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중순부터 한 달 간 국제 갤러리에서 열린 신미경의 ‘트랜스레이션’ 전은 그 동안 작가가 추구했던 동서 문명 사이, 그리고 매체 사이에서 추구해왔던 번역과 해석 작업이 집약되어 있다. 1층 전시실에 집중적으로 진열 된 고대 시기의 코레와 쿠로스 상들은 서구 문명의 발생이자 서양 미술사의 원형으로 간주된 조각상들을 비누로 번역한 것이다. 대리석 질감과 비누의 질감과의 유사성에서 착안한 이러한 변주는 시간의 흐름을 압축하여 재현할 수 있는 무른 재료의 특성을 극대화시킴으로서, 관념화된 범주들 사이에 놓인 간극 그 자체에 주목하는 전략이다. 신미경의 번역 작업은 비누로 조각할 만한 수많은 소재들 중에서 문화적 전범이 될 만한 것을 선택함으로서, 단지 재료를 바꾼 발상에 머물지 않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체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메타적 차원의 문화 비평이 된다. 그녀가 전범으로 삼은 것들은 신전의 일부에 속해 있었을 고대 조각상들로, 본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세계 유수의 박물관에 수집품이자 감상용 대상인 미술품으로 둔갑한 것이다. 박물관에 안치된 한시대의 역사적, 미학적 증거물들은 박물관의 재현적 체계에 의해 분류되고 제시된다. 박물관의 재현 체계는 그 고색창연한 전통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계몽주의를 지나 19세기경에야 정착한 근대적 방식이다. 박물관은 종교를 비롯한 총체적 삶과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던 사물의 맥락을 시대정신과 미의식을 대변하는 유물로 재맥락화 한다. 신미경은 상호 이질적인 기원을 가지는 것들을 비누라는 재료로 동질화시키는데, 그것은 박물관이 결코 같은 선상에 놓여 질 수 없었던 다양한 사물의 관계를 탐색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가령 그것들은 어떤 형식이나 양식의 사례가 되어 비교된다. 미술관은 박물관보다 더 짧은 시간대를 다룰 뿐이다. 떨어져 있던 각각의 사물들이 박물관의 유물이 되었다면, 신미경은 또 한번의 번역작업에 의해 박물관의 유물을 미술관의 예술품으로 변모시킨다. 2층에 집중적으로 전시된 동양의 도자기들 역시, 본래 좌대 위에 놓여 보여지는 미술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활이나 제의를 위해 사용되어졌고, 사랑받는 장식품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주목해야할 보물이나 미술이 된 것은 고고학이나 미술사라는 근대적, 그리고 서구적 학문 체계에 의한 것이다. 신미경이 취한 서양의 조각상과 동양의 도자기는 작가의 뛰어난 제작 솜씨로 인해 그 자체로도 심미적인 즐거움과 놀라움을 주지만, 특정한 대상들이 수집, 분류, 재현되는 방식을 풍자적으로 반복함으로서, 새롭게 재 맥락화 된 가시화된 대상들의 계보를 독해하라고 권유한다. 쉽게 변형되는 비누라는 재료는 예술이 가지는 유일성, 유일성에 의해 촉발되는 분위기(aura), 그리고 변치 않을 영원한 가치 같은 개념들이 생성된 과정을 역추적 한다. 야외에 방치되거나 화장실에서 손 씻는데 사용된 비누조각들은 손상과 망실에 의해 새로운 원본성을 획득하게 되며,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현대 예술작품으로 재탄생시킨다. 이러한 자리바꿈은 부당한 것이 아니다. 근대의 ‘새로움의 전통’이 미적 기준이 되기 이전에는, 원형과 전범이 있는 작품을 따라하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였으며, 몇 백 년 단위의 거대한 시간의 주기를 통해서야 변화가 감지되곤 한다.

비누는 이 오랜 세월을 수개월, 또는 몇 시간으로 압축할 수도 있다. 유물과 마찬가지로 신미경의 작품은 시간의 흐름이 야기한 원형의 변화와 손상이 바로 원본성을 입증하는 기준이 된다. 그것은 영원함이 그 반대의 가치, 즉 영원하지 않음에 의해 지지됨을 보여준다. 원본과 복제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복제품은 원본의 가치를 침식하기보다는 원본의 가치를 드높인다. 복제품과 원본은 서로의 가치를 보증하는 것이다. 1층 전시장에 대각선으로 설치된 8개의 상은 유물화 과정을 거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대조하는데, 후대의 복제품과 달리 원래는 색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형식과 경기도 미술관의 수변 공간에서 몇 달 동안 방치된 희끄무레한 상들이 4개씩 방향을 달리하여 세워놓았다. 유물에 대한 선입견은 색과 형태가 완전한 작품 군들을 오히려 생경하게 보이게 한다. 화장실에 비치되었다가 갤러리에 옮겨 설치된 [트랜스레이션-비너스]는 매우 그로테스크하다. 비너스 상은 통상적인 시점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 보는 각도로 설치되어 있는데, 인상을 좌우하는 코 부분이 심하게 닳아있어, 안면이 완전히 뭉개진 것 같은 모습이다. 시간의 시험은 색다른 장식으로 용인될 만큼의 소소한 변화가 아니라, 가혹한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이 벽에 걸린 미의 여신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예시한다. 필자가 처음 신미경의 비누조각을 보았던 때는 2000년대 초반 성곡 미술관에서의 전시로, 거기에서 비누는 미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었다. 위생과 아름다움을 위해 소비하는 비누로 미의 상징들을 정교하게 재현함으로서, 작가는 미와 소비를 연결시켰다.

