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의 작품에는 인적 없는 무덤가나 폐허에 서 있을 법한, 반쯤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낡은 기념비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기념비와 조상들에 새겨져 있는 말들은 결코 초월할 수 없는 반강제적인 가치체계로 살아있는 이들에게 쩌렁쩌렁 호령한다. 낡고 허물어져 가는 기표와 우리의 뇌리 속에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강력한 기의 사이에 벌어진 이 간극 속에서 불편함과 갈등이 생겨난다. 석상 같은 도상들은 무기력하게 서있는 것이 아니라, 잔뜩 날이 선채 전쟁에 가까운 경쟁과 투쟁으로 분주한 모습이 순간 멈춤 동작으로 포착된다.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행태가 멀찍한 시공간적인 은유를 통해 조망된다. 사회적인 상징이 분명하게 읽혀지는 전형화 된 도상적 특성 뿐 아니라, 벽화 같은 기념비적인 양식을 빌어 그것의 역설적인 양상을 강조하는 ‘Unmonument’ 시리즈는 귀가 제거되고 눈을 가린 맹목적인 모습으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속속들이 나열한다. 이재훈의 작품 속 인간은 타고난 품성이자 권리라고 가정되는 선함과 자유로움과는 거리가 있다. 소수만이 차지할 수 있는 지배적 가치를 중심으로 고착되어 있고, 점점 더 좁아지는 입지 속에서 좀 더 중심에 근접한 서열을 차지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한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아이들인 경우도 있지만, 어른인 경우에도 아이의 신체비례를 가지고 있어서 동양의 전통에서 종종 그렇게 간주되었듯이 인간을 학생(學生)으로 본다. 그러나 작가는 그들이 배워나가는 가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학생으로서의 인간은 ‘착하게 살자’, ‘하면 된다’, ‘참 잘 했어요’같은 메시지를 통해 일련의 가치들을 주입받고 내면화한다. 인간들은 기념비와 같은 질감으로 석화되어 있는데, 그것은 동일성의 논리가 전면적으로 관철(동질화, 전염)된 상황을 상징한다. ‘Un-monument’라는 이재훈의 신조어는 사회적 고정 관념을 소격시키기 위한 개념이자 연극적인 장치이다. 이 비(非)기념비 안에는 사회의 지배적 가치를 압축하는 단어들이 의미소로 배치되어 있거나, 제목을 질문처럼 만들어 관객으로 하여금 중층적인 알레고리적 독해를 유도한다. 그의 작품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가치로서 비중을 가지는 단어들은 오히려 소통의 벽이 되는 역설을 보여 준다. 소통의 이상적인 상태는 평등이지만, 이재훈의 비기념비 시리즈에 자주 등장하는 책이나 칼은 현대사회에서 극소수의 ‘Master’나 ‘Winner’를 낳고 다수를 주변에 배치시키는 위계화 된 장치들이며, 이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결전의 장에서 인간들은 모두 전사가 되어야 한다.





종국적으로는 다수의 전사자를 낳는 전사의 무리들은 관객들에게 ‘이것이 현실입니까’, ‘당신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를 묻는다. 이러한 질문에는 사회가 규정하는 현실, 주체성, 가치에 대한 의문이 함께 실려 있다. 기념비는 사회의 지배적 가치가 새겨지기 적당한 장소로, 이재훈의 작품에서는 2-5겹의 장지가 지지 판이 된다. 여기에 석회, 먹, 목탄, 아교 등의 재료로 층층이 처리하여 돌같이 단단한 질감이나 여러 번 복사된 느낌이 나왔다. 탈색된 기념비가 그러하듯이 색은 자제되었고, 시선의 흐름을 유도하는 정도이며, 배경처리를 위한 파스텔 톤의 색감이 전부이다. 조각적 도상들이지만 정면성을 유지하고 있어 회화적이다. 모노톤의 색, 그리고 배경이라기보다는 여백 같은 공간, 수정이나 덧칠을 할 수 없는 까다로운 면은 동양화와 비슷하다. 특히 도상과 더불어 제시되는, 한자어로 압축된 단어들의 비중이나 울림은 서화의 전통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이재훈은 많은 젊은 한국 화가들의 강박관념이 되다시피 한 ‘전통과 현대의 관계’에 대한 억지춘향식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올 가을에 새로 발표한 ‘NOBLE SAVAGE’ 시리즈는 이재훈의 전체 작업의 큰 맥락을 이루는 ‘UNMONUMENT’의 한 장으로, 서양 전래의 개념인 ‘고귀한 미개인’에 내포된 정치철학에 대한 작가의 재해석이다. 