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의 출품작 [contact]는 긴 테이블의 양쪽 마이크에서 관객이 말을 하면 재봉인형이 서로 다가가 키스하는 작품이다. 직접 대화하기에는 다소 떨어진 사람들은 배역을 맡은 꼭두각시를 이용하여 자신의 마음을 전달한다. 소리와 접촉을 연결시킨, 어찌 보면 단순한 개념이지만, ‘조각가’ 외에 ‘사운드 엔지니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김기철에게는 소리를 활용하기 시작한지 15년 넘는 세월이 압축된 작품이다. 이전의 작품 경향과는 달리 인터페이스는 단순해졌지만, 소리를 재현하는 것만이 아닌 소리를 통해 의미와 마음을 전달하려는 작가의 지향이 담겨있다. 이 작품과 연결될 수 있는 작품으로 [we cant talk without mask]가 있는데, 그것 역시 멀찍이 떨어진 구도를 가진다. 긴 테이블 양 끝에 실 마이크로 연결된 마스크 둘이 배치되어 있고, 관객은 마스크에 대고 이야기한다. 마스크 안에 들어가 상대방을 쳐다보고 이야기하는데, 둘을 잇는 가느다란 실의 떨림에 의해 소리가 전달된다. 마스크를 써야만 교신이 될 수 있는 현대사회의 메커니즘을 장난감 같은 소품으로 구현하였다. 작품 [dependent arising]도 가운데에 소리에 반응하여 입을 들썩거리는 두 인형을 매개로 두 연인이 대화하는 것으로,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는 서로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역설적 가정이 있다.




김기철의 초기 작업은 어떻게 소리를 보여줄 수 있는가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그것은 소리의 파형을 통해 소리를 보여준다는 개념으로 이어졌는데, 그 최초의 작품이 1993년에 라디오에 불상을 올려놓은 [觀音]이었다. 말 그대로 관음보살을 통해 ‘소리를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야구광이 라디오로 야구중계를 청취할 때 눈앞에 그라운드가 쫙 펼쳐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체험을 지향한다. 그에게 조각가로서의 이력은 소리를 녹음하기 시작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초기작 [looking sound]는 소리를 물리적으로 직접 보여준 작품으로, 소리에서 발생하는 사인 웨이브의 파형을 다르게 하여 다양한 높이로 뛰어오르는 입자들을 가시화한다. 마치 오디오의 이퀼라이저가 움직이는 모습 같아서, 관객은 투입되는 소리 에너지에 따라 춤을 추는 입자들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관심사는 요즘에도 이어져 ‘아! 좋! 다!’는 3개의 음원으로 만들어진 사인 웨이브를 야외 조각 작품으로 만들 계획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음을 조각으로 만든다는 발상인데, 1초에 360m 정도를 가는 속도에 의해 소리가 메아리처럼 연기되는 과정을 조각화 하는 것이다. 요즘의 관심사는 수많은 소리 중에서 음성에 집중되어 있지만, 대중에게 알려진 김기철의 전형적인 작품은 자연의 소리를 담은 것이다. 소리에 관련된 최초의 작품이 [관음]이었던 것처럼, 물소리, 목탁소리, 종소리 같은 자연친화적이고 동양적인 명상이나 해탈--‘꿰뚫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관음보살을 표현한 작품 [소리-해탈]처럼--의 세계를 떠오르게 한다.

