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인리스 스틸 판을 용접하여 만든 캐릭터들이 장착하고 있는 막강한 무기들은 귀여움과 폭력성, 감정이입과 무심함, 유기적인 것과 무기적인 것 등 서로 대조되는 가치들은 연결시킨다. 대형 용접조각 8점이 출품된 이번 전시의 부제 ‘잔혹 동화’ 자체가 잔혹과 동화라는 어울리지 않은 역설적 개념이 결합된 것이다. 소현우는 동화 속에 내재된 따뜻함, 행복, 사랑 등을 냉소적인 블랙 코미디로 변화시킨다. 그러나 신화처럼 한 사회의 무의식과 이데올로기가 투사되어 있는 동화는 마냥 따뜻하고 우호적인 세계가 아니다. 삶 자체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또한 인형이나 무기는 인간이나 자연과는 다른 존재라는 점--인형은 유사(類似) 인간이고, 무기는 인공적인 것이다--에서 한데 묶어질 수 있으며, 인형과 무기는 모두 아이들의 공통된 환상이며, 여성적이거나 남성적 환상이 물신화 된 산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소현우의 작품에서 캐릭터와 무기는 무심하게 수행되는 폭력성을 상징한다. 무엇보다도 작업과정 자체가 ‘잔혹 동화’적이다. 예술작품은 실재가 아니라 상상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동화적일 수 있지만, 작고 얇은 스테인리스스틸 판들을 일일이 용접으로 기우는 ‘스틸 퀼트’ 작업에 투여되는 엄청난 육체노동은 그 자체가 잔혹한 과정이다. 그의 작품은 모형을 주물 공장에 맡기거나, 오브제를 조합하는 식의 작품과는 다른 치열함이 있다.

소현우는 스테인리스라는 재료가 사람의 희생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작업자가 더러워지고 고생할수록, 빛을 발하고 깨끗해지고 영속성도 짙어지고 깔끔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무모함이자 희생에 가까운 이러한 작업과정은 단지 노동을 위한 노동이라기보다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과 관련된다. 무기는 물론 캐릭터들은 금속처럼 차가워야 했고, 자연적인 산물이 아닌 그것들은 구성된 대상으로서의 속성을 보여주어야 했다. 용접으로 기워진 부분들은 그대로 노출되어 구성 요소들이 퍼즐처럼 조립되어 만들어지는 문화상품의 면모가 드러나 있다. 어떤 형태라도 조합할 수 있는 삼각형 조각들은 여러 가지 모양새로 등장하는 동질이상(同質異像)의 대상을 구성하는 입자가 되며, 온몸이 박살나는 어떠한 공격에도 잔해물이 다시금 엉겨 붙어 되살아나는 좀비들 같은 모습을 연출한다. 타자를 죽이거나 때로는 스스로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도 캐릭터들의 표정은 동화속의 그것과 다를 바 없으며, 이러한 무심함이 폭력성을 배가한다. 그것들에는 무한경쟁을 촉구하는 현대사회에서 죽고 죽이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고 보는 작가의 비관적인 관점이 투사되어 있다. 그의 작품 속 캐릭터들은 생태계에서 먹이 사슬의 최상위 포식자에 속하는 인간의 분신이다. 의인화된 캐릭터들은 매우 위험한 존재인 인간을 상징 한다.

받침대 위의 물개는 재롱부릴 때 사용하는 공 대신에 망원경이 장착된 총을 머리 위에 얹고 있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하는 사자 머리 위에 얹힌 산양 뿔은 포식자와 피식자가 한데 결합한 양상이다. 몸체 부분을 이루는 무기는 총이다. 캐릭터의 동체와 무기가 구별되는 다른 작품과 달리, 총과 몸체는 변형되면서 이어진다. 사자나 물개 외에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도널드 덕, 푸우, 테디 베어, 요정, 로봇, 토끼 등이다. 그것들은 대부분 ‘꿈의 공장’이라 불리워지는 헐리웃 출생들로 그자체가 자본이 집약된 산물이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보편적 캐릭터에 내재된 폭력성의 실체는 바로 그것이 대자본의 산물이라는 데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자본의 폭력성과 공격성을 표현하고 있다. 캐릭터는 자본의 폭력을 가시화하는 대역을 맡았다. 캐릭터들에 붙어있는 무기는 권총, 발칸 총기류, 박격포, 사냥용 장총, 기관총 등인데, 캐릭터보다 큰 무기들도 있다. 실제 무기와 유사하지만 똑같지는 않다. 차가운 금속 총기류와 캐릭터는 무기, 자본, 폭력 간에 설정된 인과관계를 예시한다. 토끼, 도널드 덕, 요정, 테디 베어는 상대를 금방이라도 쏴 죽일 듯 기고만장하다. 가녀린 소녀 몸매에 공격적인 큰 발을 가지며 거대한 남근처럼 생긴 유선형 무기를 목 위에 장착한 로봇은 무기와 몸체가 동질적이다.





