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모더니즘 서사는 장르적 특수성의 강조로 특징된다.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조각을 조각이게 해주는 본질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본질을 형식요소에서 찾았다. 본질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본질주의, 그 본질을 형식요소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형식주의, 그 본질을 형식요소에 한정했다는 점에서 환원주의, 그리고 이 모든 제반요건을 충족시켜줄 때 비로소 순수회화, 순수조각이 가능해진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순수주의로 불려진다. 소위 순수에 대한 강박이란 말로써 형용되는 이러한 태도에 힘입어 모더니즘 조각은 특히 양감과 물성을 조각의 본질로 보고, 이런 양감과 물성을 드러내고 강조하는 것만으로 조각이 비로소 그 진정성을 획득한다고 본다.
이런 모더니즘 서사의 정점은 말할 것도 없이 미니멀리즘이다. 도날드 주드는 조각의 본질을 최소한의 구조로 환원해야 한다고 봤는데, 심지어 그 환원의 과정에는 창작주체를 위한 자리마저도 없다. 내가 직접 작품을 제작하는 한,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의 아이덴티티가 묻어 들어갈 수밖에 없고, 또한 나의 아이덴티티는 시대정신(패러다임)의 부산물이거나 최소한 상호영향관계의 소산이므로 시대정신이 덩달아 묻어 들어갈 수밖에 없고, 따라서 모더니즘 서사가 스스로의 순수성을 견지하기 위해 그렇게나 배제하고자 했던 제반 요소들, 이를테면 의미와 내용, 재현과 서사가 함께 묻어 들어와 순수성을 훼손한다고 본다. 미니멀리즘 조각을 흔히 리터럴 오브제라고 명명하는데, 문자 그대로의 오브제 일 뿐인, 아무런 의미나 내용도 떠올려주거나 상기시켜주지 않는, 가치중립적이고 중성적인 오브제, 무성격의 오브제라는 말이다. 해서, 주문생산과 주문 제작이 정당화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오히려 조각의 순수성(순전히 형식논리의 소산이기만 한 조각)을 더 잘 보장받고 획득할 수 있게 된다. 흔히 미니멀리즘 조각에서 엿볼 수 있는 공산품 같은 형태와 외관은 이런 연유로 생겨난 것이다.
미니멀리즘을 모더니즘 서사의 정점이라고 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모더니즘 서사는 장르적 특수성으로 나타나고, 이는 재차 형식논리에 천착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클레멘테 그린버그가 회화에서의 평면성을 강조했다면, 도날드 주드의 최소한의 구조는 이에 대한 조각적 대응물을 보여준다. 둘 다 시지각적 환원을 겨냥한 것이다. 해서, 미니멀리즘 조각에서 확인되는 형식적 특징들, 이를테면 하나의 단위구조를 기본형으로 하여 이를 반복적으로 나열하는 반복구조와 이에 따른 패턴화의 경향성, 그리고 특히 작가의 개성이 배제된 무성격의 오브제의 제시는 조각을 최소한의 구조(조각의 본질?)로 환원하고자 한 모더니즘 서사(도날드 주드)의 기획에 그대로 부합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형식적인 분석일 따름이며, 내용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면 이와는 사뭇 다른 결론이 도출되는데, 그 입장은 주로 마이클 프리드에 힘입고 있다. 미니멀리즘을 모더니즘 서사 이후를 예시해주는 경우로 이해하고 있는 프리드는 그 준거로서 리터럴오브제와 연극성과 시간성을 드는데, 그 핵심이 리터럴오브제이다. 이를테면 리터럴오브제를 모더니즘 서사의 관점에서 보면 개성의 배제에 따른 조각의 순수성을 보장해주는 장치가 되지만, 프리드는 이를 오히려 저자의 죽음논의와 연결시킨다. 즉 텍스트의 궁극적인 의미는 저자가 아닌 독자에게서 완성된다고 보는 것이며, 따라서 개성의 배제가 오히려 관객에게 일종의 의미론적 공백(여백)을 제공하고, 그 공백을 저마다의 의미로 채워 넣기 위한 관객들의 적극적인 간섭과 참여행위가 가능해진다고 본 것이다. 결국 프리드가 보기에 미니멀리즘은 그 자체 (순수한) 조각의 본질을 구현하고 있는 닫힌 체계가 아니라, 관객의 읽기에 따라서 그 의미가 결정되고 완성되는 열려진 체계인 것이다. 그리고 연극성과 시간성은 일상 속에서의 사물경험과 유사한 경험을 유도함으로써 조각과 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일상에 대해서 재차 열려진 체계를 실현해 보인다(이렇듯 열려진 체계는 말할 것도 없이 움베르토 에코의 열려진 예술작품의 개념에 연유한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즘 서사의 정점을 구현하면서(주로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와 동시에 모더니즘 서사 이후를 예시해준다(주로 내용적이고 의미론적인 측면에서).