특히 김기철의 초기 작품에는 물소리가 많이 들린다. 그는 자연음의 경우 빗소리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는 빗소리가 ‘지향성과 의미하는 바가 없고, 여기를 지시하지 않는다. 바닷물을 앞에서 몰려오지만 빗소리는 뒤도 앞도 옆도 없이 나를 감싸준다. 그 소리는 꽉 짜이지 않고 편안하다’고 말한다. [sound looking rain]은 그러한 빗소리를 보여준 작품으로, 천정에서 내려와 빗소리를 재현하는 스피커들을 공중에 지탱시키는 투명한 선들이 빗줄기 같은 시각 상을 형성함으로서, 시청각적 감각 사이의 상응을 실현한다. [해인]은 ‘바다의 도장’, 즉 ‘해탈의 큰 의미’라는 뜻으로, 가운데서 목탁소리가 울리고 그 주변에 높인 16개의 스피커 채널을 통해 물 떨어지는 소리가 함께 들리는 작품이다. 그는 소리를 통해 관객을 광활한 바다나 깊은 산사로 순간이동 시킨다. 그러나 소리에 대한 집착이 강해질수록 시각과 청각 사이의 교감이나 상응이라는 조화에는 틈이 생겨나고, 완벽을 기하려는 의지가 강할수록 그 틈은 더욱 커져 보인다. 그래서 아예 양자 간의 간극을 극대화시킨 작품이 [sound looking water]이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버전이 있지만, 각지에서 길어온 물이 실린더에 담겨 있고 그 물의 원천에서 나오는 사운드를 각각 들려주는 패턴이다. 시각적으로는 밋밋한 샘플들에서 북한산의 계곡물, 종로의 빗물, 경포대의 바닷물 소리 등이 들린다. 이러한 작품은 시각 이미지보다 소리가 강하다는 것을 예시한다. 소리는 미약한 시각적 단서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이미지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不二]는 오디오 매니아적 발상이 드러난 것으로, 소리를 극한으로 추구하면 이미지가 보일 것이라는 기대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것은 선덕 대왕 신종을 소리로 재현한 것으로, 음원은 음향전문가 김벌레씨에게 빌려오고, 종소리가 재현될 수 있는 최적의 스피커 배열을 시도한 작품이다. 관객은 설치작품처럼 배열된 거대한 스피커 장치 안팎을 거닐며 소리를 듣고 본다. 이러한 극한의 시도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일단락되었는데, 최첨단 기술지상주의 사회에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은 결국 재생 음이라는 것은 기술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김기철은 작곡을 배워 4개의 채널에 각각의 악기음을 녹음하여, 콘써트홀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를 할수록, 원음과 재생 음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고, 기술이 그 격차를 줄일 뿐 완전한 일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풍경이 그림자체일 수 없다는 것이 오랜 미학적 결론인 것과 같다. 자연음에서 재생 음으로 관심이 전환되면서 인위적 조율을 전제로 하는 음악 작업도 작품 목록에 오르게 된다. 김기철에게 소리는 음악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재생 음에 대한 작가의 의식은 바닷소리나 빗소리에 간단한 어쿼스틱을 곁들여 소리풍경soundscape을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도 낳았다. 올해 일민미술관의 기획전에 출품한 작품[direction]처럼, 인공과 자연에서 출처를 둔 다양한 소리를 섞어서 수십억 년 동안 전개되어 온 창조의 과정을 압축 재현하는 듯한 소리를 77개의 스피커를 통해 들려주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재생 음으로 게임 사운드 디자인을 하기도 한다. 화려하고도 자극적인 인공 음은 새로이 변화된 매체환경에 조응하는 것이다. 이제 인구의 상당수가 도시에 몰려 사는 상황에서, 때가 되면 울리던 절이나 성당의 종소리가 기계 문명의 소음에 묻혀 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김기철이 강조하듯이 재생 음으로 자연음을 보여줄 수는 없다. 원음과 재생 음 간의 간극은 실재와 환영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자연음을 초기의 찾겠다는 생각을 접었지만, 소리의 세계에 천착하는 것은 지속되었다. 여기에서 턴테이블에 바늘대신에 연필을 올리면 다른 노래가 나오게 하거나, 예식장 주례소리나 하객들 이야기 소리를 같이 들리게 하는 식의 일상 음에 대한 도입이 이루어졌고, 작품 [looking breath]처럼 인간의 목소리와 숨소리, 심장박동 소리 등을 스피커를 원통처럼 이어서 들려주는 작품을 만들게 했다. 그것은 오디오 기술을 삶과 몸에 완전히 밀착해 보려는 시도의 하나이다.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에서 착안하여 관객이 구조물을 발로 밟으면 12개의 소리가 나게 하는 작품은 소리에 대한 관심을 몸에 대한 자각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부가적인 물리적 장치들과 별도로, 음자체가 인간에게 공감적인 움직임을 발생시킨다.

