글과 그림을 하나로 보는)이 그렇다.

안봉균의 그림은 이런 이미지와 텍스트와의 상호관계성에 착안한 것이며, 이를 통해 이미지와 텍스트가 그 경계를 허물고 상호 침투되는 과정을 드러낸 것이며, 종래에는 한 몸으로 합체되는 경계를 드러내 보인다. 이를 위해 그 표면에 문자가 새겨진 오래된 비석이나 비문을 차용하고 재현하는데, 비문에 새겨진 문자는 각각 음각과 양각으로 표현된다. 이때 작품을 위해 인용되는 텍스트로는 개인사나 특정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성경이나 문학작품 등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문화적 자산들이다. 작가의 작업이 어떻게 왜 쉽게 공감을 끌어내고 있는지를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다. 텍스트로 나타난 이런 보편적인 가치관은 문자 위에 덧그려진 자연 이미지에 의해, 한눈에 그 실체를 알아볼 수 있는 친근한 소재들에 의해 재차 강화된다. 말하자면 작가는 성경으로 대변되는 거대담론(이를테면 로고스)과 문학작품으로 표상된 감성적인 측면(이를테면 파토스)에 호소하는 한편으로, 인간과 자연, 문명과 자연과의 유기적인 관계와 같은 보편적인 주제의식에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작가의 경우에 작업이 제작되는 과정을 살피는 것이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데, 작업의 전개양상이 단순한 회화와는 사뭇 다를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표출되는 주제의식이 제작과정과 상호 긴밀하게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그 제작과정을 보면 우선 캔버스 전면에 수차례 젯소를 발라 면을 고르게 한 연후에 겔 상태의 모델링컴파운드를 덧발라 문자를 축조한다. 이때 초소형 나이프를 이용해 마치 한 땀 한 땀 쌓아올리듯 컴파운드를 점점이 찍어 중첩시키는 과정을 거쳐 화면 가득히 문자 텍스트를 기술한다(?) 일종의 돋을새김 기법이 적용됨으로써 미미하지만 저부조에 흡사한 화면효과가 연출되는 것이다. 양각의 경우가 그렇고, 음각에서는 이 일련의 과정이 거꾸로 적용되며 특히 일종의 상감기법이 적용된다. 이렇게 화면에 문자 텍스트가 조성되고 나면 그 위에다 다양한 색상을 덧발라 올려 중첩시키는데, 이로써 적어도 표면적으론 애써 축조한 문자를 지운다(?) 그리고 재차 표면을 갈아내고 덧칠하기를 거듭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지워진 문자가 부분적으로 드러나게 한다.

보기에 따라서 본격적인 그림을 덧그리기 위한 바탕화면을 조성하는 과정처럼 보이지만, 작가의 경우에 이 과정은 사실상의 핵심적인 과정에 해당하며 그 자체가 작가의 작업이 갖는 특정성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은 흔히 그렇듯 그리기보다는 만들고 축조하는 과정이 더 두드러져 보이고, 그림 대신 문자를 기술한다는 점에서 보통의 회화와는 다르다. 그 자체를 회화의 확장으로 볼 수도 있겠고, 이를 통해 일종의 문자회화로 정의할 만한 새로운 형식의 가능성을 예시해준다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조성된 화면은 그림으로 봐야할 지 아니면 다만 문자 그대로를 옮겨놓은 즉자적 텍스트로 봐야할 지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 나아가 이러한 모호한 경계나 그 경계에 대한 인식 자체를 이미지와 텍스트, 시각적 기호와 의미론적 기호, 그리고 보기와 읽기와의 상호작용성을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작업은 말하자면 텍스트에 일종의 몸(그림과 형상)을 부여해줌으로써 읽는 텍스트를 보는 텍스트(심지어 만져지는 촉각적인 텍스트)로 전치시켜놓고 있으며, 이를 통해 기호론과 관련해서 이제는 상식이 돼버린 기표와 기의와의 상호내포적이고 상호간섭적인 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 의미론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지점을 건드리고 있는데, 제작과정에서 엿볼 수 있듯 작가는 화면 가득히 문자를 축조하고, 그렇게 축성된 문자를 색채로 덧칠해 지우고, 그리고 재차 그 표면을 갈아내 그렇게 지워진 문자가 부분적으로 다시 드러나게 한다. 문자를 드러내고 숨기기가 교직되고 있으며, 문자의 즉자적 의미와 암시적 의미가 직조되는 일종의 의미론적 놀이를 노는 것 같은 이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자연스레 문자와 의미와의 관계를 끌어들인다.

문자는 어떻게 의미를 담보하는가. 문자는 의미를 명명백백하게 드러낼 수 있는가. 문자는 의미의 집일 수가 있는가. 회의적이다. 문자는 추상의 영역에 속하고, 의미는 실제의 범주에 속한다. 의미는 필연적으로 다의적이고, 문자는 그 다의적인 다발을 속아내 의미를 한정한다. 의미가 문자로 고정되는 과정에서 일종의 배제가 작용한다는 말이다. 암시와 상기, 그리고 행간읽기와 이면읽기는 이렇듯 배제된 의미의 다발들을 역으로 추출하고 복원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부분적으로만 드러나 보이는, 겨우 읽을 수 있을 뿐인, 흔적으로 남은 문자는 이렇듯 불완전한 텍스트를 암시한다. 그 흔적이 배제된 의미의 다발들을 환기시킨다. 문자는 배제로 인해 불완전하고, 의미는 다의성으로 인해 불완전하다. 로고스는 언어로 축소될 수가 없고, 의미는 문자로 환원될 수가 없다. 의미가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는 작가의 텍스트 작업은 문자와 의미의 이렇듯 불완전한 동거를 주지시킨다.

그리고 작가는 이렇게 조성된 텍스트 화면 위에 전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사실적인 이미지를 그려 넣는데, 대개는 곤충과 과일, 하늘과 바다, 해와 달, 그리고 풍경 등 자연에서 채집한 모티브들이다. 자연 이미지를 그린 연후에 그 위에 덧칠하고 갈아내는 과정을 중첩시켜 그림과 텍스트가 한 몸으로 합체된 경우도 있고, 텍스트 위에 그저 그림이 얹혀져 있는 예도 있다. 이로써 화면은 한눈에도 텍스트 부분과 이미지가 구별돼 보이는데, 텍스트가 모노톤으로 그려진 것에 반해 이미지는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이로써 일종의 대비가 강조되는데, 이를테면 문자와 이미지가, 문명과 자연이 대비된다. 한편으로 텍스트와 이미지가 어우러지거나 아예 합체되는 것으로 보아 그 대비는 엄밀하게는 비교를 통한 조화라고 해야 맞다. 표면적인 비교와 대비를 통해 궁극적으론 조화 곧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삶의 경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 자체를 문자와 의미, 이미지와 의미와의 불완전한 동거가 봉합되고 완성되는 어떤 경계를 표상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로써 안봉균의 그림은 예술이나 미술이 종래에는 인문학의 한 형식일 수밖에 없음을 예시해주는 강력한 사례가 되고 있으며, 학제간 연구방식, 이를테면 고고학(숨겨진 의미를 발굴하고 캐낸다는 점에서)과 미술, 언어학 내지는 기호학(문자와 의미와의 상관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과 미술이 만나지는 접점에 대한 가능성을 예시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