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덕 전
9.16 - 10.30 표갤러리


스쳐지나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움푹 패인 ‘네거티브 조각’에 담은 이용덕의 작품들은 존재와 부재의 관계, 그리고 시선의 여러 갈래와 융합을 생각하게 한다. 길거리에서 찍은 사진에서 출발했을 이미지는 관객에게도 움직이는 관찰자의 역할을 부여한다. 걸어가면서 보는 시점을 통해 음각 부분은 양각으로 전이되며, 고정된 형상들은 관객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착시효과를 자아낸다.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기이한 이미지의 실체가 궁금하여 작품 앞에 똑바로 선 순간 펑 뚫린 실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의 작품은 환영이 자연스러울수록 그 밑바탕이 되는 현실은 생경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부조에서와 같이 일순간에 사건의 전개를 압축하는 장면의 연출이 아니라,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알맹이가 쑥· 빠져버린 모습을 통해, 더 완벽한 실재의 환영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작품은 자족적인 실재감을 가지는 전통적인 조각과 매우 다르다.

사진으로부터 출발한 이미지는 양각 모델링과 캐스팅 과정을 거쳐, 평면과 결합한 네거티브 조각에 색채와 관객의 시선이 부가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매체 계들 사이의 복잡한 전이의 과정을 통해, 어떤 차원은 삭감되고 어떤 차원은 부가된다. 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이 작품들은 비움을 통해 채워지고, 떠남을 통해 관계가 활성화되며, 시시각각의 추이 속에서 완성 된다. 안과 밖은 수시로 자리를 바꾸고, 매번 시공간은 갱신된다. 그렇게 해서 주차된 차, 아이를 업고 가는 아줌마, 한껏 멋을 부린 청춘남녀 같이, 거리의 평범한 장면들은 놀라울만한 생동감으로 되살아난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디를 가는지, 몸에 새겨진 기표들이 무엇을 상징하는 지 따위는 삭감의 원칙에 의해 괄호 안에 넣어진다. 그들이 놓여 진 맥락도 희미하게만 제시될 뿐이다. 작가가 발견한 실험적 장치들은 대상들을 지나치며 떠올렸던 순간적인 감흥을 되살리는데 집중한다.




예술작품에 있어 세상을 보기 위한 장치와 틀로서의 위상은 그 본래의 역할이 망각되고 물화되어 추상적으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용덕의 작품에 고여 있는 독특한 생기는 삶과의 끈을 결코 놓지 않음으로서 생겨난 것이다. 이용덕은 선험적인 구조로서의 이념, 그리고 파악된 순간 폐기될 도구적 수단으로서의 개념이라는 전형적인 표상의 방식을 멀리 따돌리고, 삶 속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경이로운 체험을 복원하려 한다. 세상과 생경하게 또는 자연스럽게 만나게 하는 틀로서, 착시를 야기하는 중요한 바탕인 평면은 거울과 비교된다. 그는 빌자나 시릭과의 대담에서 ‘평면은 대척점의 기준이 된다. 자신의 존재는 드러내지 않으면서 비춰진 모습만 담아내는 거울의 표면과 같다’고 말한다. 거울 안에 있는 네거티브 부분은 거울 밖의 포지티브를 담아내는 틀이 된다는 것이다. 작품 [tilting over]는 손을 든 세 남자 여러 각도로 포착하며, 그 앞에 설치된 작품 [I cant take a bath in blue]는 푸른색 반영의 끄트머리에 위에 손을 든 남자를 보여준다.

