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신진작가비평워크숍에 참여한 작가들(류노아, 양유연, 전희경, 최유희, 범정, 이후창)의 작업에 대한 성향을 보면 대개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이 강한 편인데, 이는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동시대 신세대 작가들에게서도 어느 정도 확인되는 점이다. 진리와 진실과 같은 거대담론을 다룬다거나, 객관적 현실을 재현한다거나, 공리와 같은 사회적 실천논리를 강조하는 대신, 사사로운 관심사에 더 깊이 천착해 들어가는 미시담론의 경향성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나르시시즘의 문화적 징후(자기 자신에게 집중한다는 점에서)나 후기실존주의(실존주의의 부조리의식과 비교되는 상처의식을 강조한다는 점에서)의 가능성을 점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작가들 가운데 류노아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 각종 대중문화로부터 그 자양분을 흡수한 소위 팝 코드의 변형된 유형을 예시해준다. 이를 통해 미술의 존재이유를 묻는가 하면(미술게임), 교육현장에서의 폭력사태(학교와 살인)와 같은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던 것에서 점차 욕망과 무의식 등 상대적으로 더 개인적인 층위에서의 자기 반성적인 경향성이 강한 작업에로의 점진적인 변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콘을 하나씩 덧붙여나가는, 그렇게 무한 증식되는, 온갖 이질적인 이미지의 편린들이 무분별하게 접합되고 아무렇지도 않게 병치되는 화면이 일종의 정신병리학적 풍경을 연출해 보인다.

그리고 양유연은 박약한 의지와 정신적인 공황상태와 같은 개인적인 층위에서의 상처의식과 존재론적 불안의식을 초현실적 기법으로 풀어낸다. 절단된 풍경, 황량한 풍경, 아마도 무의식의 지층으로부터 곧장 소환된 것 같은 알 수 없는 이미지의 편린들이 뿌리 없이 부유하거나 무한 증식되는 무의식적 풍경을 전개해 보인다. 특히 마술놀이와 분절된 신체의 개념이 흥미롭다. 이를테면 여자 모델을 가구 속에 감금한 후 그 가구를 통째로 절단하는 마술에서 일종의 트릭으로 인해 절단에도 불구하고 정작 모델 자신은 아무런 신체적 손상도 입지 않기 마련인데, 작가는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가구와 함께 절단된 여자 모델의 신체를 보여준다. 작가는 이처럼 보통 상상에 머물기 마련인 가상적 이미지를 현실적 이미지로 끌어낸다. 이렇게 상처를 입은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고, 그 구멍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분다.

또한 전희경은 페인팅과 함께 점토로 빗어 만든 미니어처 괴물 형상을 제안한다. 이는 일종의 이종과 변종에 대한 관심에 연동되는데, 이런 괴물이나 이종과 변종 자체는 허무맹랑한 공상의 소산이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이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무의식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여기서 더 나아가 거울을 끌어들여 이런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을 강화하고 있기도 하다. 작가의 작업은 원래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된 것인데, 이를테면 작가는 자신을 뱀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몸통에서 여러 비정형의 돌기(감각촉수)가 돋아나고, 마침내 그 돌기들이 몸통을 온통 뒤덮어 감각촉수만으로 된 어떤 알 수 없는 생명체로 변태된다. 누군가가 그 촉수 중 일부를 절단하기라도 하면, 그렇게 절단된 부위에서 곧장 새 살이 돋아나 또 다른 돌기가 덧붙여진다. 아마도 상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피부의 끝단일 이 돌기들이, 이 돌기들로 구조화된 몸이 일종의 욕망의 생리학을 예시해준다(욕망이 없으면 상처도 없다).

그리고 최유희는 무한 증식되고 확장되는, 자유자재하게 변형되는 이미지들의 연쇄를 통해 하이드홀릭(Hideholic)을 주제화한다. 하이드홀릭? 은폐충동? 숨기(숨기기)놀이? 위장놀이? 작가는 본질을 숨긴 채(혹은 간과한 채)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외형적인 이미지만을 근거로 사물과 대상을 판단하는 세태를 풍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위장된 세계를 꿈꾸고, 자기만의 이상적인 세계를 꿈꾼다. 패턴화된 이미지, 위장된 이미지 뒤에 숨는다. 왜 숨는가? 현란한 이미지들, 감각적인 이미지들, 위장된 이미지들은 결국 상처의식이 만들어낸 부산물이다. 작가는 내면의 상처를 숨기느라 이미지를 더 현란하게 치장하는데, 그렇게 화면에 빼곡한 이미지가 일종의 공간공포를 자아낸다. 이미지가 화려한 만큼 그 뒤쪽에 숨겨진 상처는 더 아프다.

그런가하면 범정은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차용하는데, 대개는 파파라치가 포착한 유명인사들의 초상사진들이다. 피사체가 상대를 미처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찍혀진 것인 만큼 자연인 그대로의 결점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사진들이다. 작가는 이 사진들을 등신대 크기로 확대 인화해, 이를 무슨 옷이나 되는 양 벌거벗은 신체 위에 걸쳐 입는다. 유명인사에 대한 오마주? 유명인사 되기? 신체 위에서 그 사진 이미지들은 현저하게 왜곡된다. 때로 그 이미지들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 생뚱맞은 이미지, 정체불명의 이미지로 변태된다. 벌거벗은 신체 위에 덧입혀진 사진 옷은 그대로 피부를 표상하기도 한다. 신체의 내부(작가의 벌거벗은 신체)와 외부(작가가 덧입은 유명인사의 신체)를 나누는 경계인 피부(왜곡된 신체 이미지)의 정체성이 위협받을 때, 그 경계가 허물어질 때 일종의 생물학적 죽음이 내재화된다. 그 내재화로부터 불현듯 타자(이종과 변종)들이 분출된다.

그리고 이후창의 유리작업은 유리를 일종의 덩어리로, 매스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통적인 조각과의 친근성을 예시해준다. 그러면서도 조각의 경계를 넘어서는데, 이를테면 투명성을 통해 유리 속에 유리가, 덩어리 속에 덩어리가, 형상 속에 형상이 담겨진 이중구조를 실현해 보인다. 이런 이중구조는 자기반성적인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주는데, 이를테면 바깥 형상과 속 형상이 대비되고, 자기와 내면의 자아가 대면하고, 보는 나와 보이는 나가 분열되는 양상을 손에 잡힐 듯 실감나게 전해준다.

이렇듯 작가들은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이 강한데, 그 경향성은 온갖 이질적인 차이들이 어우러진 정신병리학적 풍경으로(류노아), 내면의 상처를 무슨 무대 위에 올려 상연하는 것 같은 감정의 무대로(양유연), 내면의 욕망과 대면하는 욕망의 생리학으로(전희경), 무의식적 상처를 숨기고 위장하는 이미지의 과잉으로(최유희), 남의 피부를 덧입는 자기분열 징후로(범정), 그리고 겉 자기와 속 자기가 대면하는 야누스의 존재론적 자의식으로 각각 현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