여하튼, 이처럼 미니멀리즘에서 정점을 찍은 모더니즘 서사의 자기논리는 다원주의를 표방한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의구심의 대상이 된다. 말하자면, 예술이 과연 순수한 형식논리의 소산일 뿐인가 라는 의심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논리, 말하자면 예술은 순수해져야 하고(여기서 순수하다는 것은 모든 의미로부터 자유로운 경지를, 가치중립적인 경지를 말한다), 또한 실제로도 형식논리를 통해 순수해질 수 있다는 믿음과 신념이 혹 예술의 존재의미와 기능을 지나치게 한정한 것은 아닌지, 정작 예술이 주목해야 할 삶의 현실 혹은 진실을 예술의 장으로부터 배제함으로써 삶을 삭막하고 건조한 것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하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대체 예술을 예술이게 해주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본질 같은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받게 된다(이와 관련해서 아서 단토는 예술의 본질, 즉 예술을 예술이게 해주는 준칙 같은 것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는데, 그 결론은 특히 롤랑 바르트와 미셀 푸코의 저자의 죽음 논의, 움베르토 에코의 열려진 예술작품, 그리고 자크 데리다의 의미의 차연이론과 산종이론에 연동돼 있다).
이렇게 드러난 모더니즘 서사와 후기 모더니즘 서사와의 차이는 결국 예술에 대한 신념의 차이임이 드러난다. 예술을 예술이게 해주는 본질이 있다는 입장과 없다는 입장, 형식이 예술을 순수하게 해준다는 입장과 (삶의) 내용이 부재한 예술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로서의 존재의미를 상실해버린다는 입장, 예술은 삶과 무방하다는 입장(삶보다 더 궁극적인 그 무엇, 이를테면 본질의 추구에 바쳐져야 한다는)과 삶의 현실과 진실에 복무해야 한다는 입장이 대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입장차이는 궁극에는 본질의 유무에 대한 차이로 귀결되고, 예술의 본질에 대한 의심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의심과 등가치를 이루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리고 이는 그대로 예술을 예술이게 해주는 본질, 규준, 준칙, 절대원리 같은 것은 없다는 소위 모더니즘 서사의 종말 곧 예술의 종말론으로 이어진다.
