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 바로 신나게 칠해진 그림들은, 명확히 형태 지워진 외곽선 안을 색색의 크레파스로 꾹꾹 눌러가며 채우는 아이들 그림 같은 진중함과 활기가 있다. 조은지의 작품들은 결코 멋진 장면이나 심오한 내용,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굉장한 기법으로 연출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낙서화 같은 유치한 표현 형식을 취하는 것도 아니며, 추상화처럼 구체적 도상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분방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부정어법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는 애매한 작품들에는 작가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아웃사이더로서의 감정이 진하게 배어있으며, 그것이 조은지 작품의 매력이다. 그녀는 조각을 전공했지만, 이 첫 개인전에서 그림을 주로 전시한다. 그림 10여점에 하얀 석고 기둥 깍은 것 같은 조상들 5개가 전시된다. A3 사이즈의 스케치 북에 그려진 수많은 드로잉들이 이번 전시 작품의 바탕이 되어 주었다. 풍경의 정면을 그리면서도 뭔가 각이 제대로 맞지 않는 듯한 형태는, 그녀가 왼손으로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붓 대신 오일 바를 쥔 왼손으로 그리기는, 훈련된 오른 손으로 그리기와 달리, 어눌하면서도 무의식적인 터치를 살릴 수 있다. 단지 드로잉이든 그림이든 왼손으로 자꾸 그리다 보니, 오른손처럼 능숙한 표현이 나오는 것이 걱정이라면 걱정이다.

글씨와 함께 배열된 작품에서, 왼손으로 하는 작업은 명확한 외곽선을 맞추기가 힘들다. 안료가 마르기 전에 진행하는 속도감 있는 작업과정에서 번지는 듯한 표현이 가능했다. 이를 통해 독학 스타일의 그림이 나왔다. 많은 작품이 동서양의 유명 역사 유적지나 관광지를 소재로 한다. 작가 자신도 한번쯤 가본 장소들이지만, 그 장소들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전형성을 띈다. 요즘은 여행과 사진의 대중화로, 특별한 장면들을 담아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작가는 장면의 익명성을 고집한다. 노틀담 성당이나 남대문 등은 아예 인터넷에서 내려 받은 사진을 사용했다. 장소성이 특별히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작가에 의하면, 이러한 소재들은 필연적이기 보다는 그리는 즐거움을 위한 수단이다. 그렇다면 완전히 추상화로 경도 될 수도 있을 법한데,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조은지의 작품에는 자신을 이야기를 엮어가는 중심적인 도상들이 있으며, 미술이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고수한다. 관객이 알아 볼 수 있는 명확한 소재들은 하나의 코드로 호출된 것이고, 여기에 색을 입히고 글을 배열해 또 다른 장면으로 탄생시킨다.

조은지의 작품은 원래의 장면을 더 멋지게 연출한 것이 아니듯, 덧붙여진 글자도 심오한 의미와 거리가 있다. 이미지 위에 배열된 글씨들은 거의 국내외의 노래 가사이다. 그것도 지나간 지 한참 되는 유행가 가사들이다. 한때 누구나 익숙하게 듣고 불렀던 가사지만, 그것이 난데없이 현시될 때 낯선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낯설음에는 시공간의 간극, 청각성과 시각성 간의 간극이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가사들은 그림의 메시지와 필연적인 관계는 없지만, 그림을 그리고 나서 떠오른 것이다. 작가의 두툼한 드로잉 북에 그려진 이미지들에도 어김없이 글씨는 함께 한다. 자신이 창안했다고 할 수 없는 장소의 이미지에 유행가 가사를 덧붙인 것은 이중의 인용이다. 그림이라는 형식에 유행가 가사를 집어넣는 것, 그림과 함께 배열된 글이 이미지를 보충해주는 중요한 메시지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그림이나 글자에 가정된 권위를 삭감하는 일이다. 통상적으로 작품 안에는 볼만한 가치가 있는 창조적인 장면, 읽어야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문장들이 새겨져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유명한 관광지인 노틀담 성당과 그 주변을 그린 그림 아래에는 붉은 바탕에 에디드 삐아프의 노래가사인 ‘과거가 무슨 상관 이냐’가 불어로 적혀있다.

