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만의 그림에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아마도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거나, 작가가 살았었을 한 세대의 자화상이거나,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거나, 현대인의 보편적인 초상일 것이다. 한눈에도 희화화된 그는 터무니없이 작은 몸체에 터무니없이 큰 머리를 가진, 어린아이의 전형적인 체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만큼은 어른의 그것을 닮아있는데, 미처 잠에서 덜 깨어난 듯 가늘게 뜬 가재미눈과, 얼굴의 정면을 향해 쏠려있는 이목구비, 그리고 게다가 듬성듬성 수염마저 웃자란 그의 얼굴이 설핏 웃음을 자아낸다.
아이의 몸과 어른의 머리가 조합된 그는 말하자면 일종의 반어른이며 반어린애인 것이다. 그의 몸은 어린애에 속하고, 머리는 어른에게 속한다. 더 이상 성장하기를 거부하는 몸과, 어른의 자의식이 만들어준 머리와의 어울리지 않는 동거가 불안정한 자기정체성을 엿보게 한다. 그는 왜 성장을 거부하는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른이 되기 위해선 배제를 배워야하고 억압을 내재화해야 한다. 무구분의 세계로부터 구분의 세계로 넘어와야 하고, 자족적인 세계로부터 금지의 세계로 건너와야 하고, 절대적인 세계로부터 상대적인 세계로 옮아와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경계에 대한 인식 곧 자의식과 관련이 깊고, 그는, 적어도 그의 몸은 그 경계를 넘어서기가 싫은 것이다.
여기서 만약 그 경계를 넘지 않아도 되는 주체가 있다면, 나아가 그 경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드는 주체가 있다면, 그는 아마도 영웅일 것이다. 현실원칙을 아무렇지도 않게 위반하는 그 영웅이 배트맨이고, 슈퍼맨이며, 깡통로봇이고, 마징가제트며, 레슬러이다. 이 영웅들은 흑백TV 세대와 만화 세대의 아이덴티티 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인 만큼 한 세대의 문화적 풍속도를 대변해주는 전형적인 아이콘들이다. 그림 속에서 아마도 작가의 자화상이지 싶은 캐릭터는 이 영웅들을 모방하는데, 이를 통해 영웅들의 귀환을 실현했다기보다는 영웅들의 희화화를 실현한다. 영웅 이데올로기의 허구성과 허위성을 폭로한다기보다는, 재확인시켜주는 씁쓸한 제스처를 보여준다. 현실원칙을 위반하고 싶은 욕망이 영웅을 숭배하게 했지만, 현실원칙과 영웅 이데올로기가 공존할 수 없는 현실인식이 오히려 현실원칙을 강화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되돌려준다. 영웅이 없었더라면 그럭저럭 견뎌냈을 현실을 더 견디기 어렵게 한 것이다.
그에겐 인간이 아닌 동물가족이 친구다. 유년시절 보았던 애니메이션에서 되불러낸 그들은 인간을 모방하고 흉내 내기(비판하고 풍자하기) 위한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어른이 되기 위해 접었던 것들을 환기시켜주기 위해 호출된 것이다. 단순한 우의화를 위한 구실로서보다는 작가의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 호출된 것이다. 해서,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가족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속 동물들과는 사뭇 다르다. 동물농장 속 동물들이 인간의 이중성을 폭로하고 있다면, 작가의 그림 속 동물들은 치유와 제의의 기능을 도맡고 있다. 그들의, 때로는 곁눈질하고 야비해 보이는 제스처마저 애교와 위로의 몸짓으로 보인다. 환상 속에서 친구를 불러내기, 접어놓았던 유년의 주름을 다시 펼쳐서 보기가, 칩거가 만들어준 페르소나(칩거형 페르소나)를 떠올려준다.