환조와 네거티브 조각은 설치형식으로 묶여 있는데, 이를 통해 작가는 거울 같은 실제의 가장자리에 머뭇거리는 창백한 몸뚱아리와 아쿠아 블루로 펼쳐진 대양 앞에 서있는 음각 상들의 사실적 환영을 대조시킨다. 작품 [opening the darkness]는 여자 아이가 통로로 들어가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는데, 가까이 놓인 환조 작품 [taking a risk]는 크기가 다른 세 명의 소녀가 한 발만 땅을 딛고 나머지는 심연 위에 띄워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아무생각 없이 자동반사적으로 내딛는 걸음을 받쳐주는 토대는 그 본래적 확실성이 상실되어 있다. 오히려 소녀의 한걸음 한걸음에 대지의 조각들이 임시방편적으로 배열되고 있는 듯하다. 손자국이 그대로 드러난 거친 모델링과 분홍빛으로 대략 칠해진 표면은 그 앞에 설치된 네거티브 조각이 빚어내는 압도적인 환영에 비해 취약하기 그지없다. 같은 인물의 연속 동작인지, 서로 다른 시공간 속의 인물을 한군데 모은 것인지도 불확실하다. 현실은 작가가 고안한 장치 속에서만 불확실성이 해소되고 완결될 뿐이다.

두상 작품 [first kiss in pink] 역시 애매하다. 분신처럼 보이는 외모로 인해, 두 남자가 벌이는 애정 행각은 실제상황이라기보다는 거울반사상이 펼치는 가상의 유희처럼 보인다. 이용덕의 작품에서 네가티브와 포지티브가 출발하는 제로베이스인 평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있기도 하다. 그 그림자는 보여 지는 대상과 보는 주체를 결합시킨다. 작품 [outshined]와 [overshadowed]는 그림자 안에 진입한 피사체가 음각으로 조형되어 있다. 피사체를 관찰하는 거대한 실루엣은 움푹 패인 대상들을 보자기처럼 싸안는다. 평면 위에 드리워진 거대한 실루엣은 실재의 흔적을 바라보는 관객의 그림자와도 중첩될 수 있다. 작품 [the car], [behind me], [near or far]에는 음각된 사물이나 인물 아래로 떨어지는 그림자가 평면 위에 그려져 있다. 평면 위에 그려진 그림자는 음각된 이미지가 이동하는 관객과 시선을 맞추는 와중에도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다.




조각에서와 같이 그림에서도 관습화되어있는 환영의 장치는 작가가 고안한 또 다른 환영의 장치와 비교된다. 본래적으로 착시에 의존하는 조형예술은 암묵적으로 작가가 고정시킨 이상적인 관찰지점이 있는데, 이용덕은 네거티브 조각을 통해 이 지점들을 무한대로 확장하면서 무력화시킨다. 그것은 대상을 객체화는 주체의 이상적인 지점이 아니라, 양자가 상호 맞물려 있는 상황을 부각시킨다. 상호작용하는 시각의 문제는, 응시와 시선의 분열을 논한 라깡의 논문을 통해 부연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라깡에 의하면 응시가 시선에 앞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나는 한곳만을 바라보지만 나는 모든 방향에서 보여진다. 응시는 시야에서 우리가 발견할 것을 상징하며,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로 갑작스럽게 접하게 되는 경험, 즉 거세 공포를 형성하는 결여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사물과의 관계가 시각을 통해 이루어지고 재현의 여러 형태들로 배열될 때, 무엇인가가 빠져나가고 사라지고 단계별로 전달되며 숨겨져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응시이다. 평면시각에 한정되는 시선에 비한다면 응시는 빛의 유희이다. 응시를 유도하는 빛줄기 속에서 우리는 대상을 볼 수 없다. 우리가 시야에서 발견하는 것은 중심의 결여, 즉 실재계에 난 구멍이다. 또는 중심을 비운 주변적인 것으로서의 실재계이다. 라깡은 [Anamorphosis]에서도, 시각적 관계에서 주체가 끊임없이 머뭇거리며 사로잡혀 있는 환상은 응시라는 대상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그는 욕망으로 충전되어 있는 시각의 영역 속에 응시가 가지는 특권을 강조한다. 대상과 실체의 만남은 시선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 응시가 있는 것이며, 응시 때문에 인간은 끝없이 욕망하고 이 끝없는 욕망이 삶을 추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이용덕의 작품 속 실재는 사유하는 주체가 아닌, 욕망하는 주체와 조우하고 있는 중이다.


출전_계간조각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