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공식적 미술 교과 시간을 벗어나면, 공기처럼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캐릭터의 세계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미적이고 개념적인 기준으로부터 탈피하여, 취향에 맞는 끼리끼리의 문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유모어와 냉소는, 지루함 보다는 재미를, 주류 사회에 대한 화합과 융합 보다는 공격적 성향이 강하다. 첫 개인전 ‘미미에게 진심인 남자’는 전시부제 자체가 네이버의 웹툰에서 나온 말로, 일명 ‘오타쿠’적인 특성이 있는 사람을 지칭한다. 미미는 지배적 가치 기준에 미달인 누군가의 모든 것을 받아주는 인형으로, 남자는 미미에게 열정을 쏟음으로서 소외된 자아를 보상받고 대리만족 한다. 오타쿠는 특정 취미를 중심으로 모인 동호회 같은 소수의 인터넷 하위문화에서 주로 통용되지만, 물신주의나 편집증적인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대중심리와도 연결된다.
오타쿠가 단지 ‘루저’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특징이라고 보는 이철승은 기존의 가치관과 다른, 그들의 대가없는 열정에서 예술과 공유하는 일정 부분을 발견한다. 그에게는 한때 몰두 했던 서바이벌 게임 등 인터넷 동호회의 흔적들이 발견되지만, 풍자적인 캐리커처처럼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이상(理想)적이기보다는 이상(異常)적이다. 그들이 이상한 괴물처럼 나타나는 이유는 지배적 가치를 벗어나 그들만의 해방구를 이루려 하지만, 오염으로부터 차단된 순수한 영역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노동과 여가의 관계가 그러하다.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의무인 노동이 인간을 소외시킨다면, 여가 역시 소외되지 않을 수 없다. 인류학자 R. 카이유와는 [놀이와 인간]에서 놀이가 타락하면 즐거움이었던 것이 고정관념이 되고, 기분전환이었던 것이 강박관념과 집착이 되며, 불안의 원천이 된다고 하였다.

이철승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오타쿠’로 대변되는 인터넷 하위문화의 양식을 빌어서, 양 영역을 동시에 풍자하는 듯이 보인다. 작품 [물아일체]에서 벽에서 돋아난 입이나 코 같은 부분적 신체나, 작품 [Face]처럼 벽에 걸린 마스크 같은 얼굴상들의 공격적 인상은 현실과 가상을 명확히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악의적 적대성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과 기계는 덜컹거리면서 만나고, 금속 봉이 박힌 원구 안에 입들이 튀어 나온 작품 [Atom]처럼, 기계적 형식으로 유기체가 완전히 포획된 모습도 발견된다. 기계적인 것은 유기적인 것을 침식함과 동시에 확장하는 이중성을 띈다. 이철승은 양자의 경계를 드러냄으로서 그로테스크함에 내포된 사실성과 환상성을 동시에 풍자하는 것이다. 놀이 문화 속의 이 괴물들은 현대의 직업문화가 만들어내는 인간의 짝패이다.
가령 그의 작품에서는 마초 같은 남성성을 풍자하는 작품이 많이 등장한다. 작품 [남자라면 바이크!]에서 요란한 복장에 어울리지 않는 세발자전거를 개조한 오토바이 옆의 남자들, 작품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에서 완전 군장을 한 복장에 분홍 요술봉을 들고 있는 고무장갑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서, 공격적이거나 득의만만한 그들의 미소 이면에 강해보이고 싶은 욕망의 허구성이 드러난다.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적인 모습, 반대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모습, 이 상반된 모습들은 끝까지 고집하고 관철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취약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중간 영역에서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 변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 그들은 수염이 돋아난 어른이지만 아이들의 신체 비례나 아이들, 심지어는 여성적인(것으로 간주된) 취향이 있다. 그들은 개인을 소외시키는 지배적 질서에 편입되지 않기 위해 어른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우습게 생긴 야만적인 괴물은 외모나 공인된 직업을 평가 기준으로 삼는 현실적 질서에서 주변부에 놓여 있지만, 인터넷 하위문화에서 인기 있는 캐릭터이다. 이철승의 작품에는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부분 ‘오타쿠’로 간주되는 이들이 남성인 점도 있지만, 그의 작품 속 캐릭터에 공감하고 감정이입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의 작품은 사회가 요구하는 공식적 가치와 소수자의 취향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 거기에는 지배질서로부터 소외되고 그들만의 놀이 공간을 해방구로 삼는다는 점, 개인을 조각조각 분할해서 기능으로만 환원하는 생산-관료주의의 연합체로부터 일탈하는 것에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그들처럼 예술가도 소수자이다. 예술도 공식적인 제도로서 엄연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제도만을 통해서 자신을 온전히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예술가로서의 길을 선택함으로서 소외는 가중된다.