이로써 강지만의 그림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몸에 비해 큰 얼굴이 자기를 강조하고 싶은 현대인의 자의식을 상징하며,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외로운 열망을 표현한다. 어른의 세계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거나 두려워하는 천진한 어른인 그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 접었던 것들, 억압한 것들, 그리고 그렇게 억압되고 유예된 욕망을 상상력을 통해서 복원한다. 현실 속에선 불가능한 일들이 상상 속에서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은 채 실현되어지는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김건일, 움직이는 시점과 재구성되는 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흔히 서구인의 근대적 자의식을 거론할 때면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데카르트의 전언이다. 이 전언은 그대로 서구인의 주체사상을, 주체중심사상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이 말은 내가 곧 이 세계의 중심이며, 따라서 이 세계는 나의 존재를 중심으로 재편된다는 말로서 고쳐 읽을 수 있다. 내 의식이 눈을 뜨면 세계는 있고, 내 의식이 눈을 감는 순간 세계도 덩달아 지워진다. 이 전언, 이 논리 그대로를 그림으로 도해한 것이 원근법이다. 나에게 가까이 있는 것은 크고 선명하게, 그리고 나로부터 멀어질수록 작고 흐릿하게 세계는 재구성된다. 여기에 타자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물론 현상학과 후기구조주의 이후 타자의 존재가 재조명되고 재평가되고는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왠지 주체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김건일의 관점차이와 입장차이는, 적어도 즉자적 의미에서 보면, 타자를 전제한, 타자를 겨냥한 주제란 점에서 이런 주체중심논리와는 구별된다. 주체는 타자에 의해 정의되고, 나는 너에 의해 재구성된다. 너는 나에게 다른 관점을 의미하고, 다른 입장으로서 와 닿는다. 너는 나에게 다름과 차이를 의미하며, 따라서 너에 의해 재구성된 나는 항상적으로 다름과 차이로서만 표상된다. 나는 재구성될 수 있지만, 자기동일성으로 치자면, 언제나 일회적으로만 재구성될 수가 있다. 그렇게 일회적으로 축조된 나의 지층을 꿰뚫는 항상적인 나, 항상적으로 자기동일성의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나는 끝내 붙잡을 수가 없다. 관점과 입장은 결국 의미(의미가 생성되는 지점?)를 말하며, 관점차이와 입장차이는 의미의 차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는 드러나면서 숨겨진다.
이렇게 드러나면서 숨겨지는 나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 왜상이다. 왜상은 이미지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나며, 그렇게 드러난 것이 다른 관점과 입장과 의미의 반영물이란 점에서 숨겨진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 그림에서 드러나면서 숨겨지는 해골그림은 대사들의 존재를 위험에 빠트린다. 그러나 정작 그들 자신은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세속적인 권력 스스로는 결코 메멘토모리를 직면할 수가 없고, 나는 나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권력에 반영된 주검의 그림자를 보는 것(인식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객(타자)의 눈일 따름이다. 작가의 그림은 위에서 아래로, 좌측에서 우측으로 이동하면서 보아야 하고, 때에 따라선 몸을 숙이는 등 불편한 자세를 감수하면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동하는 시점과 시점 사이의 스펙트럼 위로 하나의 상은 무수한 다른 상들로 분절(중첩)된다. 시점이 고정돼 있으면 오로지 하나의 상만이 오롯해지지만, 시점이 움직이면 무수한 상들이 파생된다. 작가는 그렇게 파생되고 분절되고 중첩된 나의 지층을 표상하고, 그렇게 숨겨진 나를 드러낸다.
작가는 근작에서 이런 관점차이와 입장차이의 의미를 욕망으로까지 확장시킨다. 그리고 욕망에서 그 차이는 이중성으로서 드러난다. 즉 빨간 선인장은 아름답지만 가시를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푸른 꽃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왠지 죽음의 전주곡을 떠올리게 한다(실제로 노발리스에게 푸른 꽃은 죽음을 상징한다). 어쩌면 죽음이야말로 꽃을 아름답게 하는 진정한 원인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삶을 정화시켜주고, 따라서 죽음이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진짜 원인이듯이. 그 선인장을, 그 꽃을 받으려 내민 손이 욕망의 이렇듯 치명적인 유혹(이중성)을 상기시켜준다.