빅토르 주어칸들은 [소리와 상징]에서 박자의 흐름이 형성하는 것은 음들 가운데 있기 때문이 아니라, 듣는 사람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박자의 운동이 아니라, 우리 신체의 운동이다. 일련의 음들은 연속되는 음들의 음높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역동성이 다르기 때문에 운동으로서 들려진다. 어떤 음을 역동성으로서 하나의 방향으로서 하나의 가리킴으로서 듣는 것은 동시에 그 음을 초월해서 그 의지의 방향에서 듣는 것을 뜻하며, 예상되는 다른 음을 향해서 가는 것을 뜻한다. 주어칸들은 더 나아가 음악적 운동이 모든 운동의 핵심에 있으며, 모든 운동경험이 결국에는 음악적 경험이라고 말한다. 음악을 듣는 것은 정확하게 오직 운동의 핵심만을 듣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철학자들과 미학자들이 음악에서 이상적이고 추상적 운동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 속에는 이상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란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음의 운동은 가장 참된 운동이다.

작품 [sound talking--11 faced Kwan Eum]은 그의 초기 작품처럼 다소간 초월적으로 보이는 관음보살이 등장하지만, 상호작용을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11면의 관음은 관객의 목소리에서 발생하는 주파수에 따라 마스크들이 다르게 열리는데, 각자의 목소리만큼 관음보살을 볼 수 있다는 메시지이다. 작가가 설계하고 고안한 완벽한 오디오 장치에 의해 신천지 같은 비전을 제시하려는 이전의 방식은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 그 결과물이 달라진다. 그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개개인의 심리적인 상태가 다양하다는 의미를 넘어서, 그 결과가 즉각 피드백 되기 때문에, 관객에게 또 다른 심리적 충동과 행동을 낳게 한다. 김기철은 미국에서 5년간 공부하면서 소리를 물리적으로 재생하는 테크놀로지 보다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에 보다 밀접한 소리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조형예술가 이니 만큼 보여준다는 방식을 계속되지만, 이제는 기술보다는 내용이 강화되었다. 무엇보다도 소리는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의미는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관련된다. 가령 2007년에 다시 작업한 빗소리 작품은 물리적이거나 초월적인 빗소리가 아니라, ‘우산 안에서와 밖에서 듣는 빗소리가 다르다’는 것에 방점이 찍혀진다. 소리를 보여주고 소리에 반응하는 기계를 만드는 작업은 첨단기술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음석 인식기술은 아직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 부분은 김기철의 작업이 동시대 기술문화가 추구하는 초미의 관심사와 겹치는 지점이다.

관객이 남긴 궤적에 반응하여 소리 내는 작품 [sound drawing]은 소리에 스케일을 부여하고 사람이 크로스 형태의 테이블 위에서 선을 그으면 그 궤적이 소리(그랜드 피아노, 사인 웨이브, 작가 목소리, 주파수 값)로 치환된다. 이 작품은 발생 즉시 사라지고 마는 소리의 휘발성을 신체의 궤적으로 의식화한다. 비슷한 작품 [sound drawing-star spangled banner]는 성조기 위에 관객들로 하여금 낙서하게 하고 이에 상응하는 소리가 나오다가, 나중에 화면이 새까매질 때까지 선이 그어지면 하나의 톤만 나오는 것이다. 역으로 소리에 의해 글자가 쓰여 지는 작품도 있다. 작품 [si-ot-cogito]은 관객이 소리를 내면 ㅅ자만 있다가 자음이나 모음이 등장하여 결합된다. 말하는 주파수에 따라 글자들이 다르게 올라오며,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표음문자의 다산적인 문자 생성력을 보여준다. 자연음에서 음성언어, 그리고 음악 그 자체에 이르는 김기철의 관심사는 그 세 가지가 분화되기 이전의 원초적인 단계로 우리를 이끈다. 음악미학자나 철학자들은 언어의 시원으로서 시와 노래를 지적한다. 그것이 이후에 말과 음으로 나누어지는 과정은, 소리에 얽힌 계통 발생적이고 개체발생적인 역학관계를 가늠하게 한다. 계몽주의 시대를 살았던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표현성에서 정확성으로 진화한 언어의 계보를 다룬 바 있다.




