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은 영원으로 고정되지만, 고정된 내부에서 또 다른 움직임이 발생한다. 못은 화면에서 밝은 픽셀이나 점의 위치를 지니면서 일루전을 만든다. 작품의 크기에 따라 픽셀의 비중이 달라지기 때문에 재료 자체에서 발생하는 옵티컬한 환영과, 풍경 속에 내재된 명암을 재현함으로서 만들어지는 환영이 뒤섞이게 된다. 작품에 따라 대여섯 단계의 밀도를 가지는 박힌 못은 푸른색, 보라색, 붉은 색 등의 짙은 색조에 잠긴 배경 위로 솟아올라 하이라이트 역할을 맡는다. 화면의 네가티브 부분은 두세 가지 색상의 아크릴 물감으로 도포된다. 한국이나 프랑스의 작업실 근처에서 따온 이미지들은 풍경 자체에 내재된 수평선이나 지평선이 작품에 잠재적, 혹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다. 글자나 바다처럼 애초에 수평 성을 가지는 소재는 물론, 숲의 풍경 역시 중간 도막을 잘라 좌우로 길게 펼치는 형식이 많다. 옵티컬한 효과를 자아내는 표면과 단색조의 색은 추상을 강하게 환기시키지만, 유봉상의 작품에 깔려 있는 것은 예술의 영원한 원천인 자연이다. 출력한 사진에 의거하지 않은 작품의 경우에도 자연에 내재된 율동이 나타난다. 작업 과정에서 발생한 자연스런 율동은 다시금 파도치는 바다 같은 풍경을 연상시킨다.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진 빛의 존재방식이 가지는 순간성은 카메라의 순간성과 조우하며, 작품은 자연과 교감했던 순간들을 구체화시킨다. 일차적으로 유봉상의 작품은 공허한 일상적 지속을 단절시키는 비연속성이 특징적이며, 일순간이나마 충만했던 시공간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움과 활기를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 순간적 시간성에 호소한다.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시간성은 물리학적 또는 역사적 좌표계로 포착될 수 있는 동질적이고 연속적인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라, 매순간 존재를 비상시키며 새로이 갱신되는 형이상학적 사건과 연관된다. 바슐라르는 [순간의 미학]에서 시간은 순간이고, 시간으로서의 모든 역할을 갖고 있는 것은 현재적 순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과거는 미래와 마찬가지로 공허하고 미래도 또한 과거와 마찬가지로 죽은 것이다. 바슐라르의 관점에서 순간은 그 내부에 지속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방향으로도, 또 다른 어떤 방향으로도 힘을 밀고 나가지 않는다. 여러 개의 면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것은 전체이고 유일한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 순수한 동질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때이고, 순간의 고독 속에서 파악 될 때이다. 그러나 빛의 입자들은 흐름을 형성하고 변화무쌍한 시점을 내포하는 유봉상의 작품 속에서, 순간은 그 내부에 지속을 내포하고 있다.

유봉상은 생을 압축하는 하나의 순간에 몰두하지만, 데카르트의 철학에 집약되어 있는 명증한 의식적 사고가 회피하는 지속 또한 내재되어 있다. 순수성과 그 단순성 속의 생성, 즉 고독 속의 생성을 중시하는 [순간의 미학]은 우리 안에 길들여 있는 단순한 것, 강한 것, 항구적인 것, 그 모든 것들은 순간의 산물이라고 본다. 반면 지속이란 순간의 먼지들이며, 그것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방탕한 이질성의 성격이 있다. 일순간에 포착되는 회화의 영원한 현재를 상찬하는 모더니즘적 사고에서 지속은 회화라는 매체 이외의 것들이 뒤섞이기 시작하는 불순한 계기들을 함축한다. 자연적 환영이 내재된 것을 비롯하여, 회화 매체의 순수성을 저버린--유봉상은 이젤 대신에 도르레에 의지하며, 붓 대신에 태커를 들고 작업한다--이 작품들은 순간의 순수성을 고수하는 모더니즘의 관례로부터 벗어나는 듯이 보이지만, 작가가 도입한 이질적인 재료는 순수 회화 못지않은 균질 감을 확보한다. 또한 재현적 환영을 압도하곤 하는 물성과 평면적 색채 처리는 회화의 순수성을 향한 모더니즘의 진보적 방향을 공유한다. 유봉상의 작품은 크게 봐서 풍경이지만, 동시에 추상이다. 풍경과 추상이 상충하지 않는 어떤 균형적 지점을 발견하고 있을 따름이다. 삶의 지속성과 예술의 순간성 사이에 설정된 변증법적 관계는 미술사적 흐름을 통해서도 부연 설명 수 있을 것이다.