신미경의 작품에서 소비는 미에 대한 관념의 소비를 말하는데, 사용하여 닳아 없어지는 예술품이라는 형식을 통해 미의 양태는 추까지 포함하게 된 것이다. 안면이 심하게 뭉개진 미의 여신은 괴기스러움이나 그로테스크함 등, 보편적으로 추로 간주되었던 개념이 미의 중심이 되어가는 현대의 경향을 예시한다. 1층 전실은 아프로디테 상과 황금색 불상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아프로디테 상이 놓여진 대리석 좌대의 정교한 무늬와 천으로 가린 아름다운 피부색은 실물 같은 착각을 향해 경주해온 서구 미학의 한 시기를 집약한다. 여신은 신화와 종교의 맥락에 놓여졌던 소재이지만, 고도로 발달한 착각의 기술은 진열되어 보여지고 수집되고 구매될, 미술관이나 백화점의 시대를 예견하는 것이다. 불상과 도자기, 여신상이 한 공간에 놓인 방식 자체가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새로운 맥락화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제의적 가치에서 전시가치로의 변화라는 발터 벤야민의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의 논지와, 각각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미술사적 관념에 의해 다시 배열되는 ‘벽 없는 미술관’(앙드레 말로)을 떠오르게 한다. 아우라가 상실된 전시가치로의 변환이나, 실제의 규모와 용도를 탈맥락화 시켜 대상 자체의 속성을 변형시키는 ‘상상의 박물관’(앙드레 말로)을 가능하게 한 주요 매개체는 바로 사진이다. 순간을 거의 실증적인 차원으로 고정시킴으로서, 한때 살아있었던 것의 부재를 증거 하는 사진은, 돌같이 단단해 보이지만 거품으로 사라져 버릴 비누가 야기하는 역설적 느낌과 닮았다.




신미경이 정교하게 재현한 조각상이나 도자기상들 자체가 관객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일련의 선행 교양이나 지식이 필요하고, 그 교양이나 지식을 위한 학습의 주된 도구는 가장 효율적인 복제 매체 중의 하나인 사진이 될 것이다. 세계를 단편으로 쪼개고 코드화시켜 재배치하는 사진술의 방식은 근대 이후의 시각적 관습에 깊이 스며 있다. 진기한 것들을 종류별로 모아 배열하는 방식에는 아무리 잘 짜맞추려 해도 빈틈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간극들에 서 감지되는 모순이나 부조리 또한 현대적인 미의 대표적인 면모로 자리 잡아 왔다. 2층 전시장에 다소간 무원칙적으로 배열된 도자기들이 그러하다. 달 항아리처럼 은은한 도자기부터 중국풍의 화려한 도자기, 반투명한 붉은 병 시리즈까지 다양한 형태와 무늬가 새겨진 수 십 개의 도자기들이 빼곡하게 집결되어 있다. 전통이 급격히 단절되고 망실된 부분이 많은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의 것 역시 번역의 대상이 된다. 도자기 시리즈는 2006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영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하는 작가에게는 서구의 도상만큼이나 동양의 도상도 번역과 해석의 필요성을 야기한 것이다. 학교 옆에 있던 대영 박물관의 소장품에서 영감을 얻어왔던 작가는 2007년에 대영박물관에서 열린 달 항아리 특별전시를 통해 또 다른 실험을 할 기회를 잡는다.

그것은 한국관의 달 항아리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기간 동안 비누로 만든 신미경의 달 항아리가 그 유리관에 전시되는 프로젝트였다. 사람들은 유리관에 들어있는 것이 비누로 된 가짜임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한 것은 신미경의 절묘한 솜씨가 뒷받침되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박물관이라는 맥락 때문이다. 박물관의 좌대와 유리는 그 장치가 된다. 머나먼 동양의 먼 옛날, 익명의 장인이 만들었을 특정한 물건은 박물관이라는 맥락에 의해 고미술품으로서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타자는 동일자의 언어로 번역되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동양에서 온 여성 조각가 신미경은 타자이다. 이 타자는 돌을 비누로 착각하는 이방인의 시선을 통해 교묘한 트릭을 만들어냈다. 이 트릭을 통해 작가는 타자를 타자의 모습 그대로 동일자의 자리에 앉혀 놓았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이라는 공적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낯선 비누향기는 타자의 복귀를 예감케 한다. 한국에서 달 항아리는 동양 또는 한국적 미의 전형으로 상찬되어 왔다. 제대로 알기도 전에 상투화되어 버린 경향도 있다. 그러나 신미경이 번역한 달 항아리를 보면, 균형이 안 맞는 듯 하면서도 충만한 형태라는 매우 특별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번역이란 문화의 간극 속에서 행해지는 일이다. 그러나 완전한 번역은 불가능하다. 동일자의 언어로 환원되지 않고 남아있는 차이는 남아있다. 신미경의 비누조각은 동서고금이라는 시공간적 간극들을 극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이 차이를 감식하도록 촉구한다.

출전- 월간미술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