루소에 의하면 최초의 목소리로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말을 하게 하는 정념의 종류에 따라 최초의 분절 또는 최초의 음이 만들어졌다. 그 목소리는 하나의 음이 된다. 운율과 음은 음절과 더불어 생겨난다. 운문과 노래와 말의 기원이 같다. 사람들이 모여든 우물가에서 최초로 말해진 것은 노래였으며, 최초의 역사, 연설, 법은 운문으로 되어 있었다. 정념은 이성에 앞서 말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웅변가나 음유시인에 의해 들려진 듣기 좋고 운율이 있는 언어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감동시켰다. 이후 문어체로 고착화된 담론의 방식은 구어체의 힘과 역동성을 잃게 되었다. 김기철의 요즘 작품이 소리에서 의미로 방점을 찍어가는 것은 소리의 언어적 의미 그 자체 보다는 의미와 소리가 분화되기 이전의 상황을 향해있다. 언어의 기원에 대한 루소의 가설은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언어는 더 정확해지면서 정념적인 면은 줄어들게 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런 언어는 감정을 개념으로 대체한다. 그것은 이제 마음이 아닌, 이성에 호소한다. 그로 말미암아 악센트는 사라지며 음절별로 더 명확히 발음된다. 그리하여 언어는 더 정밀하고 명확해지지만, 더 밋밋하고 더 희미하고 더 차가워진다. 이러한 분리가 근대의 과학기술주의나 예술지상주의 같은 지향성을 낳게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원래 사람들은 추론하기보다는 느끼는 것에서 시작했다. 루소에게 사람이 목소리를 통해내게 하는 것은 필요(배고픔도 목마름 등)라기 보다는, 정념(사랑, 증오, 동정심, 분노 등)이다. 처음 언어들은 단순하고 체계적이기 보다는 음악적이고 정념에 가득했던 것이다. 언어가 발전하면서 선율은 새로운 규칙들이 강요되어 조금씩 에너지를 잃어갔으며 음정의 계산은 억양의 섬세함으로 대체 되었다. 이로서 음악은 말에서 더 독립적이 되었고, 순전히 물리적인 진동의 결합효과로 국한된 음악은 또한 자연의 목소리였을 때 불러오는 정신적 효과마저 잃어버렸다. 인간의 신경을 자극하는 진동만으로 음들로 환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음의 물리학에는 마음에 미치는 음의 원리를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정서와 감정의 표시로서 작용하는 소리에 대한 김기철의 관심은 상기한 바의 루소의 가설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에게 자연음의 재현으로부터 인간의 음성에 반응하는 상호작용적인 작품으로의 관심이동은 쓰기와 소리를 연결시킨다. 그의 작품에서 관객의 쓰는 행위는 소리를 발생시키는데, 그것은 묵음이 됨으로서 그 에너지가 축소되어온 담론의 방식을 다시금 활성화시킨다. 쓰기는 음성 같은 악센트와 굴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목소리에 반응하는 김기철의 또 다른 작품은 목소리 자체에 내재한 의미를 부각시킨다. 루소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속하는 음의 효과는 물리적이라고 말하면서, 세상의 모든 인간은 아름다운 음을 듣는데 기쁨을 느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 기쁨이 그들에게 친숙한 음악적인 억양을 통해 고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혀 감미롭지 못할 것이며 강렬한 감각적 쾌락으로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기철의 작품이 음을 위한 음이 아니라, 언어에 내재된 음이나 음의 언어적 측면에 좀 더 주목하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그는 말 자체보다는, 음과 언어가 분기되기 이전의 상태로 소급함으로서 언어와 음이 가졌던 본래적 힘을 재발견하려 한다. 언어와 음은 분리됨으로서 서로를 빈약하게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연음조차도 인간적(즉 언어적) 계기가 존재한다. 루소에 의하면 자연은 화음이 아니라, 선율을 유발한다고 본다. 그리고 선율은 목소리의 억양을 모방함으로서 원망과 고통 그리고 환희의 외침, 위협, 탄식 등을 표현한다. 정념에 관한 모든 목소리의 표시는 선율의 원동력이다. 어떤 모방에서든 언제나 일종의 이야기가 자연의 목소리를 보충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소리를 통해 소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음악가는 생각은 틀렸다.

