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정 전(12.22--12.30, 용산 재개발 지역)



눈 오고 추운 저녁 무렵, 용산 철거지역에서 진행된 이원정의 퍼포먼스는 다소간 무모해 보였다. 그는 동료 한명 없이 혼자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고, 종종 걸음을 치며 따뜻한 장소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흘낏거리는 눈길이 유일한 작품관람(?)이었다. 이원정은 적어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프로젝트 진행 기간 동안 매일 밤 7시에서 11시까지, 주변에 누가 있건 없건 작업을 하겠다고 말한다. 철거는 이미 많이 진행되어 있었고, 철거된 장소의 가림 막도 흐들흐들 낡은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유령의 거리가 된지는 꽤 오래된 듯하다. 예술이 아무리 외롭고 무모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의 경우에는 극단적인 듯이 보였다. 수명의 도시빈민이 백주대낮에 공권력과 대치하다가 비참하게 죽어간 용산 재개발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사, 공연, 전시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현장의 문화 일꾼들이 주변에 있어서 그나마 덜 외로운 것 같았다. 이 수상한 행동을 감시하는 전경들의 의심에 찬 눈길마저도 의미 있게 받아들여질 정도이다. 아마도 그는 주변의 다양한 부류들에 의해 수상한 자로 낙인 찍혀 있을 것이다.





이원정은 미술에 관련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거리나 현장에서의 예술 작업에 대한 경험이 꽤 있었고,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자신의 이전 작업을 쇼핑수레에 담은 비디오 프로젝터로 끌고 다니면서 철거지역의 곳곳에 상영하고, 그 곳의 장면들도 찍는 식으로 진행했다. 성장 제일주의의 그늘 속에서 희생된 이들이 아직도 한을 풀지 못한 채 떠도는 곳이라는 기억으로 인해 그 장소는 무겁고 을씨년스러웠지만, 야밤에 홀로 하는 체조처럼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보니 주변은 기이한 풍경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밤에도 거대 쇼핑몰처럼 야광조명을 하고 있는 초고층 아파트들이 저편에 도열해 있고, 그것들은 무너져 내린 폐허의 점령군처럼 이곳과 저곳을 대비시키고 있었다. 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빈자로 나뉘어 투쟁하는 디스토피아처럼 다가오는 현장은 마치 SF영화의 한 장면 같이 보일 정도였다. 음울한 비전을 가지는 사이버 펑크 류의 영화에 비교해 본다면, 쌓인 눈 위를 힘들게 덜컹거리며 이동하는 이원정의 수레는 하나의 방향으로 사람들을 몰아붙이는 거대한 체계에 대항하는 너무나도 초라한 저항군의 무기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술작업을--그의 작업이 예술로 간주되던 아니던 큰 상관은 없다--결과와 효과로만 본다면,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사동 사거리에서 전시를 한다 해도 개막일 빼면 한산하기만 한 것이 현재 미술이 처해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원정의 ‘맨땅에 헤딩하는 식’의 작업이 대중과 거리가 있는 현대 미술문화를 풍자하는 것은 아니다. 번듯한 전시공간이 아닌 길거리에서 작업은 그의 작업 컨셉이었다. 그곳은 ‘공식적인’ 미술공간이 아니라, 이행 중에 있는 과도기적인 공간이다. 모두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도심 재개발 정책은 이 과도기적인 공간을 정치적 상징성이 있는 공공의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그곳은 노동자, 경찰, 종교인, 예술가, 사회운동가들이 집결하여 대치하고 있는 민감한 지역이 된 것이다. 이원정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선택한 이 장소는 정치, 사회적인 무게 이외에도 그자체로 독특한 심미적인 체험을 자아낸다. 끝없이 펼쳐진 공사장 가림 막 위에 명멸하는 영상들은 기이한 연극의 무대로 만든다. 저 멀리 휘황한 고층 빌딩의 빛은 폐허를 통과하는 이에게 아른거리는 신기루처럼 보인다. 현대 미술사에서 정리된 바에 의하면, 그곳은 구조적 핵심이 간파되는 근대의 투명한 공간이 아닌, 무한히 다가오고 사라지는 몰입적인 체험을 자아내는 장소이다. 미니멀리즘이나 현상학에서 말하듯이, 이러한 연극적인 시공간에서 ‘예술’은 ‘사물’에 의해 극복된다. 그 앞에 펼쳐진 것은 예술작품 없이도 예술적 체험이 가능한 시공간이다.





일찍이 고등학교 때부터 사회현실에 대해 눈을 뜨고, 현재에도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그가 이러한 철거지역을 발견하게 된 것은 필연적이다. 그는 현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충분히 비판적이지만, 소위 말하는 ‘운동권’이 아니었다. 통상적으로 운동권이란 개념은 대학물을 먹은 자들 이상에나 해당하는 분류체계 아닌가. 미술대학을 다니지 않은 그는 민중미술을 한 경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민중 그 자체였고, 전쟁 같은 삶에 매몰되지 않고 작업이라는 것을 병행하고 살아온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점은 예술도 타성적으로 하고 있는, 엄청나게 가방줄만 긴 문화예술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대목이다. 물론 그러한 특이한 경력이 다소간 비효과적으로 진행되는 이번 작업의 치명적인 단점을 가려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공기금으로 집행하는 프로젝트이니만큼, 효율적인 소통의 문제는 그가 고민하고 해결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지하철 역사에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삶이 순식간에 깔아뭉개진 폐허로 변한 장소가 있고, 이원정은 그가 해왔던 ‘길바닥 시리즈’를 완성하기 위해 이 텅 빈 공간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홀로 수레를 끌고 ‘놀고 있는’ 행위에서 중심의 바깥에 있는 것들의 부조리함을 발견하게 된다. 부조리함을 보다 극적이고 집약적인 방식으로 변형시켜 소통의 효율성을 꾀하는 일이 그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그렇게 달성된 것이 꼭 ‘예술’이라 불리워지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출전- 2009 경기문화재단 시각 부문 지원 사업 모니터링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