마이클 프리드는 [미술과 사물성]에서 모더니즘적 추상의 현재(present)성, 순간성, 추상성을 미니멀리즘의 현존(presence)성, 지속성, 사물성과 대조시킨 바 있다. 이 현재성은 개념은 작품에 관련된 강렬하고 추상적인 경험을 말하는데, 그 경험은 엄청나게 짧은 순간에 이루어지는 순수 지각에 비유할 수 있다. 그는 디드로를 인용하면서 회화의 ‘정지시키는 힘’이나 ‘순식간에 관람자의 마음을 꿰뚫어 끌어들이는 능력’을 상기시킨다. 디드로처럼 회화의 순간적인 힘을 믿은 프리드는 모든 순간마다 전체적으로 명료한, 모더니즘 작품의 순간성을 미니멀리즘적인 지속성과 대립시켰다. 프리드는 모더니즘 회화가 그 현재성 덕분으로 보는 이가 작품을 순간적으로 체험하게 되며, 이것은 무한히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작품의 깊이와 충만함을 체험하여 그로부터 영원한 확신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짧지만 실로 자족적인 체험이다. 미술을 순수하게 시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프리드는 지각의 일과성(temporality)을 강조하는 미니멀리즘을 비판한다. 미니멀 이후로 가면 미술에서의 시간성이 매우 강조되어 주어진 미술작품을 순수한 현재의 시점으로 볼 수 없게 된다.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는 회화의 형식 자체를 해체하는 요소가 있지만, 일상용어에서 ‘미니멀한’ 방식이 언급되곤 한다. 지금 작품의 시초가 되는 90년대 말의 작업에서, 작은 평면들을 그리드 형식으로 배열하거나 금속 같은 공업용 재료가 등장하는 심플한 형식의 추상 작품들이 ‘미니멀’했다. 그러나 이제 유봉상의 작품에서 ‘미니멀한’ 면은 시간성에 있다. 일련의 순서를 지켜주어야만 하는 수행성--그의 작업은 이 부분을 했다가 저 부분을 했다가 하는 식의 자유로운 제작 방식과 거리가 있다--과 작품에 잠재된 수평적 구도는 시간적 지속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최종적으로는 관객의 시선을 따라가는 명암법이 그러하다. 명증한 의식의 순간을 일깨우는 순간성과 시간의 흐름을 타고 전개되는 지속적인 몰입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의 지속은 불확실한 무의식에 호소하는 ‘사물’이 아닌, 의식적 ‘작품’을 통해 이루어진다. 제작과정은 엄밀하고 고급 예술로서의 밀도나 질적 기준을 충족시키며, 관객의 체험과 무관하게 작품의 자족성과 자기 동일성도 갖추고 있다. 못을 박아 만들어진 그의 작품자체가 순도 높은 평면을 완성하여 벽에 거는 행위를 무한대로 확장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엄밀하게 규정하려는 태도에는 자기 배반적인 요소가 있다. 돌이켜보면 순간과 영원을 결합시키려는 초창기 모더니즘의 충동 자체가 그러했다.
모더니즘의 시작을 알린 시인 보들레르가 ‘현대는 덧없는 것, 사라지는 것, 우연적인 것이다. 이것이 예술의 반을 차지하며 다른 반쪽은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발언했을 때, 우연성은 인상주의로 정점을 이루며, 이러한 흐름이 근대의 진보주의와 맞물려 모더니즘 이후까지 이어져, 포스트모더니즘의 불확실성과 모호함의 미학을 낳게 된다. 이러한 흐름에서 보들레르가 우연성과 동시에 언급했던 영원성이 억압된 듯하지만, 후기 인상주의에서 나타나는 신고전주의나, 이후 마티스와 세잔의 작품을 상기해보면 영원성은 분명히 우연성과 더불어 근현대 미술의 한축 이루었다. 발생기 모더니즘에서 분명히 존재했던 영원과 순간의 변증법은, 이후 도그마티즘에 빠진 여러 이즘과 미학적 주장을 통해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다. 그러나 독특한 재료와 회화적 방법론을 통해 순간성 속에 지속성을 삽입한 유봉상의 작품은 유동하는 입자들의 춤 같은 활기가 있으면서도, ‘자연의 사원’(보들레르)같은 신비스러운 고요함을 동시에 내포한다. 그것은 생성과 구조가 공존하는 균형 잡힌 현대성인 것이다. 유봉상의 작품에서 순간적인 반짝임은 더 이상 ‘멀리 있는 영원함의 흔들거리는 반영이 아니라, 영원한 것의 문턱 바로 그것’(앙리 르페브르)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