루소는 음의 힘을 공기의 작용과 신경 섬유의 흥분을 통해서만 고찰하는 음악가들은 음악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반박한다. 그들이 그 예술을 순전히 육체적인 인상들에 가까이 놓을수록 그 예술을 그것의 기원에서 멀어지게 한다. 말의 악센트를 버리면 음은 귀에는 더 시끄러운 것이 되며, 마음에는 더 즐겁지 못한 것이 된다. 음악은 이미 말하기를 멈춘 것이며 곧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완벽한 화음을 가지더라도 아무런 인상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음악가의 기술은 대상의 지각할 수 없는 이미지를 그 대상이 응시자의 마음에 불러오는 감정들에 대한 이미지로 대체하는데 있다. 그의 기술은 자연을 직접 묘사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볼 때 마음속에 느끼는 것과 동일한 감정들을 자극할 것이다. 루소의 가설은 예술의 언어적 원천을 소급하는 현대 예술의 경향에도 설득력이 있다. 현대의 미학자 빅토르 주어칸들은 [소리와 상징]에서 음악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대상들의 세계로 열려있는 창문으로서 우리는 음악을 통해 세상을 내다볼 수 있다고 본다. 현대의 예술가들에게 그것은 창일뿐만 아니라, 세계의 구성 원리이기도 하다.

주어칸들에 의하면 인간은 청각적으로는 내면적인 삶을 획득하고 시각적으로는 외면적인 삶을 획득한다. ‘인간성은 내적인 삶의 연속적인 선율 바로 그것이다’(베르그송)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각 경험 중에서 유일하게도 음은 전적으로 살아있는 생(生)에 속는 것이다. 음은 오로지 살아있는 것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각적 이미지와 달리 시간 속에서 생성하고 소멸하는 음은 불완전해 보인다. 주어칸들은 음의 불완전성을 논하면서, 음은 아직 현재하지 않은 어떤 것의 출현으로 향해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현재하는 것의 소멸을 향해 있다고 말한다. 청각적 불완전은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 시간을 요한다. 음악에서의 완성을 향한 요구는 현재의 존재를 그치고 어떤 다른 것, 즉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출현하도록 하는 요구이다. 이러한 불완전성은 시각을 통해 보충될 수 있다는 기대를 낳는다. 시간을 공간화하려는 시도는 예술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숙원이었다. 그것은 ‘미술과 음악의 만남’같은 매우 문화 아이템으로 대중에게 제공되곤 하는데, 김기철에게 양자의 만남은 보다 근본적인 층위에서 시도된다.

보통 음악의 영역은 시간이며 그림의 영역은 공간이라고 간주된다. 루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신호들이 더 정확한 모방을 가능하게 하지만, 관심을 끄는 일은 소리를 통해 더 잘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살아있는 존재만이 낼 수 있는 소리를 과학적으로만 접근하여 생기는 오류 중의 하나가 음의 분해에는 빛의 분해에서와 동일한 관계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유사성을 좇은 것이다. 각 색상은 그 색상을 부여하는 빛의 굴절 각도에 따라 결정되며 음 역시 주어진 시간 내의 소리체의 진동수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그 각도들의 관계와 그 진동수들의 관계는 동일하므로 유사성은 명백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 유사성은 이성에 속하는 것이지, 감각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에는 많이 억압되었지만 인간의 언어에는 논리와 추론 이전에 선율이 내재되어 있다. 선율은 데생처럼 대상의 윤곽을 결정한다. 김기철의 작품에서 매순간 사라지는 음에 가시적인 윤곽을 부여하는 시도는 극단에 이르는 음향학의 시도나 싸이키델릭한 환상, 또는 애매한 장르 간 절충에 의해 이루어지기 보다는 인간의 언어에 내포된 음성의 의미를 작품의 내재적인 요소로 끌어들이는데 있다. 복닥거리는 인간사를 다루다가 시간이 지나면 손쉽게 ‘초월의 경지’로 접어들곤 하는 관념론적 해결책이 흔한 한국의 미술문화 풍토에서, 그는 다소간 초월적 태도에서 구체적인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이러한 진보적 역발상은 오랫동안 소리에 천착하면서 그것의 무한한 미학적 가능성을 발견해나가는 끈기는 물론, 테크놀로지에 대한 보다 내적(인간적)인 이해방식을 통해 가능했다고 본다.

출전; [디지脫, 다중적 감성] 전 도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