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영은 빈 공간에 스며든 빛의 다양한 층위들을 재현한다. 창이나 문으로 들어오는 자연광, 국부 또는 전체를 조명하는 인공광원, 심지어는 촛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광원이 동원된다. 한 공간 안에 그렇게 다양한 빛의 층위--다양한 명도, 빛이 떨어지는 각도에 의한 형태의 변화--들을 집결시키기 위해서는 육안 뿐 만아니라 사진의 도움도 필요했다. 공간 자체를 정교하게 연출한 흔적이 보인다. 그녀의 그림은 연극 무대 같은 축소모델을 세우고 다양한 광원을 비춰가며 사실주의를 구현하려 했던 르네상스 거장들의 시각적 실험이 떠오른다. 적절한 장소를 택해서, 연출을 하고 그림을 그리지만, 그리기 자체는 픽션이 아니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제멋대로 첨삭하기보다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주어진 사실을 정교하게 재현한다. 무한한 자연을 유한한 예술적인 형식으로 포착하기 위해 한계 설정에 충실하다. 그런 점에서 정보영의 작품은 매우 고전주의적이다. 물론 정보영의 작품에서 실내에 떨어진 자연광은 주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빛에 의해 가능한 무한한 변수마저도 한정지을 수는 없다. 고전주의 회화에서도 명확한 구도로 설정된 전경 뒤로 펼쳐진 빛을 머금은 하늘과 구름은 이성적 계산을 초월하는 부분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계산된 실내는 화가가 발견한 공간에 대한 이상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정보영의 그림은 선택과 연출, 그리고 세밀한 사실주의를 통해, 근 몇 년간 미술시장을 지배했던 하이퍼 리얼리즘과는 다른 깊이를 가지게 된다. 다양한 거울 반사면에 비추어진 뮤직 박스 댄서나 뜬금없이 여기저기 켜져 있는 촛불은 광원의 실험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상징적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알레고리와 상징은 더 이상 보편적인 것이 아니므로, 수수께끼 같은 양상을 보인다. 정보영의 그림에는 수수께끼 속에 내재된 시적인 정조와 고요함이 있다. 백주 대낮에 켜진 실내의 촛불, 공간 귀퉁이에서 홀로 타오르는 촛불은 인간에 대한 비유로 읽혀진다. 인간이 매순간 호흡하고 사는 과정 자체가 바로 물질이 연소되는 과정 아니겠는가. 인형이나 촛불에 비한다면 공간은 매우 거대하다. 모델이 된 공간 자체가 아기자기한 주거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높은 천정이 있고 아무 장식이 없는 곳이다. 많은 작품의 모델이 된 청주의 몸 미술관은 가히 공간과 빛의 실험실이 될 만하다. 여러 각도에서 들어오고 다양한 형태와 색조로 물든 빛의 흔적들은 보이지 않는 조화로운 질서를 예감케 한다.
뮤직 박스 댄서의 경우도 촛불처럼 인간에 대한 상으로 읽혀질 수 있다. 인간을 자동인형과 비교하는 것은 태엽을 감아주는 전능한 창조자의 존재를 암시한다. 이신론(理神論)같은 근대 사상이 그러했듯이 기계론은 신의 존재와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관념은 현대미술에서 드물어진 가치로, 정보영의 작품을 고풍스럽게 보이게 한다. 그러나 작품 [bright room]에서 여러 면으로 접힌 거울은 다양한 각도에서 인형을 비추지만 어느 것도 완벽한 대상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인간은 물론 공간에 대해 선험적인 틀을 미리 가정해 버리는 것은 현대의 화가에게는 불가능한 것으로 다가온다. 현대는 ‘중심의 상실’(제들마이어)이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추이 속에 변화되는 공간의 분위기를 포착하려는 노력은 정지 속에 움직임을 담아야 하는 회화의 숙명이었다. 시공간 상에 펼쳐지는 빛의 다양한 유희를 캔버스 위에 고정시키는 작업은 끝이 없이 진행될 듯하다. 무한한 것을 유한한 양식으로 고정시키기 위한 한계의 설정은 게임을 계속하기 위한 장치이다.
출전-2009 경기문화재단 시각예술부문 지원 사업 모니터링 보고서
출전-2009 경기문화재단 시각예술부문 지원 사업 모니터링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