캐릭터와 무기의 결합체들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극도의 무질서에서 최선의 방어가 공격인 것처럼 무엇인가를 겨누고 있다. 그러나 총구는 종종 스스로를 향한다. 방석에 앉아 한손에 권총을 들고 늘어진 곰 인형 푸우가 그러한데. 푸우의 입 끝은 방긋 올라가 있지만 자세는 의기소침하다. 그것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또는 죽기 직전인가 자살인지 모호하다. 결국은 폭력으로 결판나는 무차별적인 경쟁이 지배하는 문화에 편재하는 죽음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따로 구별하지 않는다. 같은 것을 욕망하는 상대를 해치우기 위해 엄청난 속도와 화력의 무기를 필요로 하는 무한 경쟁의 구조는 세계화된 시장과 일상으로 광역화, 편재화 된다. 자본주의로 귀결되고 있는 현대화는 초기의 이상과는 달리, 합리주의와 자유라는 양 가치를 동시에 성취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합리주의는 비합리주의로, 자유는 구속으로 변질되는 경향이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귀엽거나 멋진 기계들은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최적의 도구로 나타나 있지만, 방법(도구적)에 가려 왜(궁극적 목적)이라는 물음을 삭제한다. 인류사에서 도구는 무기였고 무기는 또한 도구였다. 오늘날에도 무기는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도구 중의 하나이다.

엄혹한 경쟁적 우주 속의 개체들은 이러한 도구를 소유하거나, 더 나아가 이와 일체화된다면 자유--자연으로 부터의 자유, 노예상태로부터의 자유 등--를 획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적 삶의 최종적인 목적을 묻지 않는 이윤 추구,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필요할 뿐인 도구적 이성은 맹목이 된다. 항시적인 전쟁상태에서는 누구에게도 자유가 없다. 강자도 예외가 아니다. 사회가 자본화, 시장화 되면서 공적이고 시민적인 가치가 사라지고 고립된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소비 지향적 가치체계 속에서, 인간이 이성과 민주주의를 통해서 극복되었다고 여겨지는 약육강식이라는 원초적 망령이 되살아난다. 분장을 한 듯 의인화된 막무가내 식의 캐릭터들과 막강한 무기의 결합은 모두 상품이라는 형식을 가지며,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경계심이 공존한다. 이 점에서 소현우의 작품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인간의 존재방식을 상징화한다. 사적인 소유와 축적을 생산중심의 자본주의 사회가 하락해가는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해 막대한 소비를 필요로 하는데, 막대한 소비가 이루어지는 최고의 장은 축제나 전쟁 따위이다. 오늘날 축제는 대중문화 상품의 폭발적 소비로, 전쟁은 최고만이 살아남는 경쟁으로 변해가는 경향이 있다. 작품 주인공들인 캐릭터는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아이콘들이며, 무기는 전쟁이자 경쟁을 수행하는 전능한 도구이다.

막강한 화력(=자본)을 장착한 주체의 표정이 매우 ‘쿨’해 보인다는 점은 불길함을 더 한다. 가장 전형적인 표정으로 고정된 캐릭터의 얼굴은 두꺼운 가면을 쓴 듯 무심하다. 상대의 죽음을 겨냥하는 폭력은 무심결에, 그리고 오락적으로 이루어진다. 세상의 질서를 뒤집어 보여주는 무정부주의자의 왕인 어릿광대의 조각 잇기 의상을 연상시키는 캐릭터의 몸체들은, 영화 속 절대 악당과 이를 물리치는 절대 주인공의 가공할만한 폭력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대중의 심리구조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들이 장착한 무기들은 살상도구라는 것을 잊게 만들 정도로 물신주의적인 아름다움마저 뽐낸다. 캐릭터가 무기를 들고 있기 보다는 무기가 캐릭터로, 또는 캐릭터가 무기로 변모하는 모습은 물아일체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강한 물질적 속성을 띄는 스테인리스라는 재질로 인해, 물성으로의 환원이 두드러지면서 하나 됨의 황홀경은 무기질적인 방향(죽음)을 향한다. 경쟁에서의 낙오가 죽음을 야기할 수 있고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식의 게임이 잔혹하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쾌락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죽음이 가지는 두 가지 속성이기도 하다. 역설적인 ‘잔혹 동화’에서 잔혹은 곧잘 쾌락으로 전화한다.





