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없는 길을 나서는 여정
이춘택 전 (9.2--9.8, 갤러리 A&S)



화기(花器)와 다기(茶器)가 30여점 전시된 전시장은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장이다. 장작 가마라는 전통적 방식으로 만들어진 분청자기는 자아에 대한 근대적 탐구와 만난다. 그러나 이춘택의 구도적 자아는 근대적 주체 중심주의와도 다른 현대적 지향성을 보여준다. 현대적이라 함은, 그의 많은 작품들이 형식적인 면에서 탈 중심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꼭 맞춰져야할 도기의 입구는 대부분 엇겨나 있고, 그림 같은 이미지가 새겨지기 좋은 판 성형기법으로 만들어진 도기 표면에는 명확한 형태가 아닌 흔적들만이 남아 있다. 그것은 끝없는 질문과 대답, 그리고 방황의 연속이라 할 수 밖에 없는 삶, 또는 예술의 길을 찾아가는 작가의 암중모색이라는 내용이 형식화 된 것이다. 도기 언저리에 입체화되어 있거나 표면에 새겨져 있는 작은 새는 ‘길 없는 길’에서 길을 찾는 작가에 대한 은유이다. 작품 [자유롭게 날자]처럼 시리즈 작업을 통해서, 작가는 새의 여러 가지 자세를 인생에 대한 태도와 연결 짓는다. 가령 ‘그 자리에 눌러 앉은 새’, ‘길을 찾아 떠나는 새’, ‘떠나가다 길이 막혀서 날려고 준비하는 새’ 등이 그것이다. 작품 [길 없는 길-날다 I]는 첩첩 산중에서 새는 길을 찾아간다는 것을 비유한다. 자유롭게 나는 새의 이미지에는 작가의 희망이 투사되어 있다. 엇겨진 도기 입구는 도자기 하면 언뜻 떠오르는 날렵하고 섬세한 이미지와 거리가 먼, 울퉁불퉁하고 투박한 몸체와 어울리는 형식이기도 하지만, 끝없는 길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띠가 엇겨진 모습으로 조형화된 길은, 무한 반복이라는 안전하지만 암울한 방식을 피해간다. 무한반복이란 기계적 일상이나 관념적인 원형(모델)을 염두에 둔 초월적 태도를 연상시키는 것이며, 미세한 차이와 무한을 지향하는 예술의 길과는 거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렇게 길을 찾는 여정이 사계절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작품 [봄날은 간다] 시리즈는 엇겨진 입구아래 몸통에 그리기와 지우기를 반복한 흔적이 또 다른 문양을 이룬다. 그것은 덧없이 흘러간 좋은 시절에 대한 형상화이다. [여름날의 이야기] 시리즈는 폭포수나 꽉 찬 입새들, 군상들이 연상되는 무늬들(압인문)이 특징이다. 봄이 흐릿한 기억이나 흔적으로 남아있다면, 여름은 에너지가 넘쳐흐른다. 압인문은 흙 판을 소나무 방망이로 두들겨 새겨진 문양 위에 흰색 화장토를 덧입히기를 반복함으로서 만들어진다. 가을은 길을 떠나기에 가장 적합한 계절일 것이다. 이 여로에는 사색의 여행도 포함된다. 분청의 색깔 자체가 가을 하늘 색과 유사하여 어느 계절을 표현한 작품보다 자연스럽다. 가을 시리즈에서 나선형이나 소용돌이 같은 선은 미로 같은 길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복잡한 생각과 무의식의 흐름을 표현한다. 판상기법으로 만들어진 작품에서 길은 입구의 띠로 표현되지만, [가을-길을 가다] 시리즈처럼 물레를 이용하여 만든 작품에서 길은 손 터치를 강하게 하여 만들어진 가로 줄로 형상화된다. 아우토반처럼 쭉 뻗은 가로 줄 한가운데 박힌 돌은 길 위에 놓인 장애물이라는 상징성을 띈다.