이로써 마침내 예술을 예술이게 해주는 결정적인 형식, 요소, 성질은 없다고 선언되기에 이른다. 존재가 필연이 아닌 우연인 것처럼, 존재가 투사된 예술 역시 우연에 대해 열려있다. 예술을 예술이게 해주는 논리는 사전에 전제된 것이거나 자기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과정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며, 매순간 새롭게 생성되는 그 무엇이게 된다. 그리고 이렇듯 그 자체의 과정, 상황, 문맥, 맥락 속에서 샘솟는 예술의 계기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탈의 논리고 통섭의 논리다. 예술을 예술이게 해주는 결정적인 형식, 요소, 성질이 있다는 전제로부터의 탈이며, 이렇게 탈된 온갖 이질적인 형식, 요소, 성질들이 우연하고 무분별하게(예술의 자기생성원리에 의해) 합류되어지는 지점이 통섭이다. 그 탈의 논리들 중 주목할만한 지점이 탈장르며 탈형식이다. 그리고 그 탈장르와 탈형식이 유별나게 두드러져 보이는 장르가 조각이다. 이렇게 조각 이후, 소위 탈조각의 경향성은 온갖 다양한 형식을 얻으며, 자기증식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탈조각의 비물질 경향

탈조각은 무엇보다도 조각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는 개념이다. 정통적인 조각에 물려 있으면서, 동시에 이로부터 일탈할 수 있는 구실의 계기를 찾아내는 것, 형식적이고 의미론적인 차이의 지점들을 찾아 갈래 치는 것이다. 어쩌면 탈조각은 유형화를 거부하는 개념일 수도 있다. 분명, 유형화의 한계도 있다. 하지만, 이런 유형화가 아니라면 탈조각의 범주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해서, 탈조각의 유형화는 편의적으로만 취해질 수 있는 한계를 가진다. 조각이란 개념이 무색할 정도의 허다한 형식적이고 의미론적인 시도들 가운데, 비교적 평단을 중심으로 공유되는 개념을 중심으로 보면, 대략 부드러운 조각(소프트스컵처), 비물질 조각, 그림자조각, 사진조각, 미니어처조각, 풍선조각(발룬아트), 그리고 소리조각(사운드스컵쳐) 정도의 유형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 가운데 부드러운 조각은 말할 것도 없이 클래스 올덴버그에 연유한 개념으로서, 조각의 역사상 가장 핵심적인 전환의 계기를 마련한 경우에 해당한다. 부드러운 조각은 크게 두 경향으로 구별되는데, 부드러운 소재를 사용한 경우와 매스를 결여한 조각의 경우다. 비물질 조각은 빛(라이트아트)과 물을 이용한 조각, 영상작업(미디어아트), 그리고 물체를 물질로 해체한 경우를 아우른다. 보기에 따라선 신체분비물을 직접 이용한 경우와 여타의 다른 물질로써(이를테면 실리콘과 라텍스, 비누와 글리세린) 신체분비물을 흉내 낸 경우(에브젝션아트) 역시 비물질 조각에 포함된다. 그림자조각은 일상적인 오브제나 작가가 만든 오브제를 세팅하고, 그 뒤쪽에서 빛을 비춰 맞은편에 오브제의 그림자가 맺히게 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오브제는 그림자를 위한 부수적인 장치에 머물며, 이로써 오브제와 그림자, 실체와 허상과의 관계와 관련한 선입견이 전복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사진조각은 평면적인 사진을 입체로 구현한 경우다. 주지하다시피 사진의 최대강점은 실제 그대로의 재현능력이다. 그런데, 그 재현능력은 사진이 여전히 평면적일 때의 일이다. 평면적인 사진 그대로를 입체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정한 왜곡과 차이가 생겨나며, 그 왜곡과 차이를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강조하는 것, 그럼으로써 사진이 구현하고 있는 실제가 사실은 허구임을 드러내고 폭로하는 것이다. 미니어처 조각은 주로 인체를 소재로 한 일부 작가들에게서 그 경향을 접할 수 있으며, 인체를 사물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지는 개념의 지점들, 이를테면 패티쉬, 금기, 위반, 불경(이상 조르주 바타이유), 그로테스크리얼리즘(미하일 바흐친)과 관련이 깊다.
