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된 소재는 말미잘, 멍게, 맨드라미, 향나무, 선인장, 버섯 등 계(界)를 막론한다. 부산 출신인 여상희는 수많은 자연적 소재 중에서 해양 생태계에 속하는 것들에 친숙하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특정한 종의 정확한 재현이 아니라, 조형적 요소로서 등장한다. 주된 이미지인 말미잘의 경우, 특유의 동물적 꿈틀거림과 꽃 같은 식물적 형태가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동식물의 구분이 모호한, 보다 원초적인 단계로 소급된다. 그녀에게는 풍부한 돌기나 막이 만드는 불확정적이며 복합적인 형태에 대한 취향이 있다. 경탄할 만한 자연의 창조물들을 관찰하는 시점이 두드러지는 여상희의 작품은 대학 때부터 10년 넘게 몰두해온 소재이자 주제이다.

다양한 유기적 형태(biomorphic)는 대지나 살덩이를 연상시키는 기저 면으로부터 돋아난다. 배경은 비워있거나 형태와 비슷한 색조, 또는 하늘색 등으로 채워져 있는데, 그 무엇이든 호기심어린 눈으로 자연을 관찰하는 시점이 내포되어 있다. 움직임이 내재된 피부 색조 때문에 동물이 주된 소재일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상희의 작품에는 식물로부터 출발한 형태도 있다. 식물에서 새순이 돋아나는 첨단 지점들, 하나의 덩어리에서 줄기를 뻗은 형태가 다시 분열을 거듭하는 형태가 그것이다. 작품의 주된 인상을 결정하는 말미잘 형태 자체가 꽃송이와 유사하다. 반대로 주름 잡힌 맨드라미꽃으로부터 창자나 뇌 같은 형태를 발견된다. 그러나 식물 특유의 녹색이 제거되고, 구체적 형태보다는 형태화 과정에 집중하는 방식 때문에, 동식물의 구별이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형태 못지않은 강력한 색감은 기생생물이든 식물이든지 간에 동물적 느낌을 부여하는 요소이다.
여상희의 작품이 건조한 자연주의를 넘어서는 지점은, 자연이 발명한 기발한 형태에 부과된 색감이다. 주로 사용하는 주황색 계열에 대해 작가는 강한 에너지를 발견한다. 이 계통의 색을 칠하면 마치 백열등이 켜지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그것은 햇살 가득한 곳에서 눈을 감을 때 어른거리는 빛을 머금은 주황에 가깝다. 이 색조는 피부를 미세하게 가로지르는 핏줄과 빛이 반응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주황은 자연적 형태에 덧입혀지는 특정한 색이기 보다는 빛 에너지, 눈을 감았을 때의 환상성, 피부 아래 펼쳐진 핏줄에 내포된 동물성 등이 결합된 또 하나의 실체로 다가온다.
통상적으로 자연계를 대표하는 색조는 녹색이라고 간주된다. 그것은 엽록소를 통해 무기물을 유기물로 전환시킴으로서, 동물을 포함한 지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최초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식물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색깔 그자체로 본다면 녹색은 차갑다. 동물적인 온기와는 거리가 있는 색이다. 형태면에서 여상희의 작품은 동물과 식물의 중간적 위치를 가지며, 폴립처럼 어딘가에 고착되면서도 자유롭게 몸통과 말단을 움직이는 유동성을 보인다. 식물은 셀룰로오스성 지지조직 때문에 동물에 비해 견고하고 크며 고정된 형태를 가진다. 반면 동물은 입과 항문이라는 두 말단이 통해 있는 소화관을 가진 존재로, 유동성과 이동성이 있다. 생물학자들은 고대의 해양적 환경으로부터 기원하였으며, 체액이 가득한 자궁에서 태어난 동물은 몸통의 이 빈 공간에 자신이 비롯했던 원초적 환경을 품음으로서, 외적 환경에 보다 유연하게 적응하였고 식물처럼 한 곳에 정착해야만 하는 운명을 벗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식물적 비유가 가득한 여상희의 작품이 비롯한 또 하나의 범주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공생명이다. 다양한 방향으로 내뻗은 촉수들이 가지는 고탄력의 질감과 번질거리는 광택은 마치 캡슐 같은 느낌을 준다. 대부분의 작품에 붓터치가 남아있지 않아 인공성은 더욱 강조된다. 자연관찰자로서의 입장은 여성이자 화가로서의 정체성과 크게 어긋나 보이지 않는데, 리니지 같은 게임에 열광하는 취미는 다소간 예외적이다. 평소에 즐기는 게임은 작가에게 플라스틱한 감각을 부여해 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에스키스나 배경의 색변환 따위는 컴퓨터상에서 시험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이 최종 산물은 아니며, 이후에 느낌을 집중해서 그리는 작업이 이어진다.