장애물 없이 하늘을 나는 새가 부러울 정도로 이춘택의 작품 속 길은 미로처럼 복잡하고 꼬여있다. 그의 작품에서 어떤 목표를 향해 직진하는 통로는 발견되지 않는다. 목표조차도 불분명한 듯하다. 자크 아탈리는 [미로]에서 직선과 투명함, 단순함을 옹호하는 현대 문명과 문화가 구불구불하고 불투명한 것을 거부하는 것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고 하면서, 이성과 함께 직선과 투명한 것이 득세했고 미로는 장애물이 되었으며 쫒아버려야 할 난해한 대상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더 이상 직선이 아니다. 그것은 단선적 진보의 과정으로 간주된 역사가 필연적으로 최선을 향해 나가는 게 아니라는 점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계단이나 고속도로가 아니라, 막다른 길과 환멸들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미로같이 착종된 길을 표현하는 이춘택의 작품은 ‘아직도 역사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다면, 그것은 미로의 의미일 것’이라는 [미로]의 메시지와 조응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빠른 지름길이 없다. 길은 저 앞에 있는 듯 하다가도 끊어지고 막히고 꼬여있다.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나아가는 길에는 끝없이 우회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미로에서 헤매기는 삶과 작업의 과정 그 자체를 압축한다. 왕도가 있을 수없는 삶과 예술에서의 값진 결과는 방황을 통해서만 얻어지기 때문이다. 아탈리는 ‘예술에서는 길을 잃는다는 것이 창조의 조건’이라고 까지 말한다. 이춘택의 작품에서 기약 없는 여정은 그자체가 작품의 서사를 만들어내는 동력이 된다.

무엇인가를 담는 용기로서의 도자기는 일종의 소우주적인 면모를 지닌다. 이춘택의 작품도 예외는 아니어서, [가을단상II] 처럼 도기 표면의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드러난 작품을 비롯하여, 기(器)라는 형태 안에 내재된 인간의 형상을 극대화한 [즐거운 우리모습]에 이른다. 이러한 소우주적인 자족성은 불가피하게 중심의 상징으로 이끈다. 미로에서 길 찾기라는 테마 자체가 궁극적인 어떤 목표에의 도달, 즉 중심을 향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종교학자 엘리아데가 말하듯이, 인간 존재라면 모두 총체적 실재, 신성을 자신에게 부여하는 중심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지향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뿌리 깊은 곳에는 실재의 한가운데에 천상계와 교신이 이루어지는 세계의 중심에 있으려는 욕망이 존재한다. 낙원에의 향수란 항상, 그리고 힘들이지 않고 세계의 중심, 실재의 한가운데에 있고자 하는 욕망을 뜻한다. 인간은 혼돈의 공간 한가운데서 조직화되고 ‘우주화 된’, 즉 중심을 갖춘 장소를 찾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세계와 실재와 신성성의 중심에 위치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적인 상징적 우주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현대인에게 중심이란 결코 채워지지 않은 욕망의 중심일 뿐이다. 중심을 향한 길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맥락에서 본다면 이춘택의 작품에서 하늘을 나는 새는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려는 불가능해 보이는 희망을 투사하는 것이다.

그의 길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중심을 향한 향수나 희망이 새처럼 초월할 수 없는 지상적 삶의 조건에서 어떻게 변화될 수밖에 없는지 알려준다. 판 위에 새겨지거나 그려진 형태는 시간의 궤적을 촘촘히 기록하고 있지만, 그 시간의 끝은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아귀가 맞지 않는 이춘택의 도자기들은 시간의 끝이 일종의 회귀이기는 하지만, 중심으로부터 엇겨나간 회귀임을 알려준다. 마크 테일러는 [미래로의 회귀]에서 회귀에서의 ‘re’는 모든 외재성을 향해 열려져 있는 ‘ex’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마치 회귀가 종결을 나타낸다기 보다는 추방, 즉 대탈출을 노리고 있는 새로운 시도를 나타내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여기에서 회귀하는 것은 다시 탈 중심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현대인이 방황하도록 운명 지워진 공간의 상황인 것이다. 이춘택이 이러한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을 표현하는 방식은 동일성--전통에 관한 것이든 주체에 관한 것이든--이 아니라, 차이를 가시화하는데 있다. [봄...] 시리즈에서 긋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방식이나, [여름...] 시리즈에서 작업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흔적을 남기는 방식은 차이를 각인시키는 효과적인 방식이다. ‘복합적인 차이의 작용’(데리다)이라는 메시지는 현대 철학의 화두로, 이러한 차이작용은 ‘해체적인 분열과 불연속적인 확장의 과정’(마이클 라이언)에 다름 아닌 이춘택의 길 찾기 작업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출전 | 월간 도예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