일과 놀이를 일치시키지 못했던 인터넷 하위문화의 소수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취향에 몰두하기 위해서는 달갑지 않은 지배적 가치에 한쪽 발을 담가야 하는 것이다. 예술만을 위해 100% 몰두하는 삶은 이상이다. 이러한 이상은 ‘예술을 위한 예술’에서 전형적이다. 우리는 예술가들이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소외되기 시작하던 시기에 발생한 ‘예술을 위한 예술’과 사회적 삶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미학자 G. 루카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시민적 삶을 정반대의 것으로 본다. 그에 의하면 ‘예술을 위한 예술’은 광휘라든가 또는 온갖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삶,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기분과 정조의 숲 속에서 추는 영혼의 도취적이고 자유분방한 승리의 춤 같은 것이다. 그러나 시민적 직업에서는 아무리 성공을 거둔다 하더라도, 이것이 인격을 고양시키는 열기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삶이 시민적으로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민적인 직업을 통해서이다. 그러한 삶이 갖는 시민적 규율성과 질서 이면에는 자신의 자아에 대한 극도의 아집적이고 무정부적인 몰두가 숨겨져 있다.
그러나 앞서 인용한 루카치의 이상과 달리, 시민적 삶과 예술을 화해시켰던 작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하위문화 역시 대중문화나 예술처럼, 일련의 자본주의사회에서 보편화된 지배질서인 시장 제도 속에 얽혀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은 노동시장이 왜곡되고 억압될수록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시장이다. 그러나 오타쿠, 폐인 등으로 대변되는 인터넷 하위문화의 정체성과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동일시될 수는 없다. 단적으로, 이철승은 자신의 작품을 그가 놀았던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 소통시키지 않는다. 비록 많은 예술가들이 윈도 창을 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할지라도, 기술적인 인프라가 예술적 소통을 저절로 활성화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의 소통 역시 ‘이곳’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것임에 틀림없다. 예술작업과 인터넷 사이에는 무엇보다도 속도의 차이가 있다. 많은 심신의 노동이 투자되어야 하는 밀도 높은 작업과, 거의 실시간으로 오며가며 가볍게 던져지는 익명의 메시지와는 화해할 수 없는 거리감이 존재한다.
아마도 작업에 지장을 줄 수 도 있는 무분별한 피드백이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인터넷 문화는 1차적인 생산물보다는 복사나 링크 같은 2차적 생산물이 주종을 이룬다. 물론 생산과 재생산을 나누는 엄격한 기준은 없을지라도, 예술작업이 생산 쪽에 더 가까운 것만은 사실이다. 이철승의 작업은 작품 [웰컴 투 마이 월드]처럼 건담모형 같은 기존의 애니메이션 피규어에 얼굴을 새로 만들어 붙인 작은 스케일의 작품들도 있지만, 대부분 90-110 cm정도의 높이로, 실제 공간에서 대상을 마주하는 느낌의 규모를 가진다. 그것들은 모두 흙을 주물럭거리며 시작해야 하는 수작업의 결과물이다. 현재까지 이철승의 작품은 그가 몰입했던 어떤 문화를 미술 쪽으로 가져오는 단계에 머문다. 미술이 자신과 역학관계에 있는 주류 문화나 하위문화에 대해, 역으로 어떤 영향력을 줄 수 있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다. 받은 것을 성공적으로 되돌려주는 것이 예술이 가지는 주요한 자질이기 때문이다.
출전_2009 SeMa 영 아티스트 워크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