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0 - 12.2 아르코 미술관
7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작품이 두루 걸려있는 김홍주 전은 매 작품마다 하나의 지시대상이나 의미로 고정되지 않으려는 지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의미는 의미화 과정으로 이양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향성이 매우 꼼꼼한 수작업의 결과라는 것도 역설적이다. 보는 이를 완전히 질리게 만들 정도의 세필의 집적과 펼침이 궁극적으로는 작품을 열어놓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자유분방한 듯 느슨하게 작업하면서도 작품이 발신하는 의미에 대해서는 완전한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화단 일각의 경향과 큰 차이가 있다. 아무리 개념이 중요한 현대미술이라 해도, 작품은 대략 늘어놓고서 그 의도와 목적에 대해 작가 스스로가 목소리를 높이는 풍토가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방법적 완결성은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 세상을 돌아다닐 때 관객에게 다의미적으로 해독될 가능성과 상충되지 않는데, 김홍주의 작품이 바로 그 예이다. 의미의 개방성은 작품에 내재된 여러 차원의 상호작용에 의해 가능하다. 김홍주의 경우 그것은 그림의 현실성까지 포함한 현실이다. 1층 전시장에 집중적으로 설치된, 거울과 창 그리고 문틀이 캔버스 틀과 중첩되는 70년대 작품에서, 화면 속 인물들은 그저 거울상처럼 대상으로 비추어지기기도 하고 화면 밖 관객을 응시하기도 한다. 그는 거울 면에 죽죽 흘러내리는 때 국물까지 재현하고, 거울로 가정된 틀에 칫솔을 걸어 놓기도 했다. 여기에서 그림은 세상을 반영하는 거울이자, 세계 속의 사물로 나타난다. 구상과 추상도 공존한다. 목욕하는 여자의 모습에서 물에 잠긴 부분을 물결무늬로 해체되는데, 불연속적으로 칠해진 얼룩들은 그림의 환영을 구성하고 있는 조형 성분들이다.

초상화의 수염부분에 털을 붙이고, 꽃그림의 꽃망울 부분을 조화로 처리한 작품은 환영을 실재로 대체하는 것이다. 인간의 시선 역시 불안정하다. 가장 지성적인 감각으로, 대상을 객관적이고 명증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가정된 시각의 포획물은 기이한 왜곡 상으로 변모하곤 한다. 찌그러진 주전자에 비친 왜곡된 주변풍경이나 이상하게 늘어난 얼굴 형태가 그려진 그림은 욕망과 얽혀있는 시선의 불투명성을 표현한다. 밭고랑이나 신문 같은 인공적 산물에서 발견될 수 있는 추상적인 선과 공간이 사람의 실루엣으로 변모하는 작품은 지시대상과 밀착될 수밖에 없는 도상적 기표를 가변적으로 만들어 또 다른 환영을 파생시킨다. 그의 작품에서 대상은 물론 기호의 불안정성이 드러난 예는 많다. 객관주의나 리얼리즘적인 환상과는 달리, 기호는 투명하지도 않고 자족적이지도 않다. 기호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끝없이 다른 것으로 미끄러지거나 다른 것들로 보충된다.
똥 형태로 그려진 문자들은 한 대상이나 의미에서 다른 대상이나 의미로 이동하는 경향이 잘 나타난다. 쓰기와 싸기를 재치 있게 중첩시킨 이 작품들은 하나로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이질적인 조합물이자 흔적으로서의 기호의 성격을 드러낸다. 기호와 대상의 자기동일성을 해체하고 이질적 타자들을 드러내는 방식은 캔버스 위에 단 하나의 형상을 띄워놓을 때도 관철된다. 꽃이나 잎을 그린 90년대 말의 그림은 현재 형태를 잘 가늠할 수 없는 모호한 덩어리로 변화했는데, 그 내부는 식물의 엽맥이 여러 갈래의 길로 변형되면서 지형도처럼 펼쳐진 산수화 같다. 단 하나의 형상으로 응집된 순도와 밀도는 파열하면서 틈과 균열을 만들고, 그것은 또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길이 된다. 보는 것을 넘어서 만져보고 싶은 김홍주의 근작은 무엇으로도 환원하기 힘들며, 동시에 여러 감각을 총괄하는 원초적인 감각인 촉각성으로 귀결되는 듯하다.
출전-월간미술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