풍선조각은 공기를 매질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공기조각으로도 정의되며, 공기 속으로 몸을 날린 이브 클라인과 예술가의 호흡을 제작한 피에르 만조니에게서 그 전례를 확인해볼 수 있다. 거대한 크기로 부풀려진 풍선인형이나, 바람을 넣고 뺄 수 있는 풍선형태의 내장기관, 그리고 비행선 모형과 그 변주된 형태 정도로 범주화할 수 있을 것이다. 소리를 매질로 사용하는 소리조각은 소리를 일종의 파동(진동)으로 보며, 파동의 강도와 밀도 여하에 따라서 큰 소리와 작은 소리가 현상한다고 본다. 청각적 기호와 시각적 기호, 청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가 서로 호환된다고 보는 공감각의 인식에 바탕을 둔 소리조각은 이로써 단순히 들리는 소리의 경계를 넘어, 보이는 소리, 만져지는 소리를 아우르며, 최근의 환경 변화를 수용한 경우, 이를테면 전자장치로 소리를 조작하는 플러그드아트와 비전자음인 언플러그드아트로(이를테면 자연에서 채집한 자연음, 일상에서 채집한 일상음, 그리고 전자장비의 도움 없이 인위적으로 소리를 조작한 경우) 구분하기도 한다.
관람자의 존재 확대

이외에도 굳이 조각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탈조각의 경향성의 폭은 이보다 훨씬 더 넓어진다. 지금 현재에도 새로운, 그리고 주목할 만한 시도들이 조각의 이름으로 등재되고 있고, 이로써 조각의 범주는, 사실상 조각이란 용어가 무색할 정도로 더 넓어질 것이다. 현재, 조각은 탈의 논리가 실험되고 실현되는 가장 뚜렷한, 그리고 가장 강력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고, 그 정도나 강도는 더 이상 조각이란 용어로 싸안을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자기를 무한 증식시켜나가고 있는 중이다.
하이데거는 진리를, 그 자체 증명의 대상이면서 또한 실제로 증명해보면 증명이 되는 종류의 진리를 과학적 진리로, 그리고 그 자체 증명의 대상이 아니면서 또한 실제로 증명해보면 증명이 되지 않는 종류의 진리를 예술적 진리로 구분한다. 예술이 사용하는 언어체계는 모든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에 대해 열려있다는 열린 예술작품의 개념, 텍스트의 의미가 최종적으로 완성(완결)되는 지점을 저자가 아닌 독자로 보는 저자의 죽음 논의, 어떤 사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의미는 어슷비슷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끊임없이 미끄러질 뿐, 최종적이고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의미는 끝내 붙잡을 수 없다는 의미의 차연 이론과 산종 이론은 모두 이 예술적 진리를 부연하는 것들이다.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이라는 프랭크 스텔라의 말은 미술을 물질로 보며, 미술이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기술이라는 폴 클레의 말은 미술을 의미로 본다. 미술을 물질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의미로 볼 것인가. 미술은 보는 것인가, 아니면 읽는 것인가. 유독 물질이 두드러져 보이는 미술도 있고, 상대적으로 의미가 강조된 미술도 있지만, 미술은 이 물질이나 의미 중 어느 쪽으로도 환원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미술에서의 물질은 그 속에 내장된 의미의 표상이며, 의미 또한 오브제를 레디메이드와 구별시켜주는 최소한의 근거가 된다.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은 일상적인 사물의 존재방식과는 다른데, 그것이 열려진 의미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인 만큼 관객의 해석행위와 참여행위에 대해서도 열려있다. 해서, 관객들은 저마다의 해석을 매개로 해서 이 열린 구조에 개입하고, 간섭하고, 부연하고, 주석을 달 수 있다.
언어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체계이며, 제도적 체계임을 피할 수는 없다. 때로 탈조각의 개념이 무모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조각의 개념 역시 처음에는 개념화할 수 없는 것들을 개념화한 것이고, 체계화할 수 없는 것들에 체계를 부여한 것이고, 제도를 거부하는 몸짓을 제도의 안쪽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언어를 엄밀하게 사용(혹은 보다 적극적으로는 한정)한다는 것은 어쩌면 체계를 거부하는 탈조각의 경향성에 반하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해서, 탈조각의 유형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어쩌면 유형화를 거부하는 몸짓에 반하는 행위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