임지연. 몸의 투쟁, 너의 몸은 전쟁터다
영화 301 302에는 두 여자가 등장한다. 한 여자는 신경성 식욕부진을 앓고 있고, 다른 한 여자는 신경성 폭식증이라는 또 다른 섭식장애를 앓고 있다. 폭식증에 걸린 여자는 원래 요리사로서, 남편을 위해 요리하는 일과 섹스 파트너 말고는 할일이 없다. 그런 여자에게 남편은 점점 싫증을 느끼고, 남편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여자의 요리하는 일은 점점 먹는 일과로 변질된다. 식욕부진을 앓고 있는 다른 여자는 자유기고가로서, 어린시절 아버지에게 몹쓸 일을 겪은 이후로 성을 멀리하고, 덩달아 음식마저 거부한다. 그런 여자에게 폭식증에 걸린 여자가 자신이 요리한 음식을 먹어줄 새로운 대상을 찾아내기라도 한 듯 매번 음식을 가져다주고, 그녀는 그녀대로 그 음식을 매번 쓰레기통에다 버린다.
이 영화는 임지연이 주제로 삼고 있는 살과 음식과의 관계와 관련한 의미 있는, 흥미진진한 사실들을 예시해준다. 즉 섭식장애의 원인이 신경성이라는 점, 그 중에서도 특히 좌절되거나 왜곡된 성적욕망과 관련이 깊다는 점, 그리고 그 결합(성적외상과 섭식장애의 결합)이 종래에는 불통과 소외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섭식장애는 문화병의 한 유형이다. 성적 결핍이 공허와 권태(권태만큼 현대적인 질병이 또 있을까)를 불러오고 그 빈 자리를 음식으로 대체하는 것이며, 정신적 외상을 몸에 대한 파괴충동(몸에 대한, 몸을 통한 단죄 혹은 처벌?)으로 보상받는 것이다. 외관상 성적외상으로 보이지 않는 경우, 이를테면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하려는 정상적인 동기 역시 알고 보면 혹시 있을지도 모를 성적외상을 미리 피하려는 심리적 과정에 의해 추동된 것이란 점에서 그 경우가 크게 다르지가 않다.
그런가하면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입(구강기)은 동시에 의식(외상)을 지우는(적어도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의식한) 행위란 점에서 배설행위(항문기)와 통한다. 먹는 쾌락(고통?)과 싸는 쾌락(고통?)이 공모하는 것이며,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단죄가 이율배반적으로 연동된 것이다. 살과 음식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작가의 작업은 이렇듯 그 의미가 정신적 외상과 섭식장애와의 관계로, 욕망(특히 성적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단죄의식과의 관계로 확대 재생산된다.
한편으로 작가의 작업에서 살과 음식과의 관계는 개인적인 층위에서의 심리적 외상에서 나아가 자본주의의 기획과 맞물린다. 즉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필요생산물 이상의 잉여생산물을 생산하며, 이는 그대로 필요양분 이상의 잉여양분을 체내에 축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렇게 축적된 잉여양분이 각종 질병을 불러들이고, 그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재차 자본이 투여되어져야 한다. 이 일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입맛을 길들이는데, 각종 화학첨가물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 화학첨가물이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이와 동시에 각종 질병을 퍼트리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이 화학첨가물들은 무슨 예쁘고 아기자기한, 귀엽고 깜찍한 팬시상품들 같다. 그 속에 독을 품고 있는 모든 것들은, 치명적으로 유혹하는 모든 것들은 아름답다. 유혹은 작은 욕망으로 하여금 더 큰 욕망을 원하게 하고, 없던 욕망마저도 만들어낸다. 유혹과 욕망이 없으면 자본주의도 없다. 결국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실제의 환영이다.
임지연의 작업은 이렇듯 살과 음식과의 관계와 관련한 심리적인 외상을 다루는 한편, 때로는 자본주의가 그 심리적 외상을 유혹하기 위한 기제로서 전용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