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전 | (2009 11.18--12.1, 갤러리 나우)


탈색된 인간 초상들과 모형화 된 장기들이 놓여있는 전시장은 일체의 교란적 요소를 제거한 무균 실험실 같은 분위기이다. 거기에는 언제나 예술의 중심을 차지해온 인간이 껍데기로만 남아있다. ‘variation’이라는 전시부제는 오늘날 과학기술의 조건 아래 놓여있는 변형된 인간들을 표현한다. 전시는 두 개의 작품 군으로 나뉜다. 먼저 [portrait] 시리즈는 작가의 지인들을 병원에 데리고 가서 CT(단층) 촬영한 이미지를 변형시킨 것이다. [Portraits # 일련번호]로 규정된 익명화된 초상들은 특별한 개성과 인격을 가지는 인간이 아닌, 철저히 대상화 된 모습이다. 120x120cm 사이즈의 디지털 프린트들은 모종의 분류 및 관찰 체계에 의해 나열된 실험적 대상처럼 보인다. CT 사진은 색을 구별하지 못해, 인간들은 모두 하얀색이며, 아무런 질감이 없다. 그 사람만의 ‘색깔’은 사라지고, 코드화되기 쉬운 형태만이 보존된다. 여기에 작가의 눈을 이식시켰다. 눈썹도 머리카락도 없는 하얀 덩어리에서 유일한 색을 가진 붉은 눈은 섬짓한 생기를 부여한다. 눈은 여러 크기이며, 나름의 표정을 만든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이들은 작가와의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서 꼭 누구의 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취향이나 생각들을 공유하게 된다. 나와 그들의 구별이 불명확해지는 것이다.

눈이 뇌의 연장으로서 외부로 돌출된 유일한 기관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의 얼굴에 나의 눈이 들어가 있는 변종은 타자의 동일화와 동일자의 타자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초상 시리즈는 타자와 동일자의 혼동과 공존을 표현한다. 이러한 변종에서 작가는 내가 그들의 가면을 쓴 것인지, 그들이 나의 눈을 가진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CT사진은 작가의 것도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작가의 눈이 박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질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작품 [Siamese #38110-2]에서 사탄처럼 이마에 뿔이 난 작가의 모습은 원판에 충실한 작품 [Siamese #38110-1]과 쌍을 이루면서, 쌍둥이나 분신 같은 배열을 이룬다. 변이는 너무 근본적인 차원에서 일어나서 설사 자신의 마스크와 눈을 갖추고도 타자화를 피할 길이 없다. 작가에 의하면 ‘siamese(공유하는 신체)’ 시리즈는 하나의 신체를 공유하는 복수자아의 표상이다. 작품 [Siameses]는 심장, 간, 목뼈, 신장, 혈관, 척추 등의 신체 기관들이 실험실의 샘플처럼 배치되어 있다. 장기의 3D모습을 단면으로 제작하여 아크릴에 직접 프린트하고 순차적으로 재조합한다. 그러면 2차원 이미지가 3차원으로 변한다.




그것은 단층촬영과 비슷한 메커니즘이다. 마치 프레파라트에 담긴 시료처럼 납작한 이미지들은 30-60개의 층이 모여, 기관들을 입체적 시뮬레이션으로 만든다. 평면이 모인 것이라 옆에서 보면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지고, 반투명한 틀만 보인다. 이 틀은 살아있는 것을 구조화시키는 추상적 체계를 연상시킨다. 어두운 몸 깊숙이 박혀 있는 기관들은 밖으로 끌어내어져, 본래의 것이라 할 수 없는 모델화 된 색이 입혀지고 특정 신체의 임상적 상태를 예시하게 된다. 이진우는 이 적출물들에서 내가 찾아질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는 [portrait] 시리즈가 ‘자아에 타자들의 존재함’을 가정했다면, [siamese]에서는 복수자아, 즉 ‘결합되는 순서와 방식에 따라서 나타나는 차이를 가진, 순간적인 통일성을 가진 자아’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서로 분리되고 바꿔 낄 수도 있는 단면들의 연속으로 재구성된다. 몸은 정신과 마찬가지로 명확히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그 배치를 달리하는 가변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고유의 장소를 차지하던 것들이 꺼내지고, 이동되는 등의 조작이 가능한 것은 그것이 복제 가능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정신이든 육체든, 질적인 것은 양적인 것으로 변한다.

이진우의 작품에서 정신과 몸을 담는 용기(容器)는 플라스틱 그릇처럼 대량 생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매 작품마다 동일자를 대신하는 타자를 언급했지만, 그의 작품에서 타자는 이질적인 타자가 아니라, 동일성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동일성은 고전적인 철학에서 말하는 ‘나’라는 주체성이기보다는, 기계적으로 복제되는 것, 즉 대량생산 용 주형에 가깝다. 장 보드리야르는 종의 복제 단계를 사회적으로 분석하는 [복제, 혹은 종의 복제 단계]에서 이러한 동일증식 집단을 언급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복제는 이질적인 두 개체가 만나는 유성생식을 끝장내고, 무성생식을 강화한다. 서로 다른 것이 섞여 차이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하나의 모체만을 남겨둔다. 여기에서 동일한 것의 복사가 이루어진다. 이때 존재론은 순수한 동어반복이 되어버렸고, 계통발생은 순수한 동일발생이 되어버린다. 약 1억년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생물이 동일자에서 동일자를 끌어내는 일종의 근친상간을 벗어나려고 애썼는데도, 이제 우리는 종에 관한 정보를 조작하여 차이를 없애려 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가 강조하는 생물복제의 문제점은, 그 기획이 자연선택보다 훨씬 더 자동적으로 차별적이 된다는 것이다. 모든 유전적인 기획에 따라(일반적으로 모든 기술적 기획에 따라) 종을 다시 만들어내는 단계에서 작동하는 이상과 완벽함이라는 기준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금까지 상징적 질서 속에서 늘 그렇게 해왔고, 앞으로는 생물학적 질서 속에서 그렇게 할 것이다. 이때 지금까지 정신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일 뿐이었던 동일자의 운명은 인간의 세포의 한가운데 나타나게 된다. 이진우의 작품에서 비슷하게 생긴 초상들은 이러한 동일증식 집단을 떠오르게 하며, 기능이나 정보들로 분할된 대상들은 신체의 종말을 보여준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사실 오래전부터 체계는 우리 자신의 복제인간, 또는 서로의 복제 인간이 되도록 우리를 길들여왔다고 말한다. 과학기술이 생물리적 차원에서 그렇게 만들기 이전부터 인간은 복제인간들이어 왔다. 이러한 복제인간의 존재를 떠올리기 위해 기괴한 변종으로 넘치는 SF 영화까지 떠올릴 필요가 없을 듯하다. 무의식적인 힘에 의해 휘저어지는 비개성적 대중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이진우의 작품은 세계를 이상적으로 복제하는 과정이 가속화되는 가상현실의 시대에 존재하는 인간의 몸, 그것들이 처한 상황을 열광도 비판도 아닌 중성적 입장에서 냉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출전-2009 경기문화재단 시각예술 부문 지원 사업 모니터링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