동물도 식물도 아닌 형태는 예술가의 상상력 뿐 아니라, 과학기술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실험들을 연상시킨다. 여상희의 작품에 나타나는 다양한 유기적 형태들은 생물의 감각능력을 흉내 내는 인공적 섬유조직이나 복잡하게 접힌 막으로 시뮬레이션 되곤 한다. 인간의 개입을 넘어서 스스로 복제하는 단계를 향해 진화 중인 도정에서, 자연과 인공의 경계도 애매해진다. 브루스 매즐리시는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라는 부제가 붙은 책에서, 기계가 자연을 흉내 내는 능력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가장 강한 욕망이었던 완전한 인조환경 속의 삶에 위험할 정도로 근접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기체와 기계의 결정적인 차이는 변화와 선택에 대한 유연성이다. 어디서부터 비롯된 형태와 형식을 가지든지, 여상희의 도상에서 공통적으로 내재해 있는 유연성은 생명의 외적 재현이 아닌, 생명력 그 자체에 대한 추상으로 보여 진다.
그러나 작가는 충전된 생명력만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질병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번 전시의 부제 ‘Rash’는 피부에서 일어나는 발진으로부터 온 것이다. 특히 얼마 전에 작가가 앓았던 대상포진은 과학적이고 심미적인 대상으로만 간주해왔던 자연적 생명력에 내포된 제어 불가능한 요소를 강조하게 했다. 그것은 저 멀리 있는 풍경이 아니라, 자신의 경계를 침투하는 보다 직접적인 힘으로, 불안과 공포를 비롯한 강렬한 느낌을 자아낸다. 형태의 외곽선이 매우 변화무쌍한 이상(異狀)세포는 다른 작품과 달리, 순간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붓 터치를 남겼다.
유기체를 이루는 다양한 차원의 막은, 몸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는 피부, 즉 보다 구체적인 바탕으로 전치된다. 몸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와해되는 질병적 요소는, 마카로니나 비스켓 등에서 무정형적 살덩어리나 구멍 같은 느낌을 살려서 그린 10 여 년 전의 작품에서도 발견되는 경향이다. 표면이 더 부풀어 오르면서 비스켓 구멍을 중심으로 주름이 잡힌 살의 모습이나, 날카롭게 그어진 선들이 깊게 베인 상처 같다. 제어되지 않는 이상적인 증식이 만들어내는 상처는 생명이 가지는 자체 치유 능력에 의해 상쇄되곤 하지만, 과도하면 유기체의 경계를 완전히 파열시키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 생명의 이상 현상은 공포와 경이를 동시에 낳는다. 예술과 마찬가지로 과학도 경이에서 태어난다. 조르주 캉길렘은 [정상과 병리]에서 생명적인 경이란 질병에 의해 나타나는 불안이라고 말한다.
병리적인 것이란 생물학적 규범의 결여가 아니라, 생명의 새로운 과정이다. 그런데 생명의 규범은 정상일 때보다 병리적일 때 더 잘 인식된다. 캉길렘은 이 책에서 살아있는 유기체에서 병리적 현상이란, 대응하는 생리적 현상의 많고 적음에 따른 양적 변이 이상은 아니라고 인용한다. 따라서 유기체는 그자체가 병리적인 것을 내포한다. 정상 속에 내재해 있는 이상은 종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도 있지만, 새로운 형태에 대한 단서를 주는 창조자일 수도 있다. 정상과 이상이 공존하는 유기체는 자기를 보존하고 치유하는 항상성과 변화 지향성을 동시에 가진다. 이러한 역학관계를 통해 유기체는 진화한다. 여상희의 작품에도 상반되는 듯한 두 가지가 공존한다. 뒤엉켜 있으나 미끌 거리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혼돈속의 질서를 보여주는 그녀의 작품은, 객관적 자연으로부터 출발하고 상상에 의해 변형함으로서 기존의 익숙함을 미지의 이질성으로 전환시킨다.