모든 존재, 심지어는 자신마저도 파멸에 이끌 정도의 강렬한 소모적 행위로서의 죽음은 살아있는 채 죽은 존재와 다를 바 없는 생산중심주의 사회에 대한 대항적인 교환체계로 등장한다. 합리주의적 이성은 삶과 죽음의 세계를 명료하게 구별하려고 하지만, 인류의 상징적 상상력 속에서 삶과 죽음은 원환을 이룬다. 장 보드리야르는 [정치경제학과 죽음]에서 근대 이전의 사회와 달리, 근대의 정치경제학에서 태어난 체계에 의해 죽음이 고립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삶과 구별되고 배제되었다. 또는 자신의 목적에 유용하도록 하는 건설적인 에로스로 승화되기 시작했다. 죽음에 대한 현대적 관점은 죽음을 분해나 퇴화로 여기는데, 이에 반해 상징적 관점에서 죽음은 뒤집기이며 도전이다. 여기에서 반쯤은 죽은 듯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의 질서를 파열시키는 우연적 사고나 재난에 대한 열광이 생겨난다. 소현우의 작품에서 원래의 매끈함 대신에 덕지덕지 기워진 형태의 캐릭터들은 영웅이기 보다는 반어적 영웅이나 반영웅을 떠오르게 하는데, 그것들은 동질성이 뒤집어진 상태, 즉 이질적 파편들의 연결망으로 이루어진다.

이 파편적인 덩어리들은 동일성의 논리가 추동하는 배타적인 경계 짓기의 배면들로, 타자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게 하는 동일한 동력을 다른 방향으로 튕겨나가게 하는 이질적 표면들이 된다. 소현우의 작품에서 ‘생산의 거울’(보드리야르)은 산산조각 났으며, 그것은 또 다른 교환(상징적)을 위해 다시 짜여 진다. 그것은 타자를 지배하는 에너지인 잉여물의 축적을 무한하게 낭비하도록 하거나 죽음을 야기하는 힘을 공격자에게 되돌아오게 한다. 보드리아르는 죽음이 정치경제학에 내재적인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 자체를 열정으로 본다. 그는 ‘죽이고 싶다는 욕망은 스스로 죽고 싶은 혹은 사라지고 싶은 욕망과 종종 일치한다’고 하면서 ‘인간은 살기를 갈구하지만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를 바란다’는 까뮈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살과 살인이 종종 서로 대치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은 또한 소현우의 남근적 여성인 로봇이 보여주듯 에로스와도 결합된다. 보드리야르는 죽음이 부정되고 관리되는 사회에서 자살은 개인이 결정기관을 뒤집음으로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회를 재판하고 사회에 유죄를 선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목전의 모든 것을 싹쓸이하는 공격자로서의 곰 인형 푸우와 스스로 모든 것을 끝장내는 자살자로서의 푸우는 비슷한 동기의 결과물이다.

동일성의 논리가 강요될수록 인간을 통합하려는 체계에 대한 저항도 강해진다. 보드리야르는 삶을 자본화하기를 권하는 체계에서 죽음의 충동은 유일한 선택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는 면밀하게 조정되는 세계, 죽음조차도 제작되는 세계에서 유일한 유혹이란 파괴에 의해 모든 것을 정상화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죽음을 부여하는 것은 체계에 의해 포위된 삶에 남아있는 마지막 아름다운 탈출이라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국가의 독점을 벗어난 모든 죽음이나 폭력은 체제 전복적인 것이 된다고 본다. 이러한 논지는 매우 우울한 전망과 연결되지만, 그의 전망은 시뮬레이션 이론과 더불어 포스트 모던한 사회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을 매혹시켰다. 근대 진보주의의 끝자락에서 점차 강력해 지는 현상들, 즉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대중문화에서 더욱 화려해지고 막강해지는 죽음의 퍼레이드, 그리고 제국의 주변부에 존재하는 해방군들의 자살폭탄 테러 같은 행동은, 단지 물리적인 죽음이라는 코드로 연결되는 것을 넘어서, 상징적 차원으로 고양된다. 화끈한 대중문화의 폭력적 양식이나 테러 행위 같은 죽음을 담보로 하는 이러한 상징적 교환 행위에다 우리는 고통이자 열락의 과정인 예술을 덧붙여야만 할 것이다. 소현우의 작품은 캐릭터나 무기 같은 상품의 형식을 차용하면서도 상품교환에 근거를 둔 체계의 붕괴를 예시한다. 그것은 대량생산과 소비를 추동하는 거대한 욕망의 틈에서 얼핏 드러나는 죽음의 충동이 의미하는 바를 극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