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의 종 다양성을 위한 자연과 예술의 실험
종의 출현 전 (9.11-10.11, 일민미술관)



‘종의 출현’전은 미술이 뿌리내리고 있는 자연, 사회, 문화, 역사적 체계를 생태학이라는 거시적 조망을 가지고, 미술작품 또한 발생하고 소멸하는 종이라는 개념을 통해 조명한다. 여기에서 종은 배타적인 자기 동일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조금씩 다른 개체군’(조르주 캉길렘)으로 간주된다. 현대의 진화론은 생명의 생멸 법칙이 어떤 계획이나 목적을 향하는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진화가 안정기와 갑작스런 도약기를 거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학적 패러다임을 비롯하여 인식적 틀의 변화 또한 연속적이기 보다는 단속적이다. 자연과 문화의 생태계가 급변하는 시대에서 종의 탄생과 소멸의 주기가 어느 시대보다도 빠른 오늘날의 흐름에 맞추어, 이 전시는 극적 변화의 증거라고 할 수 있는 종 다양성을 동시대 작품을 통해 찾아본다. 종은 개체가 몸담고 있는 환경에의 수동적인 적응이 아니라, 복잡성과 질서를 동시에 증가시키는 경향을 가진다.

전시장 도입부에서는 흡사 수십억 년 동안 전개되어 온 창조의 과정을 압축 재현하는 듯한 소리가 77개의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진다. 김기철은 다양한 소리를 섞어서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어온 생명의 고동 소리를 들려준다. 중심으로부터 방사되는 김병호의 소리 관들은 생명 에너지의 기원인 태양의 형태, 또는 생명이 복잡하게 분기하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불안한 기운에 휩싸여 있는 생물들이 묘사되어 있는 이승애의 작품은 다시 돌아온 감염 병 시대에 보이지 않는 위협과 그것에 대한 방어기제를 표현한다. 그것은 지구 생태계의 중심이 되어 왔던 것이 동물도, 식물도, 인간도 아닌 보이지 않는 차원의 생물이었음을 알려준다. 이해민선의 작품에서 개체들은 종의 단일성보다는 유전자의 교환이나 접속, 접합을 통해 생존능력을 높인다. 시멘트 선인장들이나 등고선을 이용하여 수많은 겹을 가진 임선이의 고고학적 풍경은 인간의 개입에 의해 변화된 환경에서 정작 인간은 생존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이다.

예기치 못한 형태와 색의 층들로 복잡한 임자혁의 그림은 불연속적인 힘들이 종횡무진 누비고 있는 풍경으로, 뚜렷한 외곽선 없이 동요하는 선들은 다양성이 배태되는 장이다. 이 전시의 많은 작품들에서 조형의 기본이자 기준이 되어왔던 인간은 사라지고, 막 탄생하고 있기에 형태가 불분명한 생명의 잠재적 가치에 주목한다. 그래서 작품들은 무질서와 우연, 그리고 다양성이 횡행한다.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급변하는 생태계에서 살아남는 방식은 종이 아니라 변종이며, 견고한 정체성이 아니라 가능성의 실험이다. 각 작품들에 충전된 미시적 힘들은 새로운 종의 탄생을 위한 밑바탕이 된다. 그것은 사실상 거시 생태계를 조절해 왔던 미시 생물체들의 존재를 상기시키며, 오늘날 문화 생태계의 강력한 동력이 되는 매체계 또한 미시적 힘들이 횡단하는 불안정하면서도 활기찬 장임을 예시한다.

출전 | 퍼블릭 아트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