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展
10.14 - 11.3 인터알리아
10.14 - 11.3 인터알리아
이재훈이 근 몇 년간 몰두하고 있는 ‘Unmonument’라는 주제의 한 장인 ‘Noble Savage’전은 벽화기법을 통해 기념비를 종이위에 재현하면서 산자를 짓누르는 죽은 자들의 기념비들을 풍자한다. 근대 계몽주의 시대의 ‘고귀한 야만인’이라는 루소의 개념으로부터 빌려온 전시부제는 악몽같이 석화된 인물들이 근대적 인간의 정치성을 탐구한 결과물임을 예시한다. 선사시대의 유적지로부터 발견될 수 있는 기념비는 역사주의를 통해 시간의 흐름이 가속화되기 시작한 시대, 즉 근대에 민족과 국가,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정치적 수사학을 담아내곤 하였다. 시대정신이 상징화된 기념비는 시간의 도전을 이겨내기 위해 기념비적 양식이라 할 만한 것을 창조하지만, 그것들은 불가피하게 낡은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낡은 것은 사라지지 않고 구조화되어 말랑말랑한 신체와 정신에 각인된다. 이재훈의 작품 속 권력 투쟁에 몰두하는 자동인형으로서의 인간들이 그러한 기념비적 구조의 생산물이다. 기념비에 새겨진 말들은 지고한 목표나 질서가 아니라, 맹목과 무질서를 낳는다.

가로 5미터가 넘는 대작 [Unmonument-다들 잘하고 있습니까]는 ‘참! 잘 했어요’라는 도장이 찍힌 기념비를 둘러싸고 인간과 기념석이 한데 뒤엉켜 있는데, 모두들 눈이 가려있거나 외눈박이들이다. 인간사회를 품고 있기에는 빈약해 보이는 황폐한 자연, 죽은 자(패배자)와 산자(승리자)가 한 덩어리가 된 묵시록적 비전은 자연과 사회를 보는 작가의 비관적인 관점이 나타나 있다. 자연 상태는 인간을 빈곤이나 죽음으로 전락시킬 수 있기에, 홉스나 로크같은 고전적인 정치 사상가들은 사회계약을 통해서 야만적인 자연 상태를 극복하려 하였다. ‘고귀한 야만인’을 상찬하는 계몽적이면서도 낭만적인 루소의 개념은 자연 상태를 보다 긍정적인 것으로 보지만, 이재훈의 ‘Noble Savage’ 시리즈에 나타나듯, 인류의 과도한 밀집과 쏠림에 의한 파멸상태는 ‘자연적으로 만족과 필요의 균형이 이루어지는’(루소) 태초의 평화 상태를 종식시킨다. 애초에 자연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근대의 사회계약은 인간 사회의 폭력성을 없애지 못했다. 자연의 폭력에 사회적 폭력이 더해졌을 뿐이다.
근대의 고전적 이상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폭력이 지배하는 자연 상태’(홉스)는 극복되지 않았던 것이다. 홉스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존 로크는 [통치론]에서 자연 상태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자연법이 있으며, 그 법은 모든 사람을 구속한다고 보았다. 그 근거는 ‘남의 피를 흘리는 자는 제 피도 흘리게 되리라’라는 창세기의 자연법이다. 사회계약론을 낳았던 근대의 이성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준 공통의 규칙과 척도’(로크)와 밀접하다. 사회적 평등을 지향하는 진보주의와 초월적인 비전은 매우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계몽주의와 더불어 활발한 국민국가를 형성했던 근대의 민주주의는 점차 그 초월성과 보편성을 잃어갔으며, 또 다른 배제와 지배의 척도가 되었다. 생산력의 혁명을 통해 자연을 선점하기 시작한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통해 동일성의 논리를 전파했다.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정체(政體)들이 앞 다투어 건립했던 기념비들은 힘 있는 자들의 공허한 수사학으로 전락했다. 묘비 석들과 다를 바 없는 낡은 구조물들이 그러한 기념비들의 운명을 나타낸다.

초월성과 보편성이 사라진 시대에 기념비는 무너져 내리고 있지만, 동일성의 논리는 이미 또 다른 차원으로 옮겨간 뒤다. ‘고귀한 야만인’ 시리즈에서 인간들은 한 사회의 지배 논리가 새겨진 기념비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려고 집단적으로 경쟁하지만, 무덤가에 홀로 있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도 지배 질서의 각인은 선명하다. 부서진 손바닥에 새겨진 도장이나 무덤에서조차 손을 뻗어 ‘상’, ‘검’ 등으로 표기된 공인된 가치에 열광하는 단말마적 몸짓이 그러하다. 니이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어떤 것이 기억에 남으려면, 고통으로 달구어져야만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권력의 기술은 잔인한 기억술을 통해 유지되고 확산된다. 이재훈의 작품 속에서 말이 지배하는 로고스중심주의 문명은 이제 코드화된 원격 지배 기술을 통해 살았던 자와 산자, 앞으로 살아갈 자를 총괄하는 권력의 그물망을 짜고 있다. 이전 작품보다 좀 더 띄엄띄엄 놓여 진 고고학적 도상들과 맥락이 모호한 기표들은 나날이 촘촘해지는 지배의 그물망을 느슨하게 하여 권력을 누수 시키려는 전략으로 보여 진다.
출전_아트 인 컬처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