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학적 가상성에 대한 육체와 물질의 복권
신선주 전 (9.4--9.17, 스페이스 캔)



신선주의 작품은 사진과 회화의 합작품이다. 작가가 직접 사진을 찍어 캔버스에 스캐닝하고, 그 위에 하얀 물감과 검은 오일 파스텔을 이용하여 가필한다. 캔버스 위의 이미지들은 사진임을 감추지 않고, 그 일부분이 안료로 뒤덮인 표면이라는 사실 역시 드러나 있다. 그것은 단지 회화를 위한 밑바탕 작업도 아니고, 사진을 회화처럼 보이게 손본 것도 아니다. 사진과 회화가 만나는 통상적인 방식은 양자가 혼동되었던 근대 시각문화 초창기에 종종 벌어졌으며, 만물을 코드화하여 뒤섞는 포스트모던 문화에도 만연해 있는 일이다. 근대와 현대를 망라하여 벌어진 회화와 사진의 혼동(동일시)에 비한다면, 신선주의 작품은 사진에 결핍된 것과 회화에 결핍된 것을 그만의 방식으로 보충한 것이다. 사진의 기계적 시각에는 살아있는 양안(兩眼)과 몸이 억압되어 있으며, 회화에는 지시대상과 완전히 밀착되다시피 하는 사진의 기표적 특질, 즉 그것의 실증적 측면이 부족하다. 통상적인 방식이 어느 하나의 장르로 나머지 하나를 환원시키는 것이라면, 신선주의 방식은 양자의 차이를 보존한 채 공존하게 한다. 여기에서 발생되는 것은 ‘OO같은 XX’나 느슨한 짬뽕이 아니라, 팽팽한 긴장감이다.

작가가 찍은 북경의 전통적인 건축물과 공장은 그자체가 따로 변형될 필요가 없을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진다. 사진으로 찍혀진 대상의 대부분이 정면성에 충실하며, 저 멀리 보이지 않는 소실점이 잠재되어 있는 원근법적 풍경이다. [불향각]이나 [북경대 고가]같이 고건축이 등장하는 경우, 화면 전면을 검은 오일 파스텔로 처리하여 네가티브 또는 포지티브의 구멍을 뚫어놓는다. 반면 [헤이차오 스튜디오]나 [UCCA]같이 공장을 개조하여 만든 창작 촌이나 미술관은 소실점 좌우로 펼쳐진 건물의 한 면(오른쪽, 또는 왼쪽)을 검게 칠했고, [상상재설계]에서는 거친 기계들이 도열한 공장 시설물들이 서 있는 기저 면을 검게 칠했다. 고건축은 그것에 본래 내재된 대칭적인 안정감을 강조하였으며, 공장을 비롯한 근대적 구조물들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균형감을 부여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작가가 창안한 허구적 장치로 채워진 그림이나 우연히 찍힌 한 장의 사진을 넘어, 대상과 표면들은 그것들 각자에 내재된 묵직한 실재감이 강조된다. 신선주의 작품에서 사진적 과정이 대상을 투명하게 재현함으로서 약호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면, 회화적 과정은 약호화 된 공간을 교란시키는 요소이다. 이를 통해 투명함과 불투명함, 의미와 미, 자료와 상상, 공간과 시간이 뒤섞인다.





신선주의 작품에서 회화와 사진이라는 양 영역이 교차되는 중심에 원근법이 존재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된 원근법은 대표적인 표상representation 공간으로, 소실점을 향하는 직선들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공간을 이룬다. 이러한 원근법주의의 맞은편에 한 자리에 고정된 채 서있는 주체가 있으며, 그것은 사진기의 외눈 시점이기도 하다. 중심에 고정된 총괄적 시점이라는 초월적 태도와 기계적 시점이 중첩된 것은 유일신의 신학과 계량적인 과학, 그리고 자율적인 예술이 헤쳐 모이기 시작한 근대에서의 일이다. 이렇게 근대의 강력한 시각중심주의 체제가 탄생하였다. 신선주가 오일 파스텔로 검은 장막을 덧씌운 부분은 그것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사진의 기표와 지시대상 사이에 설정된 유사성(iconicity)을 사라지게 한다. 또한 그것은 르네상스식 공간처럼 차근차근 뒤로 물러서는 공간의 면들이자 단일시점을 향하는 3차원의 기하학적 공간에 난입한 이질적인 요소로, 평면에 투사된 실재의 환영을 거부하고 화면의 불투명성과 불명료성을 심화시킨다. 그것은 볼 수 없는 것들이 그려진 흔적들로, 손에 묻어날 정도로 밀도하게 칠해진 면들은 시각적인 환영 대신에 촉각성이 두드러진다. 외눈이 관통하는 단일한 기하학적 공간에 드리워진 검은 면에서 시선은 어느 한 점에 고정되지 않은 채 방황한다. 그것은 고정된 시공간이 아니라, 육안이 본래 가지고 있는 불규칙적이고 단속적인 움직임들이 되살아나는 동적 공간이다.

여기에서 동질적이고 통일된 고전적 원근법에 내재된 고정된 주체의 안전한 위치는 사라진다. 조나단 크래리는 [시각의 근대화]에서 원근법이나 기하학적 광학과 마찬가지로, 단안이라는 성질은 르네상스적 약호들 중 하나였다고 지적한다. 르네상스는 그러한 약호들을 통해서 시각적인 세계를 체계화된 불변적 상수들에 따라 구성하며, 또 그러한 약호들로부터 어떤 불일치나 불규칙성도 축출하는데, 이는 동질적이고 통일된, 그리고 완전히 읽어낼 수 있는 공간의 형성을 보증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신선주의 작품에서 밀도 높은 검은 면들로 잠식된 원근법적 공간은 약호화 될 수 없는 불투명한 영역으로 바뀐다. 여기에서 지시성의 부재는 또 다른 실재real 세계를 구축해주는 바탕이다. 이곳에서 단속적인 시간성을 따라 정처 없이 떠도는 시선들은 중립적인 투명성이 아니라, 몸과 얽힌 불투명성을 의식하게 한다. 이러한 불투명성은 전시장의 강렬한 조명에도 한 치의 반사면도 내비치지 않은 텁텁한 물질적 안료의 층과 밀접하다. 신선주의 작품 속 블랙은 여러 색깔 중의 하나라기 보다는 아예 눈을 감았을 때 같은 막막한 어둠과 유사하다. 빛조차도 빨아들이는 블랙 홀 같은 강한 흡입력을 가지는 검은 면들은 화면 위나 가운데로 뚫려 있곤 하는 화이트홀로 에너지를 뿜어낸다. 흑과 백은 혼돈이 질서를, 죽음이 삶을 낳는 순환적 회로망처럼 상호작용한다. 검은 면들은 빛이 부재가 아니라, 강한 실재감을 가진다. 신선주의 작품 속 블랙은 사진 이미지에 내재된 광학적 공간의 가상성을 대조적으로 부각시키면서, 그것을 상대화한다. 그것은 또한 기계의 외눈박이 시점을 교정하는 물질과 육체의 복권이다.

출전 | 포토넷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