글자 옆에 끼어 있는 개의 경우, 세상의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하는 작가의 또 다른 자아로, 초라한 행색으로 등장하면서 장중한 장면을 소격시키는 역할을 한다.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이집트의 유적지, 그것이 가지는 기념비적인 장면에도 주황색 하늘을 배경으로 작은 개가 끼워져 이물감을 준다. 그 개는 장면에 관련된 작가의 발언을 대신 전달한다. 에디드 삐아프의 불어가사 ‘모든 것은 너와 함께 오늘 시작 된다’는 문장은, 람세스 2세의 조상은 오래된 것이지만 장면(또는 작품)을 본 지금 뭔가 시작되는 이질적인 느낌을 담고 있다. 인도의 유적지 타지마할 상공에 떠 있는 비행기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색안경 쓴 개는 영원성의 역설적 의미를 생각게 한다. 일본 동대사를 그린 장면에는 소실점 위치에 개 한 마리가 앉아 있는데, 하늘색으로 칠해진 하늘과 황토색으로 칠해진 땅이라는 상투적인 공간감을 표현한다. 격렬한 터치가 살아있는 보라색을 배경으로 서 있는 남대문 안의 개는 어느 작품보다 크다. 우리 곁에 늘 있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상실감이 노래 가사와 함께 전달된다. 조은지의 작품에서 말라빠진 등선이 그대로 드러난 초라한 개는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대역이다.





조은지는 이러한 개의 이미지를 서양 미술사의 왕실 초상화 등에서 발견했다. 여기에서 개는 집단의 일부처럼 등장하지만, 집단과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주변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작가는 세상에 끼워지기 힘들며 존재감도 없는 개는 자신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예술가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주변인의 위치가 드러나 있다. 예술은 자율성을 쟁취한 근대이래로, 소외를 자신의 존재조건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근현대 예술은 항상 ‘어떤 것의 결핍 위에서 솟아오르는 것’(토마스 만)이다. 지배적인 동일성의 질서로부터 배제된 예술가들의 존재 조건 자체가 ‘지금 여기’의 삶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조은지의 경우 주변적 존재로 간주된 개가 아웃사이더를 상징한다. 작품 중에서 안경 낀 개는 눈을 가림으로서 그 정체성이 더욱 약화된다. 그러나 귀퉁이의 아웃사이더들은 때로 주역이 되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신성한 부처 상 앞 개떼들을 그린 작품이 그것이다. 본존불상은 그 시대 예술의 정점에 놓인 도상인데, 그 앞에 개를 시위하듯이 정면에 배치한 것이다. 불상의 배경색과 달리 개들의 배경색은 황금색이다. 도발적으로 관객을 응시하는 개들이 가득한 작품도 있다.




그림에 삽입된,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가사 ‘너는 하운드 독에 불과하다’는 욕에 가깝지만, 은색 바탕에 위풍당당하게 그려진 개의 초상은 비속어에 담긴 개의 이미지를 뒤집는다. 푸른 하늘 위의 쌍엽 비행기가 날고,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는 광장을 채우는 개들은 안경을 쓰고 있는데, 여기에서 개는 군중의 이미지와 교차된다. 조은지의 작품에서 개는 아웃사이더, 즉 타자이자 소수로 나타나지만, 군중으로 분한 개들은 동일자를 이루는 것이 타자이고, 소수는 다수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를 연구한 저서 [소수집단의 문학을 향하여]에서 소수자로서의 예술을 정의하면서, 소수와 다수는 수효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며, 소수가 다수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군중들 개개인은 결코 군중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으며, 아웃사이더로서의 작가가 표현한 소수자적 삶은 대중에게 보편적인 공감대를 자아낼 수도 있다. 이때 소수의 의식은 즉각 다수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조은지의 작품에서 개와 더불어 자주 나타나는 또 하나의 상징적 도상은 비행기이다. 부친이 항공 계통에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어릴적부터 비행기와 친숙했던 작가에게 운동장에 드리워진 비행기 그림자는 마음 속 깊이 남아 계속 회귀한다.