그의 작품이 단지 추상적인 문명비판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각론이 필요한데, 그 구체적인 작업을 향해 나아간 것이다. ‘고귀한 미개인’이라는 개념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미덕이 있다는 이상향적인 가정으로, 이후 문명과 역사에 의해 천부의 자연이 오염되고 타락했다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근대 정치철학의 한 줄기를 이루었던 이 개념이, 역설 어법을 활용하곤 하는 그의 작품에 차용되어 변형된다. 먼저 ‘고귀함’은 풍요와 자유를 구가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대변한다. 그러나 ‘미개인’은 현대인이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는 평가를 내포한다. 현대의 합리주의와 이성은 더 큰 자유나 진정한 소통을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형용모순이 된 ‘고귀한 미개인’은 기표와 기의 사이에 벌어진 거리감을 기념비적인 형식으로 표현하는 그의 작업의 또 다른 변주인 것이다. 이재훈의 작품에는 기념비적인 형식으로 제시된 이상과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악다구니 같은 현실 사이의 괴리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이성은 도구화를 거쳐 맹목적인 것이 되고, 그것은 야만적인 폭력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된다. 그것은 고전 정치철학이 제시하는 절대자유를 누리는 태초의 인간이나 정의로운 사회계약론 같은 것과는 거리가 있다. 이재훈의 작품에 나타난 바로는, 현대인은 자유는 없으면서 미개한 토템만이 횡행한다. 고전 정치철학에서 자유의 바탕이 될 자연--자연이 평화 상태(루소)인지 전쟁상태(홉스)인지는 정치철학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었다--은 폐허로 변해있고, 집단이 숭배하는 가치는 공동체의 이익과 무관하다. 작가는 ‘고귀한 미개인’ 시리즈를 통해 관객에게 ‘무엇을 선택 하겠습니까’, ‘이러고들 있습니까’를 묻는다. ‘고귀한 미개인’ 시리즈는 ‘비기념비’ 시리즈의 제목처럼 단순히 묻기 보다는 다그치는 뉘앙스가 있다. 그러나 무차별적인 경쟁구도, 왜곡된 아름다움, 힘에 대한 숭배를 풍자하는 점은 여전하다.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시리즈에서 풀밭 아래서 불쑥 솟아오른 손이 월계수에 쌓인 상이나 검을 향하여 취하는 몸짓은 마치 판토마임을 보는 듯하다. 무엇인가를 발언하기 위해 군상이나 반신상이 동원될 필요 없이, 신체의 일부만을 통해 연기한다. 최근의 작품에서 이러한 파편화는 더욱 빈번하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손바닥에 도장이 박힌 작품들에 나타나듯이, 지배적 가치가 이제 개별적인 몸에 깊숙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발견된 현실] 시리즈는 각각의 요소를 뽑아서 조각낸다. 수직 수평으로 배열된 파편들은 마치 유적 발굴의 현장 같은 모습이다. 낡은 기념비와 유적지의 이미지는 비슷한 계열이지만, 역사적 시간대는 고고학적 시간대로 확장되었다. 기념비가 유기적 형태와 관계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면, 유적지는 그것이 해체된 상태로, 기표와 기의의 간극은 더욱 넓어진다. 그것은 사회가 강요하는 편향된 이념들을 해체하고 싶은 작가의 무의식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에서 이념들은 도상들의 지원을 받은 언어로 표현되는데, 언어라는 것이 본래 분열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발견된 현실’로 나타나는 강고한 실체나 본질은 언제나 이미 해체되어 있는 것이다. 이념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질서, 곧 인공적이다. 그 구조와 작동원리가 파악될 수 있다면, 해체될 수도 있다. 해체는 무정부와 무책임, 방종이 아니라, 보다 긍정적인 질서로 재구조화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다. 여기에서 언어를 다루어 왔던 예술가들의 사회적 역할이 부각된다. 선택이나 생존 같은 진화론적인 개념에 내재된 적응이 아니라, 활동과 창조에 방점이 찍혀지는 보다 긍정적인 사회에서, 예술은 기성관념을 장식하는 부차적인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그 때 압제적인 기념비는 해체되고 소수만이 누리는 ‘고귀’는 다수의 평등으로, 맹목적인 ‘미개’는 생동하는 야성으로 고양될 것이다. 이 모든 엇박자들이 조화로운 생의 율동을 되찾기 위해 예술가의 구조조정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출전 | 금호창작 스튜디오 입주 작가 워크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