여행지의 이미지도 그렇고 유행가 가사도 그렇고, 다소간 과거 지향적인 그녀에게 문명의 최첨단 이미지를 상징하는 비행기조차도 유물 같은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작품에 종종 나타나는 쌍 엽 비행기는 인류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낭만적인 생각이, 신속한 이동이라는 익숙한 편리성에 묻히지 않은, 비행의 역사 초창기의 기대감을 간직하고 있다. 터치가 강한 푸른 바탕에 쌍 엽 비행기가 날고, 그 안에 고글을 낀 개가 타고 있는 작품은 이 전시의 작품 중 가장 유쾌한 장면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아웃사이더가, 세상에서 배제된 김에 초탈하는 면모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자신을 소외시키는 현실로부터의 탈주는 먼저 조형적으로 이루어진다. 미끌어지듯 칠해진 푸른 바탕이 그것인데, 의식이 끼어들 틈이 없이 빠르게 그어진 선들은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을 생각하게 한다. 제어되지 않는 선들이 횡행하는 자동기술법은 타자의 목소리를 수렴하는 장이 된다. 이 작품에서 탈주의 두 번째 방식은 도상적인 차원에 있다. 비행하는 개의 이미지는 카프카의 소설에 나타나는 동물 변신처럼, ‘정신적인 영토화를 벗어나는 절대적인 탈영토화’(들뢰즈)를 향한다. 여기에서 작가는 인간이기를 멈추고 동물로 변신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동물변신은 모든 형태, 의미화, 기표, 기의를 와해시켜서 비형태, 비영토화의 물결, 무의미의 기호에 자리를 내준다. 거기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버려진 물질 위로 떠다니는 동작, 떨림, 문턱들뿐이다. 들뢰즈가 카프카 식의 동물변신의 이미지를 통해 권하는 것은, 인간적인 껍질을 벗고 육체의 어떤 강밀한 영역을 통과함으로서 원래 우리에게 속한 영역을 회복하는 것이다. 선과 색채라는 조형적 요소가 서로를 침범하며 뒤덮은 창공에도 이러한 강밀성이 존재한다. 인간을 대신한 개, 오로지 즉발적인 근육의 반사작용에 따르는 배경의 도색 과정은 이성 대신에 광기를, 문명 대신에 자연을 전면에 내세운다. 의식에 의해 제어되지 않은 힘, 동일자의 질서를 뒤집는 타자의 반전은, 동물변신에서 야기될 수 있는 광기의 분출을 야기하는 것이다. 동물성은 음침한 자연의 영역에 존재하였으며, 타자로 간주되었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의 궁극적인 진실인 동시에 인간성을 포기하는 광기가 언제나 발생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동물성은 인간의 마음에 숨어있는 어두운 포악성, 황폐한 광기를 드러내준다. 이 작품은 푸코가 묘사한 광인의 언어처럼, 형상은 더 이상 스스로 말하지 않으며, 사물을 묘사하는 지식과 형상의 간격은 넓어져서 꿈처럼 자유롭게 된다. 그러나 개로 상징되는 비루한 존재 조건은 이러한 초월을 순간의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조은지의 작품에서 아웃사이더로서의 자신이 투사된 대상은 개 뿐 아니라, 노숙자로 나타난다. 조각에 담긴 초상은 서울역에서 만난 노숙 인들을 소재로 하였다. 흰 사각 기둥 위에 조상은, 단지 좌대 위에 올려진 상이 아니라, 전체 통 중에서 위만 깍은 듯한 느낌이다. 자족적으로 완성된 것이 좌대 위에 올려졌다기보다 덩어리로부터 형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놓여진다. 그것은 화면 전면에 등장하는 개들처럼, 소외된 타자를 기념비적인 것으로 고양시킨다. 조은지의 조각에서 안경을 낀 노숙자와 개의 조상은 동렬에 놓여진다. 이성의 확실성과 도구적 유용성이 지배하는 동일자의 질서 바깥에 던져진 자들에서 만큼, 예술가에게 공감을 자아내는 캐릭터도 드물 것이다. 조각들에도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다듬지 않은 덥수룩한 머리의 조상에 붙여진 ‘wind’라는 단어는 쓸쓸한 아웃사이더들이 놓인 조상들 사이로 휭 하니 부는 바람을 표현하고 있다. 깍고 칠하기를 반복하면서, 칠한 것이 지워지기도 하여 손상된 느낌을 준다. 조은지의 조각은 깍다 만 듯한 칠하다 만 듯한 거친 형태가 남아 있다. 그것은 좌대 위에 놓여 질 만 한 조상의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 왼손으로 그린 그림들이 3차원 상으로 튀어나온 듯한 이 거친 형태들은 상처받은 존재이며, 동시에 세상사를 지배하는 원리에 마모되지 않은 거친 각들을 그대로 노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